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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상식 취소당한 팔 작가 쉬블리…“때로는 침묵이 더 강해”

등록 2023-10-24 10:12수정 2023-10-24 18:49

익천문화재단 길동무 주최 문학대담 참가
“문학은 현실의 보완이자 대안…불가능을 변화시키는 역할”
팔레스타인 작가 아다니아 쉬블리가 23일 오후 서울 서초구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대회의실에서 익천문화재단 길동무 주최로 열린 문학 대담에 참가해 발언하고 있다.
팔레스타인 작가 아다니아 쉬블리가 23일 오후 서울 서초구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대회의실에서 익천문화재단 길동무 주최로 열린 문학 대담에 참가해 발언하고 있다.

“말은 성스러운 것입니다. 말로 한 약속을 지키는 것은 중요하죠. 제가 이 대담에 온 것도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나 때로는 침묵이 더 강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저는 여러분에게 용서를 구하고자 합니다. 여러분은 아마도 저에게서 듣고 싶은 이야기가 있겠지만, 말하기가 어려울 때에는 침묵이 훨씬 더 커다란 것을 내포하고 전달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문학에서도 침묵은 중요한 방식이 될 수 있습니다.”

‘침묵’에서 ‘용서’로 건너가는 사이에 발화자는 감정을 추스르느라 머뭇거렸고 목소리는 크게 흔들렸다. 그 순간 그의 머리와 가슴속으로 수많은 장면과 심정이 회오리쳐 지나가는 듯했다. 팔레스타인 작가 아다니아 쉬블리에게는 개인적으로나 민족 차원에서나 힘들고 고통스러운 날들이 이어지는 중이었다. 그의 조국에서는 하마스와 이스라엘 사이에 무분별한 전쟁과 학살이 벌어지고 있고, 며칠 전 프랑크푸르트도서전에서 진행됐어야 할 그의 문학상 시상식은 그 여파로 취소되었다. 23일 오후 익천문화재단 길동무 주최로 열린 그의 문학 대담은 그만큼 어렵고 귀한 자리였다.

지난 7월 한국어로 번역된 아다니아 쉬블리의 소설 ‘사소한 일’(전승희 옮김, 강)은 1949년에 벌어진 이스라엘 군인들의 팔레스타인 소녀 집단 강간과 살해를 소재로 삼았다. 이 작품의 영어판은 전미도서상 번역 부문 최종 후보와 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 후보에 올랐고, 독일어판은 올해 프랑크푸르트 리트프롬 협회가 주관하는 리베라투어프라이스(자유상) 수상작으로 선정되었다. 시상식은 프랑크푸르트도서전 기간 중인 지난 20일 열릴 예정이었으나 하마스와 이스라엘 사이의 전쟁을 이유로 주최쪽은 시상식을 일방적으로 취소했다. 일부에서는 이 작품의 반유대주의를 문제삼기도 했다. 유럽과 미국 등 전 세계 작가들과 출판인 수백명이 시상식 취소에 항의하는 공개서한에 연대 서명하며 작가를 응원했다. 서명 작가 중 한 사람인 베트남계 퓰리처상 수상 작가 비엣 타인 응우옌(‘동조자’ ‘헌신자’의 작가)은 지난 20일 미국 뉴욕에서 한 유대계 기관 주최로 한국계 소설가 이민진(‘파친코’의 작가)과 대담을 할 예정이었으나 주최쪽의 무기 연기(작가 자신은 ‘취소’로 이해한다) 통보를 받았으며, 다시 이 조처에 대한 항의의 목소리가 터져나오는 등 사태는 일파만파로 확산되고 있다.

쉬블리가 참가한 가운데 23일 서울 서초구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대회의실에서 열린 문학 대담에 눈과 귀가 쏠린 것은 이런 배경 때문이었다. ‘다른 세계를 상상하는 문학의 대지’라는 제목의 대담에는 쉬블리와 인도계 영국·독일 작가 프리야 바실, 한국 소설가 김남일과 오수연이 참가했다. 대담에 앞서서는 김선향 시인과 송경동 시인이 연대 시를 낭송했다.

