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레니즘 오리엔트서 탄생”
정수일의 실크로드 재발견 <25> 헬레니즘의 산실, 니사
투르크메니스탄의 남부도시 마리에서 카라 쿰 사막 언저리를 따라 서북 방향으로 45분쯤 날아서 밤 8시 5분, 수도 아슈하바트에 도착했다. 같은 방향으로 실오리 같이 늘어선 카라 쿰 운하가 사막 속에서 가끔씩 숨박꼭질 하듯 출몰하곤 한다. 어둠 깔린 아슈하바트 상공에서 내려다 보니 가로등 불빛이 한결같이 연한 주황빛깔이다. 알고보니 가스등을 쓰기 때문이라고 한다. 현지 가이드 도냐의 말에 따르면, 주민들에게 가스는 무료 공급한다고 하며, 내년부터 투르크메니스탄~아프가니스탄~파키스탄을 잇는 1400km에 달하는 가스관 부설공사가 시작된다고 한다. 세계 가스 매장량의 10%를 차지하는 ‘가스 왕국’다운 모습이다. 투르크메니스탄 말로 ‘사랑의 거리’란 뜻의 아슈하바트는 새 도시다. 1948년 대지진으로 옛 도시는 자취를 감추고, 폐허 위에 오늘날 60만 인구를 헤아리는 수도를 건설했다. 특히 옛 소련연방에서 독립한 뒤 최근 10년 동안 면모를 일신했다고 한다. 지금은 1200여개 외국기업이 들어와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 중앙아시아의 다른 도시에서는 찾아볼 수 없으리만큼 거리가 깔끔하고 건물이 화려하며 사람들도 활기차 보인다. 이것저것 신기한 일들도 눈에 많이 띈다. 그러나 ‘실크로드 재발견’장정에 나선 필자로서는 오늘보다, 오늘을 있게 한 어제에 더 관심이 쏠렸다. 더욱이 그 어제가 오해되었거나 감춰졌을 때 그것을 제대로 밝혀내는 데 우선 눈길을 돌리게 마련이다. 흔히들 헬레니즘을 헤브라이즘과 더불어 서양사상의 한 원류로 간주하면서, 발상지를 서구로 어림잡는데, 이것은 큰 착각이다. 사실 그 발상지 등에 관해서는 지금껏 명쾌한 해명이 나오지 않았다. 어쩌면 으레 찾아야 할 곳을 찾지 않아 그럴 법도 하다. 아무튼 늘 고민해 오던 문제라서 이 기회에 한번 그런 해명에 도전장을 던지고 싶었다. 문제의 고갱이는 헬레니즘이 언제 어디서 어떻게 이뤄졌는가 하는 것이다. 헬레니즘은 기원전 4세기 알렉산더의 동방원정을 계기로 그리스 문화와 페르시아 문화를 비롯한 오리엔트 문화가 만나 탄생한 동서문명의 첫 융합물이다. 그 중심 발상지는 서구 어느 곳이 아니라, 서아시아와 중앙아시아 일원을 석권하던 아케메네스조 페르시아를 계승한 파르티아다. 10년간의 원정을 통해 세워진 알렉산더 제국은 건국자가 급사하자 내홍이 일어나면서 아시아의 셀레우코스와 아프리카의 프톨레미, 유럽의 안티고니즈의 3부분으로 조각났다. 셀레우코스마저도 얼마 못가 소아시아의 페르가몬과 흑해 남안의 비치니아, 카스피해 동남부의 파르티아, 파미르 고원 서북부의 박트리아 속디온 등 8개 소국으로 사분오열된다. 이런 이합집산 과정을 아우른 헬레니즘 시대는 알렉산더 제국의 건립부터 프톨레미가 로마제국에 멸망될 때(기원전 30년)까지 약 300년 동안 지속된다. 이 기간에 그리스-로마와 가장 오랫동안 공존하고 부대끼면서 헬레니즘 탄생과 성장을 주도한 세력은 파르티아다. 파르티아(기원전 247~기원후 226)는 카스피해 동남부 지역에서 남쪽으로 내려온 이란계 유목민 아르사케스 일족이 셀레우코스 왕조의 지방 총독을 몰아내고 세운 나라다. 그래서 일명 ‘아르사크 왕조’라고도 한다. 