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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문화일반

박찬욱·봉준호 키즈, 영화판을 흔들다

등록 2023-09-11 08:00수정 2023-09-11 08:37

‘콘크리트 유토피아’ 엄태화 감독
박찬욱 감독 꼼꼼함과 편집능력 물려받아
정교하게 짜인 화면·현실비판 의식 돋보여

‘잠’ 유재선 감독
봉준호 감독 ‘옥자’ 연출부 막내로 일 배워
익숙한 소재 신선하게 요리…올해 칸 초청
‘콘크리트 유토피아’를 연출한 엄태화 감독. 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콘크리트 유토피아’를 연출한 엄태화 감독. 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다.

올해 여름 성수기에도 관객 수 회복에 실패한 한국영화 시장이지만 희망의 단초가 조금씩 보인다. 한국영화의 르네상스를 이끈 박찬욱·봉준호 감독에 이어 다음 세대를 책임질 ‘박찬욱·봉준호 키드’의 출현이다.

‘콘크리트 유토피아’의 엄태화 감독, ‘잠’의 유재선 감독이 그들이다. 27일 개봉하는 ‘천박사 퇴마연구소: 설경의 비밀’의 김성식 감독도 박찬욱의 ‘헤어질 결심’과 봉준호의 ‘기생충’ 조감독 출신이다. 이런 경력보다 중요한 건 이들이 최근 한국 상업영화들이 보여주지 못했던 도전 정신을 담은 작품들을 내놨다는 점이다. 할리우드 고전과 비(B)급영화, 유럽 예술영화를 섭렵하며 성장한 ‘시네필’ 세대인 박·봉 감독이 이전 세대와의 단절을 통해 새바람을 일으켰다면 ‘박·봉 키드’는 이들의 작품에 열광하며 성장해 영화적 비전을 창의적으로 계승하면서 영화판의 고인물을 흔들기 시작했다.

저예산 독립영화인 ‘잉투기’, 강동원이 주연했지만 흥행에 실패한 ‘가려진 시간’ 등 단 두 편의 장편 연출이력을 가진 엄태화 감독이 제작비 200억원이 넘는 ‘콘크리트 유토피아’를 내놓는다고 했을 때 많은 이들이 반신반의했다. 막상 뚜껑을 연 뒤에는 “한국 상업영화의 수준을 한단계 끌어올린 작품”(김도훈 영화평론가)” 등 올 여름 개봉작 4편 가운데 가장 많은 호평이 쏟아졌다. 지난달 9일 개봉 뒤 30일 동안 367만 관객을 동원하며 손익분기점(380만명)에 다가갔고 입소문과 함께 장기상영이 이어지고 있다. 내년 아카데미시상식 국제 장편영화상 부문 한국 영화 출품작으로도 선정됐다.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장르적인 완성도와 정교하게 짜여진 화면에 현실 비판적인 주제의식을 담았다는 점에서 박찬욱의 ‘공동경비구역 제이에스에이(JSA)’(2000)를 떠올리게 한다. 이 작품과 ‘살인의 추억’(2003) 등이 잇따라 성공하면서 2000년대 초반 ‘한국형 블록버스터’라는 단어가 만들어졌을 때 장르적 완성도 못지않게 한국의 현실을 담은 주제의식에 방점이 찍혔었다. 하지만 영화산업이 고도화되면서 주제의식보다는 보는 재미에 집중한 작품들이 늘어났고 한국형 블록버스터라는 말은 점차 사라졌다. 이는 한국영화가 좀 더 세계적이고 보편적인 기준에 도달했다는 점에선 의미가 있지만 동시에 현실에 대한 고민과 독창성에서는 벗어나는 쪽으로 변화하는 징후였던 셈이다. 최근 한국 대작영화들이 위기에 봉착하게 된 것은 이런 지점과 무관치 않다.

엄 감독은 박 감독의 ‘쓰리, 몬스터’(2004)와 ‘친절한 금자씨’(2005)의 연출부 출신이다. 엄 감독은 인터뷰에서 “현장에서 (박찬욱) 감독님의 모습을 보면서 연출자의 태도와 스태프들과 소통하는 방식을 배웠다. 나도 모르게 현장에서 콘티와 리허설을 꼼꼼히 챙기는 감독님의 스타일대로 찍고 있더라”고 말했다. ‘콘크리트 유토피아’를 제작한 변승민 클라이맥스스튜디오 대표는 “엄태화 감독은 배우들과의 소통에서는 자율성과 여백을 두는데 장면 구현에서는 화면에 잘 잡히지 않는 폐허의 잔해가 어떤 과정을 통해 이렇게 됐는지 히스토리까지 생각한다. 지나칠 정도로 꼼꼼하고 철저하게 사전 준비해 현장을 이끌어가는 스타일”이라고 했다. 또 “VFX(특수효과) 요소가 많아 후반 작업이 길어지고 비용이 늘어나는 부담이 있었지만 타협하지 않고 끝까지 (감독의 욕심대로) 밀고 나간 게 작품의 완성도에 중요하게 작용했다”고 덧붙였다. ‘가려진 시간’ 때부터 엄 감독에게 조언을 해준 박찬욱 감독은 “할 수 있는 한 끝까지 해서 내보내라”고 조언하곤 했다.

