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 열린 2023 칸국제영화제의 수상자 가운데 가장 이례적인 인물은 각본상을 받은 ‘괴물’의 사카모토 유지(56)였다. 연출자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어느 가족’으로 황금종려상을 수상하는 등 칸의 단골손님이지만 수상자 사카모토 유지는 영화제와 거리가 있는 대중적인 드라마와 영화를 써온 각본가였다. 데뷔작 ‘환상의 빛’을 제외한 모든 작품을 직접 썼던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29일 국내 개봉을 앞두고 진행된 화상 인터뷰에서 “나는 절대로 쓸 수 없는 플롯이라서 이 영화의 연출에 꼭 도전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코미디와 스릴러 등 장르를 자유롭게 오가면서도 녹록지 않은 주제의식을 선보여온 사카모토 유지는 한국에도 탄탄한 지지층을 거느린 드라마 작가다. 지금은 넷플릭스와 왓챠 같은 오티티 플랫폼에 그의 주요 작품들이 공개돼 있지만 국내 정식 방영되기 전에도 일본 현지 공개에 맞춰 찾아보는 열성 팬들이 많았다. 그의 대표작 목록에 포함되는 ‘최고의 이혼’과 ‘마더’는 국내 방송사에서 리메이크되기도 했다.
사카모토 유지는 일본의 대표적 사회파 드라마 작가로 일컬어진다. 학대당하는 아이를 구출하기 위해 ‘유괴’라는 위험한 모험을 감행하는 여성을 그린 ‘마더’, 아동 살해 사건의 가해자 가족과 피해자 가족이 서로의 상처와 직면하는 ‘그래도, 살아간다’, 싱글맘의 고단한 삶을 미스터리 요소와 함께 엮은 ‘우먼’ 등이 대표적이다. 그가 이 작품들에서 보여준 문제의식은 고레에다 히로카즈가 엄마의 가출로 방치된 아이들의 비극을 그린 ‘아무도 모른다’, 도둑질을 하고 힘겹게 살면서도 학대받는 아이를 데려와 보살피는 가짜 가족을 그린 ‘어느 가족’ 등과 겹친다. 학교폭력이라는 표면 아래 드리워진 다층적인 폭력, 가해자와 피해자라는 이분법 뒤에 숨겨진 복잡한 진실을 다룬 ‘괴물’을 두 거장이 함께 완성할 수 있었던 배경이다.
하지만 사카모토는 사회파라는 이름표로 한정 지을 수 없는 작품 목록을 지닌 작가이기도 하다. 스물세살의 그를 ‘혜성같이 나타난 스타 작가’로 만들어준 1991년 데뷔작 ‘도쿄 러브 스토리’는 신드롬급 돌풍을 일으키며 일본뿐 아니라 한국 드라마 판까지 바꾼 작품으로 유명하다. 이듬해 한국에서 트렌디 드라마 시대를 연 최진실·최수종 주연의 ‘질투’는 표절 시비가 이는 등 이 작품의 직접적인 영향으로 탄생했다. 김봉석 평론가는 “‘도쿄 러브 스토리’는 화려한 도쿄를 배경으로 젊은이들의 사랑과 일을 그리지만 그 이면에는 버블 시대의 끝에 도달한 일본 사회가 담겨 있었다”며 “사카모토 유지의 모든 작품은 장르를 막론하고 당대의 사회 이슈나 변화를 예민하게 포착하고 그 안에 놓인 개인의 심리를 탁월하게 그려내 사회파나 트렌디 같은 단어 하나로 표현하는 건 부족하다”고 평가한다.
