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현대미술전 ‘…파르네시나 컬렉션’이 열리고 있는 아트선재센터 3층 전시장 일부. 정면에 20세기초 이탈리아 미래파의 거장 보초니의 조각 <공간에서 연속하는 단일한 형태>(1913)가 보인다. 왼쪽 벽면에는 세르조 롬바르도가 그린 추상회화 작품이 내걸렸고, 보초니 조각 오른쪽 뒤로는 아르투로 마르티니의 청동상 <죽은 연인>(1922)이 놓였다. 노형석 기자
움베르토 보초니, 피에로 만초니, 마리노 마리니, 야니스 쿠넬리스, 미켈란젤로 피스톨레토…
이름들만으로도 믿어지지 않는다. 20세기 현대미술사를 휘저은 이탈리아 대가들의 손길 묻은 명작이 이달 초 한꺼번에 서울 북촌으로 날아왔다. 게다가 명작들을 일일이 배치하면서 직접 전시판을 차린 이는 세계 최고의 큐레이터 거장으로 추앙받는 이탈리아 비평가 아킬레 보니토 올리바(84). 세계 최고 권위의 국제미술제인 베네치아 비엔날레의 1993년 본전시 총감독으로 독일관 대표작가였던 거장 백남준에게 황금사자상의 트로피를 안겼고, 그 2년 뒤 백남준과 손잡고 베네치아에 한국국가관을 개설하는데 기여한 거물이다.
한국에서 이렇게 맛깔난 이탈리아 미술 전시는 이제까지 없었다. 지난 15일 서울 북촌 아트선재센터 3층에서 개막한 이탈리아 현대미술 특별전은 최상급의 메뉴로 잘 버무려진 아트 뷔페상을 떠올리게 한다. 20세기 초 속도의 순간을 형상화한 저 유명한 보초니의 미래파 조각을 비롯해 ‘살아있는 조각(리빙 스컬프처)’의 선구로 꼽히는 만초니의 도약흔적을 남긴 발판상, 실존적 조각으로 일세를 풍미한 마리노 마리니의 말, 세계적인 인기작가인 피스톨레토의 자기 성찰적인 거울 앞 인물상, 쿠넬리스의 엄정한 선묘가 어린 동판화, 전세계 주요 도시의 기념물이 된 아르날도 포모도로의 태양원반상 등이 3층 전시장 곳곳에 꼭꼭 들어찼다.
전시장 들머리에서 처음 관객을 맞는 작품인 줄리오 파올리니의 <주피터와 안티오페>(2016~2021). 옛 그리스 로마 신화의 고전적 도상과 지금 현재의 허구적인 기호와 이미지들의 파편 사이의 관계를 형이상학적으로 성찰한 작품이다. 노형석 기자
‘위대한 이탈리아 비전:파르네시나 컬렉션’이란 공식 명칭이 붙은 이 전시는 뜻밖에도 이탈리아 외교협력부의 발의로 주한 이탈리아대사관과 주한 이탈리아문화원이 마련한 행사다. 이탈리아 수도 로마의 외교부 청사 파르네시나 빌딩안에 대여해 소장 전시해온 20~21세기 이탈리아 현대미술가들의 수작들을 일컫는 ‘파르네시나 컬렉션’의 일부인 70여점이 나왔다. 파르네시나 빌딩은 원래는 독재자 무솔리니가 파시즘을 상징하는 건축공간으로 구상했던 미니멀한 얼개의 건물로 50년대 완공해서 90년대 말 외교부 청사로 전용했다. 무미건조한 사무공간 대신 내부의 큰 홀과 공용 공간에 현대미술 작가들의 구작과 신작들을 빌려서 활력을 주고 이탈리아 문화를 외교관들에게 널리 알리는 의도로 이런 컬렉션을 만들었는데, 청사는 물론이고 세계 각지에서 순회 전시되면서 큰 반향을 일으켰다고 한다.
3층 전시장 안쪽 공간의 일부. 뒤틀린 구리 튜브를 써서 신화 속 사건들의 역동적인 이미지를 되살린 알프레도 피리의 조형물 <에우로페의 납치>(1957) 설치됐다. 뒤쪽 벽면에는 아르테포베라 운동의 주요 작가였던 야니스 쿠넬리스가 강렬한 선묘를 강조한 동판화(2004)가 내걸렸다. 노형석 기자
실제로 전시장을 보면, 출품작들도 명작일 뿐 아니라 올리바가 기획한 전시 자체의 큐레이팅도 수준급이어서 미술품을 활용한 문화외교의 진수를 실감할 수 있다. 르네상스, 바로크 유산들을 계승한 이탈리아 현대미술은 특정 경향이나 맥락으로 엮이지 않는다. 기획자 올리바가 지난 14일 개막 행사에서 “판에 박힌 사고방식을 벗어나 역사와 기억의 가치를 환기하고 다채로운 표현양식의 자유를 추구하면서 한결같이 평화로운 공존, 대화의 의미를 드러냈다”고 소개한 대로다.
작가들의 작품들은 자연과 문명, 일상과 형이상학, 질서와 카오스 등 대비적 요소들을 융화시키면서 다기한 표현양식을 펼쳐나가며 전개되는 것이 특징이다. 나무와 잡동사니 같은 ‘가난한 재료들’로 만든 피스톨레토나 야니스쿠넬리스, 엔초 쿠키의 아르테 포베라·트랜스 아방가르드 사조와 1950~1960년대 예술가의 똥 통조림으로 유명한 만초니의 반미술 운동은 그런 흐름들을 대표한다. 실제로 전시장 들머리에서 처음 관객을 맞는 작품인 줄리오 파올리니의 <주피터와 안티오페>(2016~2021)에서 단적으로 이런 이탈리아 현대미술의 저력을 느끼게 된다.
옛 그리스로마 신화의 고전적 도상과 지금 현재의 허구적인 기호와 이미지들의 파편 사이의 관계를 형이상학적으로 성찰한 이 작품은 이탈리아 특유의 전통과 기억을 작가들이 어떤 방식으로 현대에 계승하고 사유하는지를 보여준다. 바로 뒤에 놓인 작품이 바로 이탈리아 아르테포베라 운동의 주역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미켈란젤로 피스톨레토의 역작인 <에트루리아인>(1976).
피스톨레토는 고전적 조각상을 전시장 벽면의 거울 앞에 놓고 그 옆에서 관객들이 상과 함께 자신들의 모습을 비춰보게 하는 특유의 방식으로 관객들을 작품의 요소로 끌어들였다. 이런 도입부 작품들 외에도 안쪽 전시장까지 훑어보면 20세기 초 미래주의부터 21세기의 팝아트와 디지털아트까지 낯설고도 친숙한 이탈리아 현대미술의 역사와 전개과정을 살뜰하게 살펴보고 성찰할 수 있다. 국내에서 모처럼 만나는 밝고 밀도감 넘치는 현대미술사 기획전이다. 내달 20일까지.
글 ·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이탈리아 아르테포베라 운동의 주역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미켈란젤로 피스톨레토의 역작인 <에트루리아인>(1976). 지난 14일 전시 개막 행사에서 작품 앞의 거울에 전시를 기획한 거장 아킬레 보니토 올리바의 모습이 비치고 있다. 피스톨레토는 고전적 조각상을 전시장 벽면의 거울 앞에 놓고 그 옆에서 관객들이 상과 함께 자신들의 모습을 비춰보게 하는 특유의 방식으로 관객들을 작품의 요소로 끌어들였다. 노형석 기자
전시장 안쪽에 놓인 조각거장 마리노 마리니의 청동작품 <말>(1945). 노형석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