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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미술관장은 정권따른 시절인연?…곳곳 리더십 공석·풍파

등록 2023-04-25 09:00수정 2023-04-25 09:33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노형석 기자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노형석 기자

‘이 땅의 공공미술관장은 언제 날아갈지 모르는 파리목숨 아닌가.’

최근 국내 미술판 사람들은 이런 반문을 새삼 화두처럼 던지고 있다. 올봄 한국 미술판의 주요 공공미술관들이 잇따라 관장 부재로 리더십 부재의 위기를 맞고 있기 때문이다.

근무 기간이 보통은 2~3년이고 길어봤자 4년밖에 안된다는 게 고민의 초점. 지난주 윤범모 국립현대미술관장이 재임한 지 1년 여 만에 자진 사퇴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충격파를 던진 게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그는 2주 전 상급기관인 문화체육관광부 박보균 장관에게 스스로 물러나겠다는 의사를 표명한 뒤 사직서를 제출했는데, 불과 며칠 만에 문체부가 전격적으로 수리해 의원면직 처리됐다. 그는 2019~2021년 21대 관장으로 재직한 뒤 지난해 2월 문재인 정부 말기에 공모를 통해 22대 관장에 재임명됐으나 윤석열 정부가 출범한 이후인 지난 10월 국정감사에서 여당의원의 요구로 재임명 전 활동을 중심으로 강도 높은 특별감사를 받았다.

최근 자진사퇴한 윤범모 전 국립현대미술관장.
최근 자진사퇴한 윤범모 전 국립현대미술관장.

지난 1월 공개된 특별감사 내용은 내부 경위 파악되고 후속 조치가 마무리된 관내 간부들의 갑질 사례를 들춰내 재조사하거나, 치적으로 평가되는 백남준의 대작 <다다익선> 재가동 프로젝트 작업의 세부적인 절차상 문제 등을 지적한 것들이어서 퇴진 압박용이라는 관측이 나왔다. 특감 이후에도 자신과 직원들의 행적에 대한 내사가 계속됐고 1년 가까이 공석인 학예실장 선임 등에 대해서도 상부와 갈등이 빚어지는 등 압박이 가중되자 자진사퇴를 결심했다는 게 그와 가까운 미술계 인사들의 추론이다. 윤 전 관장은 18일 미술관 직원들에게 전하는 고별사를 통해 “시절인연이 다한 것 같아 자유를 찾아 떠난다. 하고 싶은 말은 많지만 참겠다”고 착잡한 감회를 전하기도 했다.

대구미술관장 취임 3달여 만에 서울시립미술관장으로 공직 자리를 바꾼 최은주 서울시립미술관장.
대구미술관장 취임 3달여 만에 서울시립미술관장으로 공직 자리를 바꾼 최은주 서울시립미술관장.

지난달 말엔 취임한 지 3달여밖에 되지 않은 최은주 당시 대구미술관장이 돌연 사표를 내고 서울시립미술관장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대구미술관 사령탑이 공석이 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공직자의 윤리를 저버리고 위계가 높은 상위 미술관장 자리를 좇아 지역미술관장직을 팽개쳤다는 비판이 나왔다. 이후 대구미술관은 신임 관장 공모 절차에 들어가 이달 초 안규식 전 클레이아크 김해 미술관장을 내정했다. 그러나 시쪽은 지난 19일 안씨의 과거 미술관 학예사 시절 징계 기록을 찾아냈다는 이유로 내정을 전격 취소하자, 안 전 관장이 법적 대응 의사를 내비치며 반발하는 등 혼선을 거듭하고 있다. 지난해 거장 백남준의 대표작들을 소장 전시하고 색다른 대형 미디어아트 기획전으로 관객 동원 등에서 대박을 터뜨렸던 울산시립미술관의 서진석 관장도 계약 기간 연장이 어려울 것 같다는 시쪽의 언질을 최근 받은 것으로 전해졌다. 수년간 서구 거장 기획전 등으로 반향을 일으킨 전승보 전 광주시립미술관장도 지난해 연임이 무산돼 4년 임기만 채우고 물러났다.

대구미술관 신임 관장으로 내정됐다가 돌연 내정이 취소되자 법적 대응의 뜻을 밝힌 안규식 전 클레이아크 김해미술관장.
대구미술관 신임 관장으로 내정됐다가 돌연 내정이 취소되자 법적 대응의 뜻을 밝힌 안규식 전 클레이아크 김해미술관장.

자리를 중도사퇴한 관장직 인사들은 모두 경륜을 쌓은 중견 큐레이터들이다. 한국 미술판에서 20년 이상 전시기획을 하면서 관련 분야에서 인맥이나 담론 생산 등의 전문성을 인정받은 인사들이지만, 정부기관이나 지자체 산하의 공공미술관에서는 제대로 역량을 발휘한 선례들이 별로 없다. 국립현대미술관만 해도 1980~1990년대 공무원 관장들의 뒤를 이어 전문가 관장으로 등장한 미술사가이자 평론가였던 이경성과 임영방, 김윤수가 5년을 넘겼을 뿐 나머지 관장들은 2년 혹은 3년으로 내부 비리나 정치적 풍파로 중도사퇴하거나 해임되는 곡절을 겪어야 했다. 미술선진국이라고 일컫는 서구의 명문미술관들의 경우 관장직을 맡은 기획자들은 10년 이상 장수하는 것이 보편적인 관행처럼 자리 잡았다. 일례로 영국 테이트뮤지엄을 세계 최고의 명가 미술관으로 등극시킨 니콜라스 세로타 전 관장은 1988년부터 2017년까지 무려 29년간 재임했고, 지난해 한국근현대미술기획전을 펼친 마이클 고반 미국 엘에이 라크마 뮤지엄 관장은 2006년부터 지금까지 17년, 지난주 한국에서 거장 에드워드 호퍼 전을 주최한 애덤 와인버그 미국 휘트니미술관장은 2003년부터 20년 동안 재직 중이다. 한국과 다른 법인 시스템 아래서 이사회로부터 능력과 전권을 인정받으며 자기 정책을 펼친다는 점이 다르지만, 기획·운영자의 독립성과 책임주의가 철저히 관철되는 것이 특징이다. 하지만 지자체와 국가기구에 사실상 종속된 미술기관의 현실은 서구와는 한창 거리가 있다. 국내 미술계의 한 중견 기획자는 “정치로부터 독립적인 시각예술 분야 기획자의 전문성과 역량은 사실상 도외시된 채 미술관장 자리를 중앙정치, 지역정치의 부속물로 여기고 바라보는 관행이 뿌리 깊고 일부 기획자들은 이런 구조에 기생하면서 자기 권익과 욕망을 충족시켜온 것이 저간의 사정”이라고 짚었다.

미술계 내부, 특히 큐레이터 기획자들은 그동안 공공미술관의 리더십 문제에 대해 미술계에서 논의를 공론화한 적이 거의 없다는 한계를 안고 있다. 이번 사태를 계기로 미술인들이 공개적으로 의견을 제기하면서 현재의 공공미술관 리더십 문제에 대해 개선책을 논의하려는 의지와 태도가 절실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글 ·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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