20대 시절 데즈카 오사무 감독의 작업 모습. 만화 <로스트월드> 캐릭터 ‘미미오’가 그를 지켜보듯 책상 위에 앉아 있다. 데즈카 오사무 공식 누리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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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셔츠를 샀다. 일본 야구 구단 세이부 라이언스의 마스코트가 그려진 티셔츠다. 나는 야구팬은 아니다. 부산 출신이라는 이유로 롯데 자이언츠를 응원하는 건 사실이다. 1992년 롯데가 한국 시리즈에서 우승할 때 나는 고등학교 2학년이었다. 염종석의 분투로 우승하는 순간 나는 눈물을 흘렸다. 이제는 롯데의 시대가 온다고 생각했다. 그 시대는 30년째 오지 않고 있다. 주변 롯데 팬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앞으로 30년 동안 오지 않을 가능성도 있다. 그렇다고 응원하는 구단을 바꿀 수도 없는 일이다. 부산인에게 한번 롯데는 영원한 롯데다. 천형이다. 아, 이건 야구 칼럼이 아니므로 롯데 이야기는 이걸로 끝내도록 하자.
세이부 라이언스의 티셔츠를 산 이유는 마스코트 때문이다. 이름이 ‘레오’인 사자다. 오랜 일본 만화 팬이라면 이미 눈치를 챘을 것이다. 레오는 1980년대 한국에서도 방영한 일본 애니메이션 <밀림의 왕자 레오>의 주인공이다. 맞다. <우주소년 아톰>, <사파이어 왕자> 등으로 유명한 만화가 데즈카 오사무가 창조한 캐릭터다. 세이부 라이언스는 1978년 어린이 야구팬을 끌어들이기 위해 저작권료를 지급하고 레오 캐릭터를 샀다. 아이러니하게도 데즈카 오사무는 한신 타이거스 팬이었다. 저작권료가 꽤 세기는 셌던 모양이다.
나는 데즈카 오사무를 존경한다. 만약 만화와 애니메이션 역사를 창조한 두 명의 인물을 꼽는다면 하나는 월트 디즈니, 다른 하나는 데즈카 오사무가 되어야 마땅하다. 1928년생인 그는 오사카 제국대학 의학부에서 의사가 되기 위해 공부하던 1946년 4컷 만화를 일간지에 그리면서 만화가로 데뷔했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몇몇 독자는 ‘의사를 포기하고 만화가가 되다니!’라며 놀라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요즘 한국에서는 의사가 되는 것이 거의 유일한 인생의 목표처럼 받아들여지는 경향이 있다. 어쩌면 만화 역사를 바꾸어 놓을지도 모를 재능 있는 아이들이 펜 대신 칼만 들게 생겼다. 물론 이건 사회 칼럼이 아니므로 의대 이야기는 이걸로 끝내도록 하자.
데즈카 오사무는 1950년대 <우주소년 아톰>, <밀림의 왕자 레오>를 연이어 발표하면서 당대 최고의 만화가 지위에 올랐다. 그의 꿈은 만화에 그치지 않았다. 오사무가 진정으로 꿈꿨던 것은 애니메이션 제작이었다. 당시 세계에서 제대로 된 애니메이션 시리즈를 만들 수 있던 제작사는 디즈니가 거의 유일했다. 데즈카 오사무가 애니메이션을 만들겠다고 하자 모두가 고개를 저었다. 데즈카 오사무는 꿈을 접지 않았다. 그는 1962년 ‘무시 프로덕션’을 만든 뒤 일본 최초의 텔레비전 애니메이션 시리즈인 <우주소년 아톰>의 제작에 들어갔다. 공개된 <우주소년 아톰>은 역사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그리고 일본에서 본격적인 애니메이션 붐을 일으켰다. 우리가 지금 극장에서 <더 퍼스트 슬램덩크>와 <스즈메의 문단속>을 보며 감동의 눈물을 흘릴 수 있는 건 데즈카 오사무 덕분이다.
