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간 학비 1억원에 웬만한 돈과 ‘빽’으로는 못 간다는 청담국제고등학교. ‘귀족학교’ 운영에 반대하는 서민층 부모를 보며, 이 학교 학생들은 말한다. “본인 자식들도 우리 학교 다니게 해봐라 공중제비 돌며 좋아할 새끼들일걸.” 학생이 500만원짜리 가방을 사는 건 돈 아깝다는 ‘서민’ 과외 선생의 말에는 비아냥댄다. “엄마가 우리나라 사람들은 본인이 못 갖는 걸 안 갖고 싶은 척 깎아내린다고 하더라고요. 특히 가난한 사람들이.”
지난달 31일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웨이브와 넷플릭스에 1·2회가 공개된 10부작 드라마 <청담국제고등학교> 장면이다. 차상위계층인 ‘흙수저’ 혜인(이은샘)과 ‘귀족학교’에서도 ‘왕족’인 제나(김예림)가 살인사건 목격자와 용의자로 얽히는 이야기다. <꽃보다 남자>(KBS2), <상속자들>(SBS)처럼 부모 재력에 아이들 서열이 나뉘는 학원물은 꾸준히 있었지만, 최근에는 대사나 상황이 더욱 노골적으로 ‘가난을 부끄러운 것’으로 비추고 있어 문제로 지적된다. 지난해 <금수저>(MBC)에서는 주인공이 신비한 능력을 지닌 ‘금수저’를 활용해 가난한 자신의 부모와 부자인 친구 부모를 바꾸는 설정도 등장했다.
<청담국제고등학교>는 ‘흙수저’를 규정하고 ‘귀족’을 부러워하는 데서 나아가 “태생부터 다르다”며 계급을 나눈다. 특별전형으로 입학한 ‘흙수저’들한테 “가난한 거 자체가 죄”라며 폭력을 행사하는 것은 둘째 치고, 보통 학교에서도 차상위계층으로 알려지면 친구들이 멀리한다. 우연히 남의 명품 가방을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올리며 ‘금수저’인 척하는 혜인은 “금수저냐, 차상위계층이냐, 똑바로 말하라”고 추궁당한다. 이 드라마에서 가난은 감춰야 할 부끄러운 것으로 그려진다.
빈부 격차를 다룬 청춘 드라마를 만들었던 한 피디는 “과거에는 빈부격차를 다뤄도 어려운 환경에서 힘차게 살아가는 인물을 등장시켰다면, 최근에는 드라마가 되레 시청자한테 ‘가난이 죄’라는 인식을 심어주고 있다. 인상적이어야 한다는 생각에 빈부 격차를 극단적으로 보여주면서 일어나는 현상 같다”고 말했다. 청춘을 소재로 한 작품 경험이 있는 한 드라마 작가는 “‘흙수저’라는 표현이 가슴 아픈 건, 단어 자체에 부모의 상황까지 포함돼서다. 10~20대를 앞세운 작품은 비슷한 상황에 처한 시청자들이 받을 상처를 생각해 단어 한마디도 신중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드라마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선을 넘어가는’ 설정은 가난만이 아니다. ‘장애’와 ‘병’ 등도 마찬가지다. 최근 <닥터 차정숙>(JTBC)은 크론병에 대해 그릇된 정보를 전달해 시청자 항의를 받았다. 현재 방영 중인 <가면의 여왕>(채널A)에서, 소아마비 후유증으로 다리가 불편한 주인공 주유정(신은정)은 결혼식을 앞두고 남자의 사생활을 알게 되고 화를 낸다. 남자는, 임신까지 한 주유정에게 이렇게 말한다. “난 너랑 결혼 안 해도 얼마든지 결혼할 수 있어. 멀쩡한 여자랑. 집에 가서 태교나 잘해. 너 같은 모지리가 태어나지 않길 바라면서.” 소아마비로 다리가 불편한 한 50대 여성 시청자는 “처음에는 주인공이 다리를 저는 설정이어서 의외였는데, 나중에는 그걸로 나쁜 남자한테 당하고, 자신을 사랑해주는 남자들한테 고마워하는 식으로 나오는 게 기분이 좋지 않았다. 당당하게 잘 살고 있는 나한테, 그러면 안된다고 말하는 것 같다”고 했다.
역사를 무리하게 활용하는 설정도 있다. 지난달 넷플릭스에서 선보인 영화 <늑대사냥>(2022년 개봉)은 일제강점기 강제징용 피해자를 ‘괴물’로 등장시킨다. 고어물인 이 작품에선 1943년 태평양전쟁 당시 강제징용 피해자가 일본군에 인체 실험을 당하다 늑대의 힘과 혼합된 인간병기 ‘알파’로 거듭난다. 알파는 외상성 스트레스 증후군으로 인한 무차별적이고 극단적인 폭력성으로 선악 구분않고 살인을 저지른다. 이 영화를 본 누리꾼들은 ‘실제 강제징용된 피해자들이 있을 텐데, 그들을 괴물로 등장시켜 모두를 죽여버리는 설정이 뜬금없고 의미도 없다’는 반응을 많이 보였다.
지난해 <약한 영웅 클래스1>(웨이브)에서는 정치인이 공개 입양을 한 자식에게 “너는 종자가 글러먹었다”거나 “넌 필리핀에 도착하자마자 내가 사람 써서 죽여버릴 거야”라고 말하는 장면 등이 논란이 됐다. 전국입양가족연대 김지영 사무국장은 “미디어의 묘사가 입양 이미지에 큰 영향을 미친다. 잘못된 방향이 입양인 당사자한테 상처를 주고 입양에 대한 편견을 줄 수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
드라마는 현실을 반영하고 그릇된 욕망들도 실제 존재하는 게 아니냐는 이들도 있지만, ‘그럴 수 있다’는 이유만으로 거리낌 없이 드라마에 활용하는 것은 제작진이 직업윤리를 저버리는 것이라는 비판이 나온다. 정덕현 대중문화평론가는 “드라마가 꼭 메시지를 줘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역사 피해자나 질병, 가난 등 설정을 극화할 때는 누군가 아플 수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꼭 필요한 것인지를 따져 사용해야 한다”고 말했다.
남지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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