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여정, 특별한 동행’ 전. 노형석 기자
보리밭을 팠더니 고대 신라인의 타임머신들이 무더기로 튀어나왔다.
일제강점기인 1926년 5월 초였다. 당시 경북 경주 읍내 신라 고분군 사이에 자리한 황남리 40번지 보리밭에서 흙을 파내는 채굴작업을 시작한 일본인 토건업자들은 돌발상황이 생겼다고 조선총독부에 급히 보고했다. 파자마자 땅속에서 신라인의 돌무지무덤들과 희한하게 생긴 흙인형들, 인형들이 붙어있는 토기 뚜껑들이 출현한 것이다.
경주박물관 분관 준비를 하러 왔다가 연락을 받고 후속 조사를 벌인 조선총독부 고적조사과 연구원들은 경악했다. 채굴 작업장의 갱벽에 숱한 무덤 자리가 있었고 신라 장인들이 만든 1600여년 전의 흙인형과 흙동물상 수백여점이 쏟아져나왔다. 흙덩이로 대충 만든 듯한 인형과 동물상들은 크기 10㎝도 안 되는 손가락만 크기에 불과했지만 놀라운 형상을 띠고 있었다. 인형들은 노동과 사냥, 춤, 악기연주, 심지어 성행위하는 모습까지 고스란히 담고 있었다. 동물상들도 다채로웠다. 소, 말, 개 등의 가축은 물론 뱀과 개구리, 가마우지, 비둘기, 사슴, 호랑이, 멧돼지, 표범, 물고기, 게, 불가사리, 해삼 같은 땅과 하늘, 바다의 주요 동물들이 형상화됐고, 용 같은 상상의 동물들까지 빚어놓았다.
신라 생활사 문화사 연구의 보고로 꼽히는 신라 토우의 발견은 순전히 경주 고적을 파괴한 철도 건설에 따른 것이었다. 1921년 경주 금관총에서 최초의 신라금관이 출토된 뒤 경주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자 일본 당국은 관광철도를 염두에 두고 경주와 경부선의 거점 대구를 잇는 경동선을 부설하기로 했다. 경주역 옆에 증기기관차 저장고를 짓기로 하고 지반을 닦는데 필요한 흙을 98호분인 황남대총과 90호분 사이에 있는 밭에서 캐기 시작했는데, 그 과정에서 신라사의 비밀을 간직한 수많은 신라무덤과 토우들이 발견된 것이었다.
흥미로운 건 그 뒤에도 이렇게 무더기로 수백여점의 토우들이 나온 다른 유적이 거의 전무했다는 점. 2000년대 인근 쪽샘 유적의 비(B)-6호분에서 토기에 부착된 54개체의 토우들이 출토된 것이 유일하다. 흙을 캔 땅이 일제가 악명높은 토지조사사업으로 무수한 땅을 강탈한 동양척식회사의 소유지란 점도 아이러니했다.
유적과 토우 발굴로 채굴작업이 중단되자 일제는 부근 노동리에 있는 봉분이 거의 사라진 폐고분터에서 다시 흙을 채굴했다. 이 고분이 바로 스웨덴 황태자의 금관 발굴로 유명한 서봉총이다. 하지만 토우가 나온 수십여기의 무덤들은 그 뒤 모두 사라졌고, 현장을 조사한 일본인들은 1926년 기록된 단 3건의 상황보고와 1건의 복명서 외엔 보고서를 남기지 않아 지금도 우리는 황남동 토우유적의 실체를 모른다.
지난 5월부터 서울 용산국립중앙박물관 상설관에서 열고 있는 특별전 ‘영원한 여정, 특별한 동행’의 핵심 주인공 신라 토우들은 이처럼 파란만장한 내력을 간직한 타임머신 유물들이다.