2009년 도쿄 국제 애니메이션 박람회에서 한 관람객이 ‘아톰’(아스트로 보이) 캐릭터와 포즈를 취하고 있다. EPA 연합뉴스
데즈카 오사무가 어린이용 만화와 애니메이션만 만든 것은 아니다. 내가 보기에 그의 진수는 보다 진중하게 그려진 성인용 만화에 있다. 만약 당신이 만화의 팬이라면 ‘불새’라는 전설의 동물을 소재로 서기 3세기에서 35세기 미래를 넘나드는 데즈카 오사무 일생일대의 걸작 <불새>를 놓쳐서는 안 된다. 석가모니의 생애를 그린 <붓다> 역시 <불새>에 맞먹는 걸작이다. 내가 더 좋아하는 작품들은 조금 덜 알려진, 결코 아이들에게 권할 수 없는 진정한 성인 만화들이다. 가상의 전염병을 소재로 인간 사회의 부조리를 그려내는 <키리히토 찬가>, 일본 패전 뒤 몰락해가는 가문을 그린 <아야코>, 60년대 말 전공투 운동 실패 이후의 암울한 일본 사회 분위기를 ‘섹스’라는 키워드로 풀어내는 <아폴로의 노래> 등은 거칠고 어둡고 막막하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데즈카 오사무 만화는 그가 사망한 1989년 직전에 내놓은 <아돌프에게 고한다>다. 나치 독일 배경으로 아돌프라는 이름을 가진 세 남자의 인생을 다루는 이 만화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분쟁까지 담아내며 전쟁과 국가주의를 평생 경멸했던 데즈카 오사무의 철학을 집대성한 걸작이다. 놀랍게도 <아돌프에게 고한다>는 1983년부터 1985년까지 만화 잡지가 아닌 주간지 <주간문춘>에 연재됐다. 연재 뒤 출간된 단행본은 만화 코너가 아니라 문학 코너에서 판매됐다. 만화의 국가인 일본에서도 만화가 문학으로서 가치를 인정받은 것은 데즈카 오사무의 이 걸작이 최초였다는 의미일 것이다.
데즈카 오사무는 한국에도 출간된 <데즈카 오사무의 만화 창작법>이라는 책에서 작가로서 피하면 좋을 세 가지 원칙을 이야기한 바 있다. 1. 전쟁이나 재해의 희생자를 놀리는 것 2. 특정 직업을 깔보는 것 3. 민족이나 국민, 대중을 바보로 묘사하는 것이다. 그래서 데즈카 오사무의 작품들은 이 원칙에 완벽하게 들어맞는 걸까? 그렇지는 않다. 문제는 세월이다. 그는 정치적으로 윤리적으로 올바르길 바랐던 사람이지만 시대가 바뀌면 윤리도 바뀌게 마련이다. 옛날의 윤리는 낡은 것이 된다. 이를테면 그는 흑인을 비롯한 다른 인종을 그릴 때 외모를 매우 과장하는 방식으로 데포르메(회화에서 대상을 사실적으로 묘사하지 않고 변형하고 왜곡을 가하는 기법) 했다. 여성에 대한 표현 방식도 현대적이지 못하다. 그래서 일본 출판사 고단샤(講談社)는 데즈카 오사무 전집을 발간하며 아래와 같은 서문을 달았다. 그 서문은 너무나도 훌륭하기 때문에 약간의 축약을 거쳐 그대로 인용해야만 할 의무를 느낀다.
“데즈카 만화 전집 작품 중에는 흑인과 동남아시아 사람들을 비롯해 많은 외국인이 나옵니다. 그들 그림 중 일부는 과거 시절을 과장하고 있어서 현재와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최근 이런 식으로 그리는 것은 인종 차별이라는 지적이 있어 왔습니다. 이런 그림에 불쾌감을 느끼고 모욕당했다고 느끼는 사람이 있는 이상, 우리는 그 목소리에 진지하게 귀 기울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사람의 특징을 과장해서 패러디화하는 것은 만화에서 가장 중요한 수단 중 하나입니다. 작가는 인간뿐 아니라 동식물과 상상 세계의 사물까지 유머 넘치게 캐릭터화하고 있습니다. 또한 작가는 항상 문명과 비문명, 선진국과 개발도상국, 권력자와 약자, 부자와 빈자, 장애인과 비장애인 등, 모든 증오와 대립은 악이라는 신념을 지녔던 사람으로, 이야기의 근저에는 강한 인간애가 흐르고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굳이 ‘데즈카 만화 전집’을 그대로 간행하고 있는 것은 작가가 이미 고인이어서 작품의 개정이 불가능하다는 것과, 제삼자가 고인의 작품에 손을 대는 것은 인격권의 문제도 있거니와, 우리에게는 일본 문화유산으로 평가되는 작품을 지킬 의무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지구상의 모든 차별에 반대하며, 차별이 없어지도록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출판에 종사하는 자의 책임이라고 생각합니다.”
