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국제도서전 개막식이 열린 14일 서울 삼성동 코엑스 앞에서 문화연대, 민변 문화예술스포츠위원회, 블랙리스트이후(준), 한국작가회의 등 여러 단체들 소속 문화예술계 인사 10여명이 오정희 소설가를 서울국제도서전 홍보대사로 위촉한 것과 관련해 항의하는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양선아 기자
14일 개막한 국내 최대 ‘책 축제’인 서울국제도서전 홍보대사 가운데 한 명인 원로 소설가 오정희(76) 작가에 대해, “박근혜 정부 때 문학계 ‘블랙리스트’ 실행에 앞장 선 혐의”가 있는 오 작가가 나라를 대표하는 도서전의 ‘얼굴’을 맡는 것은 부적절하다는 반발이 나왔다.
문화연대, 민변 문화예술스포츠위원회, 블랙리스트이후(준), 한국작가회의 등 여러 단체들은 13일 발표한 성명과 14일 오전 서울국제도서전이 개막한 서울 삼성동 코엑스에서 연 기자회견을 통해, “오정희 소설가는 박근혜 정부 시절 자행된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국가범죄’의 실행자”이며 “이러한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문화체육관광부(문체부)와 대한출판문화협회(출협)가 대한민국 문학과 도서출판을 대표하는 국제행사의 홍보대사로, 대한민국 법원과 정부는 물론 자신들 스스로 공언했던 국가범죄의 실행자를 선택했다는 사실에 분노한다”고 밝혔다. 이들은 이번 도서전에서 “오정희 사태에 대한 다양한 문제제기와 사회적 토론이 진행되기를 참여 작가와 출판사 그리고 관객들에게 요청”하는 한편, 문체부와 출협에는 “공개 사과와 재발 방지 대책을 마련”하라고 요구했다.
박근혜 정부 블랙리스트 사건은 정권 윗선의 지시로 특정 문화예술인들에 대해 명단을 만들고 이들을 실제로 지원사업 등에서 광범위하게 검열하고 배제했던 사건이다. 정권이 바뀐 뒤 가동된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진상조사 및 제도개선위원회’의 조사 결과 가운데 ‘2015 아르코문학창작기금 사업’ 대목을 보면, 당시 문인들을 지원하는 이 사업에서 블랙리스트 인사들을 배제하기 위해 정권 차원의 집요한 개입이 있었고, 결국 심의를 책임지는 한국문화예술위원회(예술위)가 일부 선정자를 배제하기 위해 90여명 규모의 지원대상을 아예 70여명으로 축소하는 결정을 내렸다는 사실 등이 확인된다. 당시 예술위 위원으로서 위원장 직무대행을 맡기도 했던 오정희 작가는 사무처로부터 블랙리스트 실행 지시 사실을 보고 받는 등 “적어도 블랙리스트에 대하여 인지하였다는 사실”이 인정됐다. 다만 본인의 전면 부인에 따라 “적극적인 가담이 있었는지 여부에 대하여는 확인하지 못했다”는 결론이 있었다.
올해 서울국제도서전 홍보대사로 위촉된 오정희 소설가. 서울국제도서전 누리집 갈무리
오정희 작가는 1968년 등단해 이상문학상을 비롯한 여러 문학상을 받는 등 한국 문단을 대표해온 여성 작가로 꼽힌다. 올해 서울국제도서전은 홍보대사 6명 전부를 전 세대를 아우르는 여성 문인들로 위촉했는데, 오 작가는 가장 원로로서 김인숙·편혜영·김애란·최은영·천선란 등과 함께 위촉됐다.
서울국제도서전을 주관하는 출협은 그동안 블랙리스트 사건 진상 규명 및 책임자 처벌 등에 목소리를 높여왔기에, 블랙리스트 사건과 관련한 오 작가의 이력을 모른 채 그를 홍보대사로 위촉했다고 보기 어렵다. 오 작가는 이미 같은 문제로 2018년 한국문학관 설립추진위원에서 자진 사퇴한 바 있다.
출협 내부에서 오 작가를 홍보대사로 위촉하는 데 문제가 있다는 지적도 나왔었다. 지난 5월부터 출협 정책팀장으로 일하다 이 문제로 최근 사직서를 제출한 홍태림 미술비평가는 <한겨레>와 한 통화에서 “출협 이사진은 문제를 인지하고 있음에도 결국 오 작가에게 홍보대사를 맡기는 것이 더 득이라고 판단한 것”이라 말했다. 송경동 시인은 “지난달 말 출협 이사진과의 비공개 간담회에서 오 작가를 해촉해줄 것을 요구했고, 출협 쪽은 내부 논의를 통해 노력해보겠다고 했다. 그러나 12일부터 언론에서 오 작가가 홍보대사로 그대로 소개된 것을 보고 긴급 기자회견을 열게 된 것”이라 밝혔다.
14일 개막한 ‘2023서울국제도서전’ 현장 모습. 양선아 기자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진상조사 및 제도개선위원회 민간위원으로 참여했고 최근 관련 논문까지 쓴 김미도 서울과학기술대 교수(문예창작학)는 “2015년 아르코문학창작기금 심의에서 특정 작가를 배제하는 데 있어 오정희 당시 문학분야 소위원장이 계속 심사위원들을 ‘설득 중’이라는 취지의 발언을 하거나, 심사위원들이 끝까지 반대하자 예술위가 직접 배제 결정을 내렸을 때 오정희 소위원장도 관여했다는 게 명백히 증거로 밝혀진 상태”라며 “대중이 흠모하는 작가에 대한 예우로 조용히 해촉 건의를 한 이들이 있는데 출협이 받아들이지 않아 사태가 커졌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오 작가는) 그때도 지금도 사과 한 마디 없다”며 “당시 사과만 있었더라도 지금 또 상황은 달라졌을 것”이라고 말했다.
송 시인 등 이날 기자회견에 참여한 10여명은 오전 11시께 도서전 개막식 행사장으로 진입하려 시도하다 대통령실 경호처 경호원들과 충돌을 빚기도 했다. 김건희 여사가 개막식에 참석해 축사를 하기로 돼 있어 보안이 삼엄했던 것이다. 이번 도서전에서 오 작가는 오는 18일 오후에 열리는 북토크에 참석하기로 계획되어 있으나, 참석하지 않을 전망이다.
출협은 이날 오후 “(사전에 있던 해촉 요구 등을 두고) 의견상 약간의 스펙트럼이 있어 오 작가 참여 행사 취소 등을 조처했었다”며 “(출판문화협회가) 좀더 폭넓은 공감대와 합의가 이뤄지도록 노력했어야 했다”는 취지의 입장을 냈다. 또 “문화체육관광부는 홍보대사 선정과정에 간여한 바 없다”며 “오 작가의 선정과정, 선정 자체에 문제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대한출판문화협회가 책임지고 성찰하고 사과하고 개선할 일이지 문화체육관광부에 책임을 물을 일은 아니”라고도 밝혔다.
최원형 기자
circle@hani.co.kr 양선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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