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익의 노래로 보는 세상] 22년차 라디오 피디의 ‘나만의 금지곡’
‘여자이니까’ 뮤직비디오 한 장면. 화면 갈무리
잠시 넌 저 먼 곳으로 여행을 떠난 거야.
언제든 다시 돌아와. 난 여전히 너의 여자야.” 저기요, 잊어버리세요. 참 바보 같은 ‘여자’군요 당신! 그런데 이 ‘여자’로 추정되는 인물은 몇달 뒤 발표되는 신곡에 다시 등장한다. 이번에는 뭐라고 노래하는지 들어보자. “나를 포기했어. 너만 사랑했어. 그것만으로도 부족했었나?
바보 같은 내게 이럴 수 있어?
다시 생각해봐. 내게 이러면 안 돼. 너 없인 살 수가 없어.
제발 나를 도와달라고 애원하며 붙잡고 싶어.” 처연한 발라드 같지만, 무려 코요태의 댄스곡 ‘순정’의 노랫말이다. 세상 신나는 댄스곡 가사가 이랬으니 그 시절 발라드는 어땠겠는가. 뭐 20세기 노래 속 ‘여자’들은 그랬다 치자. 내가 꼽는 최악의 노랫말은 21세기가 시작되고 나왔다. 2001년에 발표된 키스의 ‘여자이니까’ 가사를 보자. “도대체 알 수가 없어. 남자들의 마음.
원할 땐 언제고 다 주니 이젠 떠난대.
모든 걸 쉽게 다 주면 금방 싫증 내는 게 남자라 들었어.
다시는 속지 않으리, 마음먹어 보지만 또다시 사랑에 무너지는 게 여자야.
여자의 착한 본능을 이용하지는 말아줘.” 당시 신입 피디였던 나는 처음 듣는 순간 결심했다. 내 손으로 이 노래를 트는 일은 없을 거라고. 20년 넘게 라디오 피디로 일하면서 이 노래를 신청하는 사연을 꽤 많이 받았지만, 꿋꿋하게 버텼다. 가사가 너무 괘씸해서다. 이 노래는 개인적인 감정을 노래하는 차원을 넘어 남성과 여성을 싸잡아 편견의 밧줄로 묶어버린다. 여자는 사랑에 무너져 모든 걸 내주는 존재이고, 남자는 그런 여자에게 쉽게 싫증 내는 존재라고. 거기서 한술 더 떠 여자는 배신당하고도 또 사랑에 무너지는 존재이고, 심지어 그게 ‘착한 본능’이라고 단언한다. 20년 전에도 지금도 나는 이런 정서에 동의하기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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