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수> 주연배우 김혜수. 호두앤유엔터테인먼트 제공
“너, 나 모르냐?”
1970년대의 과장되고 흥겨운 음악과 의상을 두른 범죄물처럼 보이던 <밀수>는 극 중반 춘자(김혜수)의 이 대사 하나로 믿음과 의리, 배신과 복수의 심장 쫄깃하고 가슴 찡한 드라마로 반전한다. 김혜수와 염정아, 조인성, 박정민, 고민시, 김종수 등 6명의 배우가 시계 톱니바퀴처럼 정교한 앙상블을 이루는 이 영화에서 김혜수의 카리스마가 성큼 앞으로 나오는 순간이기도 하다.
김혜수는 이 대사를 류승완 감독에게 제안했다. 19일 서울 소격동 카페에서 만난 김혜수는 “스포일러가 되면 안 되는데”라고 웃으며 이 대사가 나온 배경을 말했다. “춘자에게 진숙(염정아)은 친구나 동료 이상의 존재였을 거예요. 혈혈단신으로 떠돌면서 생존 본능만으로 살아온 춘자를 처음으로 따뜻하게 받아준 사람이었을 테니까요. 다른 사람이 다 손가락질해도 진숙이만은 자신을 믿어줄 거라는 춘자의 믿음이 흔들리는 순간이었죠.” 평소 애드리브를 잘 하지 않는 김혜수는 시나리오에 메모했던 춘자의 전사에 대해 감독과 이야기하면서 현장에서 이 대사를 완성했다.
류승완 감독의 신작 <밀수>는 그의 초기작에 담겨있던 거친 에너지와 최근작 <모가디슈>(2021)가 보여준 매끈한 완성도가 꽉 물려 돌아가는 영화다. 허투루 소비되는 장면이나 에피소드가 없고 류승완 감독의 특기였던 액션에서 ‘저게 말이 되네’싶은 기발함이 돋보인다.
해안 소도시 군천에서 물질을 하며 살아가는 춘자와 진숙 등 해녀들은 바닷가에 큰 공장이 들어서며 밥줄이 끊길 위기에 처한다. 당시 홍콩과 일본 등에서 뱃길을 통해 횡행하던 밀수 제안을 받고 춘자는 동료들을 설득해 바닷속에 떨어뜨린 밀수품을 건지면서 잠시 살림이 펴진다. 하지만 곧 현장이 발각되고 모두 감옥에 끌려가는데 유일하게 춘자만이 도망을 간다. 2년 뒤 춘자는 밀수판의 큰손 권상사(조인성)과 함께 돌아와 한탕을 꾸민다.
<밀수>는 70년대 일부 지역의 해녀들이 밀수에 동참했다는 당시의 기사 한줄로 시작된 기획이다. 푸른 바다에서 전복을 따는 해녀들의 손이 검은 범죄에 담가진다는 기묘한 충돌감은 김혜수가 말하듯 “세계에서 전무후무한 해녀 액션”으로 이어졌다. 극 후반 뒤통수 치는 배신과 반전이 숨 가쁘게 이어지다 해녀들이 물속에서 싸우는 액션은 할리우드식 화려함과 정반대에 있다. 대신 날 것 같은 생동감과 참신한 액션 연출로 쾌감을 이끌어낸다. 컴퓨터그래픽 같은 기술이 아닌 배우들의 역할이 큰 만큼 위험도 클 수밖에 없었다. “수중 액션은 쉽지 않고 위험하기도 해서 감독님이 모든 장면을 스리디(3D) 콘티로 만들어 보여줬어요. 처음엔 이게 가능해? 만화 아냐? 싶었죠.”
어린 시절 운동을 했던 김혜수에게 수영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지만 <도둑들>(2012) 수중 장면을 찍다가 온 공황 탓에 쉽지 않은 도전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괜찮아졌다 싶었는데 막상 촬영현장에 처음 가서 바닷물이 일렁이는 걸 보니까 안 좋은 느낌이 훅 오는 거예요. 저도 저지만 영화가 잘못되면 어쩌나 별생각이 다 들었죠.” 우려와 달리 동료들이 촬영하는 걸 보고 같이 고생하고 격려하는 와중에 두려움이 사라졌다고 한다. 김혜수는 인터뷰 내내 팀워크의 중요성과 <밀수>에서 느낀 팀워크의 즐거움에 대해 말했다.
“영화는 집단창작이기 때문에 원톱 영화도 앙상블 영화도 팀워크가 중요해요. 원톱 주인공을 빛나게 하는 것도 카메라 뒤의 감독과 스태프들이잖아요.”
새로운 작업을 시작할 때면 습관처럼 ‘이 일을 하는 나는 무엇인가’ 생각한다는 그는 <밀수>를 찍으며 “내 정체성은 더도 덜도 아닌 팀원이라는 것, 그게 명확해서 좋았다”고 했다. “일을 하면서 정체성을 잃지 않으려고 해요. 돈도, 사랑도, 행복도 다 주는 건 어디에도 없잖아요. 배우로 욕망도 있고 개인적으로 끌리는 것들이 따로 있을 수 있지만 나는 팀원일 뿐이라는 생각을 잊지 않으려고 해요.” 1986년 열여섯살에 데뷔한 뒤 30년 넘게 정상에 머물며 연기생활을 해온 데는 이런 ‘팀원’ 의식이 뼛속까지 새겨져 있을 터.
<밀수>는 26일 개봉하며 그 어느 때보다 치열한 여름 한국영화 4파전의 포문을 연다. <범죄와의 전쟁: 나쁜놈들 전성시대>(2012)에서 ‘풍문으로 들었소’를 리메이크하는 등 1970년대 한국음악에 각별한 애정을 보여온 가수 장기하의 영화음악감독 데뷔작이기도 하다.
김은형 선임기자
dmsgud@hani.co.kr
<밀수> 주연배우 김혜수. 호두앤유엔터테인먼트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