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전시에는 클라인의 도시시리즈 작품집 〈도쿄〉(1964)의 수록작품 일부의 프린트들도 확대돼 내걸렸다. 1960년대 초 도쿄 거리와 현지 일본인들의 일상과 표정이 생생한 톤으로 담겼다. 노형석 기자
웅성거린다. 아우성친다. 흐물거린다.
전시장의 크고 작은 사람들 사진들은 세월을 압도하는 생생함으로 펄떡거린다. 헉헉거리듯 도로 위로 퍼지는 남녀노소의 숨결이 사진에 담겼다. 관객들은 아이가 렌즈로 장난감 총을 겨눈 장면이나 기계적으로 쓰인 글자 명판들의 기세에 압박당하며, 사제처럼 엄숙하고 먹먹한 표정으로 거리를 걷는 행인들의 뒤를 따라가기도 한다. 도시인들뿐 아니다. 우아하지만 도발적인 포즈를 한 모델들에게 눈을 홀리는 경험도 이어진다. 1960년대의 서구 거리 곳곳에 뛰어들거나 극장 앞에 출몰해 얼굴 없는 남자들과 어울리는 초현실적인 풍경이 시선을 앗아가는 것이다.
지금 서울 삼청동 뮤지엄한미삼청에서 열리고 있는 세계적인 사진거장 윌리엄 클라인(1926~2022) 회고전은 50~60년 전 육팔혁명이 만개하던 유럽과 미국 뉴욕, 일본 도쿄 거리의 각박한 인간군상들의 호흡과 이야기들을 패션모델들의 거리 퍼포먼스 컷들과 함께 담아낸다. 아이가 장난감 총으로 작가의 렌즈를 겨눈 저 유명한 1950년대 〈뉴욕〉 사진집의 명작 원본도 반갑지만, 한국 관객의 눈에 더 선연하게 다가오는 건 사실 60년대 고도성장 시대 그가 일본 도쿄에서 살면서 포착한 도심 거리와 사람들의 얼굴이다. 일본말로 ‘겐세츠’라고 읽히는 ‘建設(건설)’이란 글자가 무미건조하게 차단선을 의미하는 사선을 배경으로 되풀이되는 도로 인도 옆의 가림막들을 찍은 사진들은 사람 키보다 큰 거대한 패널 덩어리가 되어 들머리에 붙여졌다. 지하층 층고 높은 홀 한쪽 벽엔 횡단 보도를 건너는 행인들, 그리고 어딘가를 직시하는 두개의 분리되어 붙여진 얼굴들이 번화가를 오가는 사람들과 가게의 간판 이미지와 함께 내리 걸렸다. 이런 일본의 50여년 전 이미지들이 한 사진 혁명가의 스냅에 통째로 잡혔다.
전시장 들머리에 있는 클라인의 도시시리즈 연작 〈도쿄〉의 촬영사진. 도시의 인도 옆에 세워진 건설공사장의 가림막 현판의 ‘建設(건설, 겐시츠)’이란 글자들이 유난히 강렬한 이미지로 육박하듯 다가오면서 당대 고도성장으로 진입하던 일본 사회의 현상을 드러내고 있다. 노형석 기자
클라인은 20세기 초반 미국을 중심으로 정립된 잘 찍힌 사진의 시점과 인화술 테크닉의 교범을 짓부수었다. 오직 도시적 순간과 도시인의 감정에 충실한 필름 미학을 등장시켰다. 역시 1958년 〈어메리컨스(미국인들)〉이란 사진집으로 미국인의 일상에 스며든 권태와 위선의 실상을 냉철하게 포착했던 또 다른 거장 로버트 프랭크와 쌍벽을 이루는 현대 사진의 대부가 되었다. 거칠고 불안한 스냅 사진이 바로 연상되는 그의 작품들엔 천변만화하는 격정적인 도시의 실상이 그대로 담겨있는데, 거의 동시에 등장한 프랭크의 작업과 더불어 그의 뉴욕 도시 사진들은 이상향으로만 치부됐던 미국의 대도시를 전혀 다른 디스토피아의 각도에서 보게 만들었다.