데즈카 오사무 감독이 1960년대 ‘무시프로덕션 아니메 제작실’에서 그림 그리는 모습. 데즈카 오사무 공식 누리집
최근 1990년 사망한 영국 아동문학가 로알드 달의 작품을 두고 문화적 논쟁이 벌어졌다. 펭귄 출판사 산하의 아동문학 출판사 퍼핀은 그의 전집을 새로 출간하며 외모, 인종, 성과 관련된 표현들을 모조리 정치적으로 올바르게 수정했다. 뚱뚱한(fat)은 거대한(enormous)으로 바꿨다. 검다(black)와 하얗다(white)라는 표현들은 사라졌다. 캐릭터 설정도 달라졌다. <판타스틱 미스터 폭스>의 아들들은 딸로 바뀌었다. <찰리와 초콜릿 공장>의 움파룸파는 남성(Men)이 아니라 사람(People)으로 바뀌었다.
즉각적인 반발이 쏟아졌다. 리시 수낵 영국 총리는 “픽션은 보존되어야 하며 에어브러시로 지워버려서는 안 된다”고 대변인을 통해 발표했다. 표현의 자유를 위해 목숨 걸고 싸워온 살만 루슈디도 “아둔한 검열”이라며 “출판사와 로알드 달 유산 관리자들은 수치심을 느껴야 한다”고 분노했다. 당신이 어디에 동의할지는 모르겠다만 나는 이것이 문화적 반달리즘에 가까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팀 버턴, 웨스 앤더슨처럼 못된 유머를 사랑하는 예술가들이 로알드 달의 작품을 영화화한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로알드 달 동화는 착한 동화였던 적이 없다. 비틀린 유머와 무시무시하게 풍자된 캐릭터들로 가득한 일종의 ‘안티-디즈니’적 세계에 가까웠다. 표현을 정치적으로 올바르게 바꾼다고 착해지는 세계가 아니다. 바로 그것이 로알드 달 작품의 매력이다.
모든 정치적으로 21세기적이지 못한 표현을 문학과 만화의 역사에서 표백하는 것으로 우리는 정치적으로 올바른 존재가 될 수 있을까? 아이들을 윤리적으로 완벽하게 보호할 수 있을까? 아니, 아이들을 윤리적으로 완벽한 가두리 양식장에 가두어놓고 보호하는 것이 정말 옳은 일일까? 우리는 과거의 문학을 보며 역사를 배운다. 그 시대의 부조리를 목격한다. 그렇게 지난 세계와 지금 세계를 비교하고 연결하는 법을 배운다. 과거를 지우개로 지우는 것으로 멋진 신세계가 오는 것은 아니다. 아, 만약 그 ‘멋진 신세계’가 올더스 헉슬리적 신세계라면 가능한 일이기도 하겠다만 말이다. 사실 퍼핀 출판사가 했어야 할 일은 이미 고단샤가 ‘서문’이라는 훌륭한 방식으로 해냈다.
데즈카 오사무의 작품은 정치적으로 올바르게 수정되지 않았다. 대신 아이들은 ‘서문’을 읽고 데즈카의 세계를 새롭게 이해하게 될 것이다. 과거는 여전히 거기에 있다. 아이들은 그걸 통해 배울 것이다. 그리고 윤리적으로 더 나은 미래를 만들어나갈 것이다. 과거 없는 미래는 존재하지 않는다.
영화 잡지 <씨네21> 기자와 <허프포스트코리아> 편집장을 했다. 사람·영화·도시·옷·물건·정치까지 관심 닿지 않는 곳이 드문 그가 세심한 눈길로 읽어낸 인물평을 싣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