‘잠’을 연출한 유재선 감독. 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잠’을 연출한 유재선 감독. 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연출 스타일뿐 아니라 ‘콘크리트 유토피아’에서 최고의 장면으로 꼽히는, 배우 이병헌이 가요 ‘아파트’를 부르는 씬에도 박 감독의 영향이 배어있다. 노래하는 영탁(이병헌)의 얼굴을 클로즈업했다가 노래방 기기의 아파트 풍경을 지나 영탁의 과거로 이어지는 숏의 연결은 박 감독의 편집 능력을 엄 감독이 고스란히 물려받았음을 보여주는 사례로 꼽힌다.

6일 개봉한 ‘잠’은 봉준호 감독의 ‘옥자’ 연출부 막내였던 유재선 감독의 장편 데뷔작이다. 올해 칸국제영화제 신인들의 무대인 ‘주목할만한 시선’에 초청받아 국외에서 먼저 주목받았다. 개봉일 `오펜하이머'를 꺾고 흥행 1위에 올라 나흘동안 40만 명의 관객을 동원했다. ‘잠’은 공포영화 같지 않은 공포영화다. 층간소음, 오컬트 같은 익숙한 소재나 장르들이 등장하는데 어디서도 보지 못했던 방식으로 전개된다. 송경원 평론가는 “많이 본 이야기와 장면들이 등장하는데 감독이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와 방향성을 힘 있게 밀어붙이면서 새로운 지점에 도달한 작품”이라며 “유 감독은 신인답지 않게 영화의 사이즈에 대한 감각이나 기획 마인드도 느껴지는데 이런 장점을 봉 감독에게 이어받은 ‘봉준호 키드’”라고 말했다.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 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 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유 감독이 유튜브 채널 ‘넌 감독이었어’에 출연해 공개한 ‘잠’의 스토리보드를 보면, 스토리보드를 단행본으로 낼 정도로 꼼꼼한 봉 감독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유 감독은 “‘옥자’ 현장에서 봉 감독이 콘티에 세운 계획을 그대로 촬영 현장에 옮기는 걸 보면서 영화 연출은 당연히 저렇게 하는 것이라고 내면화했다”고 말했다. 봉 감독은 유 감독에게 ‘잠’으로 데뷔하라고 강력하게 추천했고 이선균·정유미 등 주연 캐스팅에도 직접적인 도움을 줬다고 한다. ‘옥자’와 ‘잠’을 모두 만든 제작사 루이스픽쳐스의 김태완 대표 역시 “유 감독이 들고 온 시나리오가 이미 충격적으로 잘 쓰여져 있어서 고민의 여지가 없었다. 시나리오를 공유하며 보안을 철저하게 당부했을 정도였다”고 말했다. 감독이 완성도 있는 시나리오를 들고 와서 동시대 영화 관습에서 벗어난 작품을 완성했다는 점에서 ‘잠’은 봉 감독의 데뷔작인 ‘플란다스의 개’(2000)를 연상시킨다.

김태완 대표는 “코로나 이후 영화 산업이 어려워졌지만 이른바 흥행의 규칙이라고 생각됐던 관습들이 뒤로 물러서고 이야기 자체의 힘, 원칙이 더 중요해지는 시대가 돌아왔다고 생각한다. 관객이 공감할 수 있는 고민을 담고 이들을 매료시킬 수 있는 이야기에 대한 치열한 고민이 필요하고 이런 원칙에 입각한 작품들이 한국영화를 새롭게 이끌어 갈 것”이라고 내다봤다.

김은형 선임기자 dmsgud@hani.co.kr

영화 ‘잠’. 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영화 ‘잠’. 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영화 ‘천박사 퇴마연구소: 설경의 비밀’. CJ ENM 제공
영화 ‘천박사 퇴마연구소: 설경의 비밀’. CJ ENM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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