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토퍼 놀란 감독 최고의 작품”(‘무비 메이커’) “숨이 멎을 정도로 훌륭하다.”(‘버라이어티’)
지난달 20일 북미 개봉 뒤 끝없는 찬사를 받으며 ‘R등급(18세 이상 관람가)’ 개봉작 최고 오프닝, 역대 전쟁영화 최고 수익 등 갖가지 흥행기록까지 ‘도장깨기’ 하며 궁금증을 자아내던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오펜하이머’가 15일 개봉한다.
원자폭탄의 ‘아버지’로 불리지만 훗날 핵무기 개발 반대의 목소리를 높인 로버트 오펜하이머(1904~1967)의 삶을 그린 이 영화는 바다 건너 날아온 소문의 이유를 눈과 귀로 확인시켜주는 걸작이다. 오펜하이머가 주도한 원자폭탄 개발 과정과 실험 성공에 이르는 드라마는 영화의 절반도 차지하지 않는다. 영화는 전쟁이 끝나고 매카시즘 광풍이 불면서 오펜하이머의 간첩혐의를 찾기 위해 열린 1954년 미국 원자력위원회 보안 청문회와 복잡하고 모순되는 오펜하이머의 내면을 집중 조명한다. 액션과 볼거리 중심의 영화가 아님에도 3시간을 꽉 채우는 긴 러닝타임 내내 집중력을 흩트리지 않는다.
‘오펜하이머’는 철저한 고증을 통해 재현된 방대한 대사들과 수많은 실존 인물들이 ‘쏟아지듯’ 스크린을 채우는 영화라 아는 만큼 더 잘 보이는 영화이기도 하다. 원작이 된 전기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를 통해 실제 역사와 영화 속 구현을 함께 들여다본다.
‘인터스텔라’(2014), ‘테넷’(2020) 등에서 물리학에 대한 애정을 보여온 놀란 감독은 이번 영화에서 주인공 오펜하이머 외에도 그가 청년 시절 만난 과학자들, 그가 이끌었던 로스앨러모스 연구소의 수많은 물리학자들을 등장시킨다. 평생 그가 정신적 지도자로 삼아온 닐스 보어(케네스 브래너), 그의 경쟁자였던 하이젠베르크(마티아스 슈바이크 회퍼), 평생 친구 이지도어 아이작 라비(데이비드 크럼홀츠), 엔리코 페르미와 리처드 파인먼, 아인슈타인까지 핵폭탄 개발과정에 직간접적으로 관련된 과학자들을 디테일하게 보여준다.
무엇보다 과학자들이 사회적 책임을 치열하게 고민하고 발언하던 시대의 풍경을 보여주고자 하는 의도가 엿보인다.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 저자 카이 버드는 영화 개봉을 기념한 뉴욕 타임스 기고에서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과학자가 거짓 고발당하고 공개적으로 모욕당한 오펜하이머 사건은 이후 과학자들에게 공공의 지식인으로서 정치무대에 나서지 말라는 경고가 됐다”고 썼다. 라미 말렉이 연기한 이론물리학자 데이비드 힐은 영화 막바지에 오펜하이머에 대한 마녀사냥을 공개 무대에서 비판하는데 이는 역사적 사실은 아니다.
오펜하이머는 버클리대 시절부터 나치의 발흥과 스페인 전쟁, 미국에서 들불같이 일어난 노동운동에 관심을 보인다. 당시 그의 좌익 활동과 동생 프랭크를 비롯한 주변인들의 공산당원 활동은 나중에 오펜하이머를 매카시즘의 희생자로 몰아간다.
오펜하이머를 나락으로 떨어뜨리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하는 루이스 스트로스(로버트 다우니 주니어)는 원자력위원회에 오펜하이머를 끌어들였지만 정치적 성향이 맞지 않아 자주 부딪혔다. 때때로 오만했던 오펜하이머는 영화에도 등장하는 방사성 동위원소 수출을 논하는 공개회의에서 스트로스를 대놓고 망신줬는데 이때 스트로스는 개인적 복수심까지 생기면서 미 연방수사국(FBI)이 도청·미행을 하며 모은 오펜하이머 자료를 샅샅이 뒤져 오펜하이머를 청문회에 서게 한다.
오펜하이머가 반대했던 수소폭탄 개발에 몰두했던 동료 과학자 에드워드 텔러(베니 샤프디)는 청문회에서 오펜하이머에 결정적으로 불리한 증언을 하는데 증언을 마치고 떠나는 텔러와 악수하는 오펜하이머의 표정은 최고의 명장면 중 하나다. 또 영화 속 주요 인물 중 하나인 레슬리 글로브스(맷 데이먼)는 핵폭탄 개발계획인 ‘맨해튼 프로젝트’를 지휘한 군 간부로 특출한 능력의 야심가였지만 보안 청문회에서는 끝까지 오펜하이머를 옹호하는 인물로 남는다.
오펜하이머 일생에는 두 명의 중요한 여성이 등장하는데 결혼 전 연애했던 진 태틀록(플로렌스 퓨)과 아내 키티 오펜하이머(에밀리 블런트)다. 열정적이고 불안정한 성격의 공통점을 지닌 두 여성은 모두 공산당원 이력이 있어 오펜하이머에게 훗날 약점으로 작용했다. 보안 청문회에서 오펜하이머가 가장 굴욕을 느낀 순간은 키티와 결혼한 다음 진 태틀록을 만나 호텔에서 보낸 하룻밤이 까발려진 때였는데, 영화에서는 청문회장에서 벌거벗겨진 채 앉아있는 오펜하이머의 초라한 모습과 남들이 보는 앞에서 진과 벌이는 성행위로 연출됐다. 진 태틀록과의 불륜 에피소드로 ‘오펜하이머’는 R등급을 받았다.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는 자살로 생을 마감한 진 태틀록의 죽음에 타살 의혹도 제기하는데 영화에서는 아주 짧은 암시적 장면만 한 컷 등장한다.
‘오펜하이머’에서 주연배우 킬리언 머피와 에밀리 블런트에게 연기 지도를 하는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 유니버설픽처스 제공
영화의 하이라이트인 핵폭탄 실험 장면은 컴퓨터그래픽 없는 촬영이라는 소문으로 더 큰 기대감을 모았다. ‘테넷’에서 비행기 충돌 장면을 연출하기 위해 진짜 보잉747을 구입해 폭파한 놀란이지만 물론, 진짜 핵실험은 하지 않았다. “흰색의 빛이 노란색으로 그리고 매우 밝은 오렌지색 거대한 공으로 떠오르며 약간 소용돌이치더니 가장자리가 검게 변하는” 핵실험 당시의 목격담과 자료 화면을 참고해 제작진은 전원이 연결된 수족관을 만들고 휘발유와 프로판 마그네슘과 알루미늄 분말로 크고 작은 폭발을 만들어 원자폭탄과 같은 눈부신 밝기를 만들어냈다. 또 영화에는 핵실험뿐 아니라 양자물리학을 영상화한 추상적이고 아름다운 장면들이 등장하는데 이를 위해 구슬, 나무, 알루미늄 조각 등 다양한 물체를 특수개발된 광각렌즈로 여러 버전의 셔터 속도와 프레임 비율로 찍었다. 영화에서 오펜하이머의 시점 장면들은 칼라로, 냉혹한 현실을 보여주는 객관적 장면들은 흑백으로 처리됐는데 코닥사는 이를 위해 창립 이래 처음으로 아이맥스용 흑백 필름을 생산했다.
김은형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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