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력을 잃은 남자 주인공이 등장하는 멜로드라마 ‘사랑한다고 말해줘’. 이엔에이(ENA) 제공
남자는 자판기가 고장 났다는 얘기도 듣지 않는다. 인근에서 불이 나도 피하지 않는다. 아니 못 하는 거였다. 사고로 청력을 잃은 뒤 소리 없는 세상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27일 시작한 16부작 드라마 ‘사랑한다고 말해줘’(지니TV, ENA)의 남자 주인공 차진우 얘기다. 그는 청각장애인 화가로 배우 지망생 정모은을 만나 사랑한다고 ‘말’한다.
수어라는 또 다른 언어로 마음을 표현하는 차진우는 등장하자마자 관심받고 있지만, 그가 티브이(TV)에 나타나기까지는 무려 13년이 걸렸다. 차진우를 연기하는 배우 정우성은 이미 13년 전에 이 작품의 원작인 일본드라마(1995년 TBS ‘사랑한다고 말해줘’)의 판권을 구매했다. 정우성은 “원작을 처음 접한 뒤 장애를 가진 남자의 목소리가 내레이션으로 나오는 순간 심장을 두드리는 느낌을 받았다”고 했다. 그러나 더 많은 사람의 심장을 두드리는 데는 용기가 필요한 시절이었다. 남자 주인공은 주로 재벌 2세, 실장님이던 당시에 몸이 불편한 남주의 등장은 낯설었던 탓이다. 정우성은 “처음 드라마화를 시도했을 때는 3부쯤에서 남자의 말문을 트이게 하자는 의견이 나오는 등 수용하기 힘든 분위기였다”며 “이제는 사회적 의견도 성숙돼 있고 자막에 대한 거부감이 없는 등 미디어 환경도 달라진 것 같다”고 짚었다.
실제로 장애가 있는 주인공이 드라마 중심에 서는 일이 점차 자연스러워지고 있다. 지난 14일 끝난 16부작 ‘반짝이는 워터멜론’(tvN)은 한국 드라마에서 이례적으로 코다를 주인공으로 청각장애인 가족에 귀 기울였다. 시작부터 수어가 주요 언어로 등장했다. 주인공이 과거에서 10대 시절 부모를 만나는 설정이어서 장애와 수어가 풋풋한 10대들의 로맨틱코미디에 녹아들었다. 코다인 하은결을 연기한 려운은 “장애인의 밝은 모습을 담고 평범한 일상을 보여준 것이 장애에 대한 편견을 깨는 데 긍정적인 영향을 줄 것 같다”고 했다.
장애와 수어를 10대들의 로맨틱코미디에 녹여 호평받은 ‘반짝이는 워터멜론’. 티브이엔(tvN) 제공
그동안 장애인은 메디컬· 범죄물에서 특정 사건의 피해자로 나오거나 주인공의 죄책감을 자극하는 존재로 활용됐다면, 최근에 멜로나 로맨틱코미디로 확장된 것은 놀라운 변화다. 지난해 자폐 스펙트럼 장애 주인공이 등장한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ENA)가 큰 사랑을 받은 것이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한 지상파 출신 프리랜서 드라마 피디는 “‘우영우’ 성공에 놀란 방송사들도 장애인이 나오는 드라마는 어둡고 시청률이 나오지 않는다는 선입견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고 봤다. ‘우영우’에 이어 ‘사랑한다고 말해줘’를 편성한 이엔에이 쪽은 “이제는 어떤 인물이냐보다 얼마나 공감할 수 있느냐를 보는 것 같다”고 했다. 신은수, 최현욱, 려운, 정우성 등 젊은 세대한테 인기가 많은 배우들이 수어 연기를 한 것도 시청자들이 한번 더 관심을 갖는 효과를 냈다.
다만 장애 관련 드라마는 진일보했지만 여전히 생각할 지점은 남긴다. 지난 17일 끝난 ‘7인의 탈출’(SBS)이나 지난 8월 종영한 ‘비밀의 여자’(KBS2)처럼 극성을 높이려 장애를 고민 없이 사용하는 시도는 여전하기 때문이다. 지난해 ‘우리들의 블루스’(tvN)에서 다운증후군 배역을 실제 다운증후군 배우 정은혜가 연기해 호평받았지만, 장애인이 주인공인 작품이 쏟아지는 가운데에서 비슷한 시도를 찾아보기 어렵다. 한국방송광고진흥공사가 지난해 발표한 ‘2021 문화콘텐츠 다양성 연구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 장애예술인 7095명 중 영화와 방송에 출연한 배우는 99명에 그친다.
남지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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