고대 신라, 가야의 장송의례에 쓰인 상형토기와 토우장식 토기 등 300여점의 유물을 공개한 이 전시는 고대 한반도 사람들의 생활상과 내세관을 담고 있다. 특히 일제강점기에 수습되어 보관하다 최근 재정리 사업을 통해 일일이 떨어진 파편들을 붙여 복원한 경주 황남동 출토 사람, 동물 모양 토기장식 토우 97점의 생생한 모습이 강렬한 감동을 안겨준다.
‘영원한 여정, 특별한 동행’전에 전시 중인 신라 토기. 노형석 기자
진열장 안에는 1600년전 고대인의 적나라한 일상과 장송 의례를 담은 신라인 극장이 토기뚜껑 무대 위에서 펼쳐진다. 무덤 부장품인 토기 장식으로 붙은 토우들은 망자들이 산 자들과 함께 했던 생전의 일상을 담고 있는데, 안쪽 전시장에서 ‘공동의례로 연결된 사람들’이란 제목의 진열장을 보면 지금 사회 통념을 거스르는 듯한 일탈적이기까지 한 생활상을 보고 충격을 받을지 모른다.
토기뚜껑 무대 위에서는 남근석을 향해 절하고, 남녀가 교합하는 장면 자체를 보고 절하고, 각기 알몸으로 성기를 드러낸 채 널브러진 남녀의 모습 등이 등장한다. ‘함께 한 순간’들이란 표제의 진열장에는 사냥꾼과 개, 표범이 대치하는 장면이 보이는데 포획 즈음의 긴장감 어린 분위기가 물컹하게 와 닿는다. 사람과 개 사이에 정겨운 대화를 하는 듯한 장면도 보인다. 뒷춤에 화살통을 놓고 활시위를 당기는 사람과 사슴, 멧돼지의 모습도 보인다.
대미는 경주 미추왕릉 지구 계림로 30호 무덤 등에서 나온 토우장식항아리 완형품. 토기 목에 붙은 토우들은 모두 세 개의 이야기 장면을 파노라마처럼 구성한다. 개구리 뒷다리를 문 뱀의 도상이 되풀이되며 남자와 새, 남녀의 성적인 교합장면, 현악기를 연주하는 여자와 새, 거북이 등으로 달라진다. 재생과 탄생, 생명을 의미하는 토우 도상들은 죽음과 부활의 의미를 풀어낸다.
‘함께 한 순간’이란 제목으로 노동하는 사람들을 담은 진열장에는 기대어 쉬는 사람, 머리에 짐을 이고 가는 사람, 짐 나르는 사람, 봇짐을 멘 사람, 괭이를 든 사람, 지게를 진 사람, 멧돼지를 싣고가는 말과 짐을 싣고 가는 말, 디딜방아 등이 등장한다. 짐을 내려 놓고 잠시 쉬고 있는 여인네의 퀭한 표정, 먹먹한 표정으로 토기 덮개 뚜껑의 꼭지를 잡고 있는 사내의 고뇌에 찬 표정 등에서 사물과 인간의 직관적 묘사에 대단한 내공을 지녔던 신라 장인들의 역량을 실감하게 된다.
손가락 크기도 안되는 흙덩이로 표현한 조형의 힘은 지대하다. 자연과 세계를 공존 공생의 마음으로 품어 안으며 자신의 삶을 끊임없이 변주했던 신라인들의 마음에 대한 느꺼운 감정이 일어나는 전시다. 무덤 부장품의 맥락에서 신라 가야의 여러 상형토기들도 포함해 1부에 전시했지만, 유물의 시기, 도상적 의미 등에서의 차이점을 고려하면 따로 전시하는 편이 나았을 것이란 평가도 나온다. 추석 연휴를 맞이해 28일부터 전시 마지막 날인 10월9일까지 입장료가 무료다.
글 ·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영원한 여정, 특별한 동행’전에 전시 중인 신라 토기. 노형석 기자
‘영원한 여정, 특별한 동행’전에 전시 중인 신라 토기. 노형석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