한국 팬들이 인생 드라마로 자주 언급하는 ‘최고의 이혼’이나 ‘콰르텟’ 같은 작품의 외양은 코미디에 가깝지만 각각 일본 대지진 이후 젊은 세대의 불안과 결혼에 대한 가치관의 변화, 직업 음악인이 되는 데 실패하고 가족에게 상처 입은 이들의 억눌린 마음을 섬세하게 그려내 호평받았다. 청춘스타 스다 마사키를 내세운 2021년 영화 ‘꽃다발 같은 사랑을 했다’는 전형적인 로맨스 영화 같은 제목과 달리 같은 소설과 영화에 열광하며 사랑에 빠졌던 남녀가 대학 졸업 뒤 사회에 적응하기 위해 안간힘 쓰면서 지치고 마모되어가는 사랑의 과정을 현실적으로 그린 씁쓸한 성장담이다.
이처럼 사카모토 유지의 작품들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열쇳말은 ‘현실’이다. 사카모토 유지는 결혼 뒤 일 때문에 바쁜 아내 대신 홀로 딸을 돌보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경험한 육아의 힘겨움을 계기로 ‘마더’를 집필했다고 밝힌 바 있다. 그는 일본 방송사와의 인터뷰에서 “컴퓨터에 앉아 있거나 술을 마실 때 아이디어가 나오지 않는다”며 “새벽에 일어나 딸의 도시락을 싸는 것 같은 일상의 시간에 마음을 뒤흔드는 이야기가 생겨난다”고 했다. 현실 밀착형이면서도 날카로움이 번뜩이는 것으로 유명한 대사를 써낼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박현주 작가는 “사카모토 유지는 누구나 느껴봤지만 언어로 표현하기는 힘들었던 복잡한 감정들을 대사를 통해 발견하게 해준다. 들을 때는 재치 있게 느껴지는 정도지만 돌아봤을 때는 그 의미가 드라마 구조와 탄탄하게 맞물리도록 쓰인 대사들”이라고 평했다.
29일 국내 개봉하는 ‘괴물’은 현실에 대한 문제의식을 퍼즐 맞추기 같은 미스터리 스릴러 방식으로 채워 넣은 영화다. 영화는 아들의 몸과 행동에서 폭력 피해로 의심되는 점을 발견한 엄마와 폭력의 가해자로 의심받는 교사, 비밀을 말할 수 없는 아이의 시선을 분리해 하나의 사건을 각각 3명의 시선으로 반복해 보여준다. 처음 엄마의 시선으로 전개될 때 폭력의 증거로 보이던 것들은 다른 두 사람의 시선을 거치면서 다른 진실을 보여준다. 3단계의 필터를 거치면서 영화는 장난처럼 반복되는 왕따, 학교 당국의 무능함, 드러나지 않는 가정 내 아동 학대, 공기처럼 떠도는 소수자 차별, 소셜미디어상에서 쉽게 왜곡되는 진실과 낙인찍기 등을 하나하나 벗겨낸다. ‘누가 진짜 괴물인가’라는 영화의 질문에는 그가 천착해온 가해자의 문제에 대한 도저한 성찰이 담겨 있다.
사카모토 유지는 올해 칸영화제 수상 인터뷰에서 “예전에 운전할 때 파란불이 켜졌는데도 앞차가 움직이지 않아 운전자가 다른 데를 보는 줄 알고 경적을 계속 울린 적이 있다. 그래도 움직이지 않던 트럭이 겨우 움직이기 시작했을 때 그 차 앞에 휠체어를 탄 사람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내가 피해자가 되는 건 민감하지만 나를 가해자라고 생각하기는 어렵다. ‘마더’, ‘그래도, 살아간다’ 등을 쓰면서 10년 동안 가해자라는 존재를 어떻게 그려야 할까, 가해자는 어떻게 하면 자신이 가해자라는 걸 알게 될까라는 게 내 주제였다”고 밝혔다. 고레에다 감독은 화상 간담회에서 “극 후반부로 가면 여기저기 돌리던 (가해자를 찾던) 화살이 결국 나에게로 돌아온다는 것을 느낄 것”이라며 “(영화에서) 굳이 괴물을 찾는다면 그건 바로 우리라고 말하고 싶었다”고 했다.
김은형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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