이 전시는 50년대 말 내놓은 〈뉴욕〉을 필두로한 도시 사진시리즈로 세계 현대사진사에 큰 파문을 낳은 혁명적 사진가의 작업 여정을 초기부터 말기까지 두루 훑어 보여준다. 경력에 핵심이 되는 1950년대 초반부터 1990년대까지의 회화, 디자인, 사진, 패션, 영화, 책 등 작품 130여 점과 자료 40여 점을 망라해 8개 섹션에 맞춰 소개해 전방위 예술가의 면모를 부각시키려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프랑스에서 유학해 대가 페르낭 레제를 사사하면서 경력을 시작하는 1940년대 말~1950년대 초기 추상주의 회화와 움직이는 키네틱 회화, 그래픽 디자인의 영역을 교차시킨 포토그램 등을 소개하는 1섹션 ‘황홀한 추상’, 네덜란드 등의 야외에서 카메라로 촬영하면서 몬드리안 색면 회화를 오마주한 첫 사진작업인 2섹션 ‘흑백의 몬드리안’은 감성과 순간성에 몰입하는 현대사진의 기치를 들어 올린 3섹션 〈뉴욕〉 사진집 특집과 로마, 도쿄의 사진 작업을 보여주는 4섹션 ‘도시의 사진집’, 60년대 문자와 추상을 결합한 5섹션 ‘레트리즘 회화’와 조응된다. 뒤이어 1955~1966년 〈보그〉지와의 협업 성과물을 중심으로 한 ‘패션’ 사진들, 1990년대 밀착 프린트 위에 색을 칠한 7섹션 ‘페인티드 콘택트’, 장년기 탐닉한 다큐 영화와 장편 극영화를 살펴보는 8섹션 ‘영화’까지 클라인의 전 생애에 걸친 작업들을 일별할 수 있다.
전시장 말미에 볼 수 있는 7섹션 ‘페인티트 콘택트’. 1954년 촬영해 사진집 〈뉴욕〉(1956)의 대표작이 된 장난감 총을 겨눈 아이들을 담은 필름이 보인다. 이 필름프린트를 밀착인화해 그 위에 페인트 안료를 칠한 사진+회화+영화 시퀀스 작업을 작가는 1980년대 후반~1990년대 초 벌였는데 그 성과물들중 일부를 볼 수 있다. 노형석 기자
클라인 재단과 7년 동안의 협의를 통해 마련된 이 첫 대규모 한국 특별전은 작가가 지난해 96살을 일기로 삶을 접었기에 초반기부터 말년기까지의 작업 인생을 두루 풀어 설명해야한다는 재단 쪽의 강한 입장을 반영해 이뤄졌다.그러나 200평도 안되는 협소한 전시장에 클라인의 전 생애 작업들을 압축하듯 빽빽하게 채워 넣으니 작가의 강력한 현장 미학을 접하기 어렵다. 저 유명한 〈뉴욕〉의 스냅 컷들이나 초창기 추상적 포토그램, 60년대 초현실적인 파리 오페라극장 앞의 얼굴 없는 군상들과 함께 한 모델 컷 등은 기억에 선연하게 남지 않는다. 좁은 공간과 정교한 큐레이팅을 거부하는 빽빽한 진열 방식은 초월적이고 도발적인 사진 언어를 짚어내기엔 역부족으로 보인다. 일방적으로 관객에게 이미지를 전달할 뿐이고 관객이 들여다보면서 클라인의 감성을 느껴보는 것은 난감한 전시가 되고 말았다. 9월17일까지.
글 ·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전시회의 1섹션 ‘황홀한 추상’ 에 나온 작가의 초창기 추상작업과 움직이는 조형물(키네틱) 작업들. 노형석 기자
뮤지엄 삼청 지하층 중앙부의 층고 높은 홀 공간에 설치된 4섹션 ‘도시의 사진집’의 일부 모습. 68혁명 당시 유럽 도심 시위 현장의 생동하는 군중과 60년대 초반 일본 도쿄의 거리 행인 등의 모습이 수십여컷의 확대 사진들로 벽에 다닥다닥 붙었다. 지난 5월23일 언론설명회가 열린 직후 찍은 것이다. 노형석 기자
6부 ‘패션’ 섹션에 나온 클라인의 패션 사진들중 일부. 클라인은 폐쇄된 스튜디오에서 격식이 지어진 옷을 입고 패션 촬영을 하던 관행을 깨부수고 모델들을 생동하는 도시의 거리로 진출시켜 끊임없이 무언가를 저지르고 행위를 벌이는 군상의 일부로 연출해냈다. 이런 그의 사회학적인 모드는 후대 패션 사진의 전범이 되어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노형석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