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2016), 〈벌새〉(2019)에 이어 10대 소녀의 마음을 비범하게 그려낸 이야기가 12일 개봉했다. 앞의 두 작품처럼 베를린국제영화제 ‘제너레이션’ 부문에 초청받은 이지은 감독의 〈비밀의 언덕〉이다. ‘제너레이션’ 부문은 다음 세대의 젊은 캐릭터들을 내세운 작품들을 대상으로 하는 베를린영화제만의 주요한 섹션이다.
10대 초반. 자신을 둘러싼 세상에 호의만큼이나 적의도 존재한다는 걸 깨닫기 시작하는 이 나이의 여성 서사는 영화가 잘 다뤄지 않아온 소재 중 하나다. 그만큼 기성세대가 이 나이 또래 소녀들을 보는 시선이나 기대하는 바가 납작한 탓이다. 〈우리들〉과 〈벌새〉는 친구와 가족이라는 관계 안에서 무심함을 가장한 폭력성을 드러내며 이것과 싸우는 소녀들의 자아와 용기에 대해 섬세하게 짚은 바 있다.
1996년을 배경으로 하는 〈비밀의 언덕〉의 주인공은 초등학교 5학년 명은(문승아)이다. 명은은 반장이 되기 위해 애를 쓰고 전학 온 친구가 글짓기 대회에서 자신보다 높은 상을 받자 자존심이 상한다. 인정받기 원하고 언제나 아이들의 중심이 되고 싶어하는 명은은 가정환경조사서를 쓰는 게 괴롭다. 시장에서 젓갈 장사를 하며 너무 억척스러운 엄마와 너무 게으른 아빠가 부끄러운 탓이다.
명은은 선(우리들)이나 은희(벌새)보다 자신의 욕망에 훨씬 더 솔직하고 적극적인 캐릭터다. 어차피 반장은 모범생 남학생이 할 테니 부반장에 나가볼까 말하는 친구들 사이에서 명은은 반장이 되기 위해 주도면밀한 전략을 짠다. 고상하지도 멋지지도 않은 부모를 숨기기 위해 고달픈 연극도 마다치 않는다.
영화평론가 윤성은은 “영화에서 인정욕구나 지배욕은 남성의 것으로 주로 표현되고 여성 캐릭터는 정서적 이해나 공감 등에 초점이 맞춰지곤 했는데 명은은 사회적인 인정욕구가 강화된 캐릭터다. 그 욕망을 실현하거나 좌절하면서 자아를 정립해나간다는 점에서 뛰어난 여성 성장담”이라고 평가했다.
〈비밀의 언덕〉은 이 감독의 장편 데뷔작이다. 대학에서 연극 연출을, 대학원에서 영상을 전공한 이 감독은 영화를 만들기 전 초등학교 연극 교사를 하면서 시나리오를 구체화해 나갔다. 그는 “1990년대에 초등학교를 다닌 나의 성장기가 반영되긴 했지만 그보다 적극적인 야망에 불타고 발칙하기도 하며 원하는 것을 위해 어디든 돌아다니는 10대 여성을 영화에서 보고 싶었다”면서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내가 지나온 시절에 왜곡되거나 변색되지 않는 시선으로 현재의 아이들을 지켜볼 수 있었던 경험이 명은 캐릭터를 만드는데 큰 도움이 됐다”고 말했다. 1990년대는 여자 반장보다는 여자 부반장이 익숙하던 시절이지만 명은이 자신이 원하는 바를 뚜렷하게 드러내고 이를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에서 지금의 10대 모습이 많이 투영된 것이다.
〈비밀의 언덕〉에서 글짓기는 명은을 성장시키는 중요한 모티브다. 어른들의 입맛에 맞는 글을 쓰며 장려상, 우수상을 받던 명은은 노골적으로 자신의 불행을 담은 친구의 글이 대상을 받는 걸 보고 거짓말로 메꿔왔던 주변과 관계들을 응시하기 시작한다. 여기서 솔직함이 진실이라거나 용기라는 단순한 결론에 이르지 않는 것이 〈비밀의 언덕〉의 가장 큰 장점이다. 영화평론가 조혜영은 “명은은 약하고 부드러운 존재가 아닌 경쟁하고 상처를 주거나 받으면서 세상이 뜻대로 되지 않고 때로는 스스로를 기만할 수도 있다는 자각에 이르는 캐릭터라는 점에서 ‘걸스 비 엠비셔스’의 다양한 측면을 담은 캐릭터”라면서 “최근 10대 초반의 청소년을 대상으로 하는 영화들이 거의 만들어지지 않고 있는 상황에서 실력 있는 여성 감독들이 자신이 겪어온 10대 시절을 바탕으로 다양한 10대 여성의 관점을 작품으로 만들어내는 것은 고무적인 일”이라고 말했다.
김은형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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