23일 오후 서울 서초구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대회의실에서 익천문화재단 길동무 주최로 열린 문학 대담에서 팔레스타인 작가 아다니아 쉬블리(왼쪽에서 세번째)가 발언하고 있다. 왼쪽부터 인도계 영국·독일 작가 프리야 바실, 한국 소설가 김남일이고, 맨 오른쪽은 통역을 맡은 정슬기 중앙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다.
23일 오후 서울 서초구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대회의실에서 익천문화재단 길동무 주최로 열린 문학 대담에서 팔레스타인 작가 아다니아 쉬블리(왼쪽에서 세번째)가 발언하고 있다. 왼쪽부터 인도계 영국·독일 작가 프리야 바실, 한국 소설가 김남일이고, 맨 오른쪽은 통역을 맡은 정슬기 중앙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다.

쉬블리는 자신의 문학적 배경에 관한 소개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아랍어로 문학은 윤리와 같은 뜻입니다. 저는 그게 우연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어려서부터 환대의 한 방식이 문학이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문학은 즐거움이기도 하지만 현실의 대안이자 보완이기도 합니다. 저는 어려서부터 읽고 쓰기를 좋아했는데, 어머니는 문맹이었어요. 제 고향 팔레스타인에서는 밤에 전기가 끊기는 일이 많은데, 정전이 되면 그때부터는 엄마가 저희 형제들에게 이야기를 해 주는 시간이었습니다. 저는 톨스토이나 도스토옙스키 같은 훌륭한 작가들의 책을 많이 읽었지만, 어머니만큼 이야기를 잘 하는 사람은 없다고 생각해요.”

어머니는 어린 아다니아에게 말의 무게와 가치, 말로 한 약속의 중요성을 알려주었고, 힘든 상황에서도 한국 독자들과 한 약속을 지키도록 이끌었다. “나에게는 사는 것이 곧 (글을) 쓰는 것이고, 쓰는 일이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알려주는 것”이라고 쉬블리는 강조했다. 그는 “현실에서 경험하지 못하는 것을 문학에서는 상상할 수 있다”면서도 팔레스타인 현실과 관련한 문학의 역할을 묻는 질문에는 회의적인 태도를 보였다.

“문학이 어떤 역할을 맡아야 한다는 생각은 제게 어색하게 다가옵니다. 문학은 도구가 아니거든요. 만들어진 기대에 부응하지 않는 것, 그것이 제게는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기대란 압력이 될 수도 있으니까요. 제게 문학은 어딘가로 들어갈 수 있는 문 또는 입구로 여겨집니다. 그 문을 통해 들어간 문학 안에서는 환대의 공간이 펼쳐질 수 있어요.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지배는 언어에도 많은 영향을 미칩니다. 규제로 인한 언어의 부재를 만회하기 위한 일을 저는 문학으로 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문학의 역할은 불가능을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한편 이날 대담에서 프리야 바실은 난민 문제를 다룬 자신의 희곡 ‘구명조끼’ 일부를 낭독하고 난민 문제에 관한 생각을 밝혔다. 그는 “현재 유럽 국가들이 누리는 부는 과거의 식민 지배 덕분에 축적된 것인데, 식민 지배를 위해 세계 각지로 진출했던 유럽인들이 이제 와서 그곳 사람들이 유럽으로 오는 것을 가로막는 건 잘못”이라며 “나는 유럽에서도 영주권 제도를 시행해서 가령 1년에 10만명 정도의 이주민을 받아들일 것을 제안한 바 있다”고 말했다. 영국과 독일 이중 시민권을 지닌 그는 2010년에 설립된 작가와 예술가 정치 플랫폼 ‘평화를 위한 작가들’ 공동 창립자로 이민과 인권, 평화, 신식민주의 등에 관해 활발하게 목소리를 내고 있다.

글·사진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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