중국 옛 사서에서 파르티아를 지칭하는 ‘안식(安息)’은 이란어 ‘아르사크’의 음사라고 한다. 전성기에는 강토가 유프라테스 강부터 인더스 강까지 광활한 지역을 망라한 대제국으로 서방의 로마제국과 자웅을 겨루며 실크로드 육로의 서단을 장악하고 있었다. 동서 교역의 중간조절자로서 중국 비단의 로마 수출을 차단하고 중계무역으로 엄청난 부를 쌓기도 했다. 파르티아와 헬레니즘은 상승적인 함수관계였다. 파르티아는 새 융합문화인 헬레니즘의 자양분을 흡수해 성장할 수 있었으며, 헬레니즘은 파르티아라는 신흥 제국의 토양 속에서 찬란한 결실을 맺을 수 있었다. 이런 함수관계는 그리스·오리엔트 문화 사이의 건설적 융합을 바탕으로 성립할 수 있었으니, 그 융합이 이뤄진 주무대가 다름아닌 파르티아다. 비유컨대, 그리스 문화란 ‘신부’가 파르티아란 ‘신랑’에게 시집와서 출산하고 키운 것이 헬레니즘이란 영아인 것이다. 그래서 헬레니즘을 ‘유럽과 아시아의 결혼‘이라고도 표현한다. 그렇다면 그 산실은 과연 어디였을까. 아무래도 이 나라의 초기 수도가 아니었겠는가하는 것이 필자의 평시 소신이었다. 그래서 아슈하바트에서 우선 찾은 곳이 초기 파르티아의 수도였던 니싸 유적지다.
니싸는 이슈하바트에서 서쪽으로 15km 떨어진 코베트 다크 산맥 동쪽 기슭의 아늑한 대지에 있다. 이 고성은 몽골 군의 유린을 비롯한 2천여년간의 모진 풍상에 닳고 찢기어 허울만 덩그러니 남아있으나 그 위용만은 잃지 않은 채 자못 으젓하다. 이 고성 유적에 관해서는 1946~60년 타슈켄트 출신의 매손이 이끄는 남투르크메니스탄 고고학종합조사단이 처음 실체를 밝혀냈고, 후일 러시아와 이탈리아 고고학자들도 참여해 면모가 드러났다. 고성은 왕궁인 5각형 내성(옛 니싸)과 그것을 에워싼 상업·거주 지역인 외성(신 니싸)로 구성된다. 입구 전망대에 올라서니 성터가 한눈에 안겨온다. 내성 벽은 진흙과 벽돌로 쌓았다. 높이는 20m나 되며, 정원과 신전, 탑, 방 등의 구조물들이 조화롭게 배치되어 있다. 마당에는 깊이 남짓한 물저장고 자리가 4개나 남아있다. 건물 잔해 중에서는 아치형 왕실 기둥과 사방 20m의 중앙홀, 연회장으로 썼던 ‘붉은 방’, 불피움터가 있던 조로아스터교 원형사원 흔적 등을 찾아볼 수 있다. 웅장하고 견고했던 내성 안에 비해 외성 안 건물은 왜소한 데다 심하게 망가져 형체를 알아보기가 어렵다. 발상지 서구라고? 큰 착각
페르시아 계승한 파르티아가
그리스와 공존하며 탄생 주도 초기 수도 니사 유물 중
뿔잔 에로스상 유리병…
문화적 융합 잘 보여줘
니사 유적지에서 기원전 2세기에 출토된 다양한 모습의 각배들. 각배는 짐승의 뿔로 만든 술잔으로 그 끝에 작은 구멍이 나 있다. 우리에게 특히 눈길을 끄는 이유는 가야와 신라에서도 비슷한 형태와 크기로 된 각배가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왼쪽 위부터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반인반마의 괴물인 켄타우로스 모양의 각배. 젊은 여자를 안고 있는 켄타우로스 형태의 각배. 독수리 머리와 날개를 가지고 있고, 뒷다리와 몸은 사자인 상상의 동물 그리핀 형태의 각배. 큰 포도주병을 안고 있는 여인의 모습을 담은 각배
| |
| |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