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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문화일반

“희귀본은 관심 없소 관심 가는 게 희귀본”

등록 2006-05-25 21:09수정 2006-05-26 17:26

불문과 교수로 정년 퇴임후 명예교수직을 마다고 전혀 새로운 분야인 간다라 불교 연구에 뛰어든 민희식 선생은 마라난타가 파키스탄에서 동진을 거쳐 백제(법성포)에 불법을 전한 경로를 밝혔다. 불문학 관련 100여권을 짓고 번역한 그는 최근 몇해에 걸쳐 간다라 관련 저서 3권과 논문 여러 편을 저·역서 목록에 추가했다.
불문과 교수로 정년 퇴임후 명예교수직을 마다고 전혀 새로운 분야인 간다라 불교 연구에 뛰어든 민희식 선생은 마라난타가 파키스탄에서 동진을 거쳐 백제(법성포)에 불법을 전한 경로를 밝혔다. 불문학 관련 100여권을 짓고 번역한 그는 최근 몇해에 걸쳐 간다라 관련 저서 3권과 논문 여러 편을 저·역서 목록에 추가했다.
유학 때부터 묻어뒀던 ‘간다라’
불문학 교수 퇴임 뒤 다시 꺼냈다
책 한트럭 버렸지만 불교책으로 범람
25년 이사못한 집 다섯개 방이 책
아침 식전·낮·취침전…하루 3권씩 읽죠

한국의 책쟁이들/① 프랑스 유학 1세대 불문학자 민희식 선생

이번호부터 ‘한국의 책쟁이들’, ‘한국의 글쟁이들’을 번갈아 싣습니다. ‘책쟁이들’은 책에 미쳐 이를 모으고 읽고 활용하는 사람들, ‘글쟁이들’은 글쓰기를 즐겨 업으로 삼은 사람들 이야기입니다. 지식산업의 소비자이자 생산자인 그들이 살아가는 모습과 그들이 말하는 심오한 책/글 세상으로 여러분을 안내합니다.

청계천 복개판 위에 세워진 삼선시장. 격한 구호에서 철거를 둘러싼 의견충돌이 드러난다. 삼선서림은 불이 켜진채 문이 잠겼다. 삼선로터리에서 성북동 방향. 구의원 선거원들이 기호와 이름을 합창으로 반복하는 행길. 90도를 꺾어 골목으로 들면 갑자기 한적한 주택가로 변한다.

‘고향떡집’ 맞은 편 이층 집. 성성한 백발의 노인이 막 대문을 나와 두리번거렸다. 지난 여름 삼선서림에서 스치지 않았다면 그냥 슈퍼에라도 들를 참인 주민일 터다. 민희식(73) 선생. 해방 뒤 프랑스에 유학한 1세대 불문학자.

그는 요즘 간다라 불교에 흠뻑 빠져 ‘인생 이모작’ 중이다. 지난 화요일에는 마라난타 기념관 준공식에 초대되어 영광 법성포에 다녀왔다. 백제에 불교를 전한 승려로만 알려진 마라난타. 파키스탄 초타 라홀에서 나 승려가 된 그가 페사발, 스와트, 길기트 훈자를 거쳐 텐산산맥을 넘어 구자국에서 수행을 하고 둔황을 거쳐 중국 동진에 이르고, 다시 동진의 수도 건강에서 배를 타고 백제의 법성포에 이르러 불법을 전한 경로를 밝혀냈다. 법성포를 도래지로 지목한 것은 아무포, 부용포에 이은 불교적 지명, 함께 가져왔다고 전하는 불두, 매향비가 남은 까닭이다.

간다라에 대한 관심은 프랑스 유학 때부터. 그동안 불문학 전공에 몰두해 묻어둔 화두를 퇴임 뒤 본격적으로 꺼내 들었다. 마라난타 연구를 위해 파키스탄 현지를 답사한 게 일곱 차례. 문헌조사와 도서구입을 위해 일본 3번, 프랑스·중국에 다녀왔다. 파키스탄 정부의 의뢰를 받아 관련 책 3권을 썼다. 불교방송에서 1년반 간다라 미술을 강의했다. 퇴임하면서 한 트럭의 책을 정리해 숨통이 틘 집안이 다시 책으로 넘쳐나는 것도 그 탓이다. 그는 간다라 미술이 실크로드를 거쳐 한국으로 오면서 변화하는 과정에 관심이 있다. 불상 양식의 변화는 물론 사상의 변화까지.

25년 동안 한 번도 이사하지 않은 집안에는 세월이 고였다. 쌓이고 쌓인 책은 줄잡아 7만권. 다섯 개의 방에 흩어져 보관돼 있다. 이층에 둘, 일층에 하나, 지하실에 둘. 그가 주로 머무는 곳은 이층의 오른쪽 방. 사방이 책이고 가운데는 책상이 셋, 복사기 한대. 비집고 책꽂이로 다가가 책을 뽑은 뒤 책상에 앉아 읽거나 쓸 수 있을 뿐이다. 편한대로 안락, 등나무, 보통, 편의점 플라스틱 의자를 번갈아 이용한다. 천장은 빠꼼할 줄 알았는데, 전등과 함께 스피커가 매달렸다. 한차례 다과를 바꿔가면서 무려 다섯 시간동안 노 교수는 이야기 보따리를 풀었다.

현지 답사…불교방송 강의도

조선어 사용금지, 창씨개명 등 엄혹한 유소년기를 거친 그한테 일본어는 사실상 모국어였다. 해방 뒤 중학교 때 처음으로 영어와 함께 한글 자모를 익혔다. 혼란스런 해방과 전쟁통. 제대로 교육받은 기억이 없다. 일본인들이 빠져나간 대학과 학과는 껍데기였다. 10~20년 전 기초프랑스어를 배운 이가 하루아침에 교수가 되었다. 교수와 학생이 함께 배우는 셈이었다. 강의는 대부분 휴강. 게다가 그는 대학입학 전후 군대를 이중으로 다녀와야 했다.

프랑스 유학 때 처음으로 공부다운 공부를 했다. 59~64년 프랑스 정부장학금으로 5년 동안 프랑스에 머물렀다. 책, 여행, 박물관, 공연관람을 통해 그동안의 갈증을 채웠다. 박사논문은 플로베르. 발자크의 <인간희극>을 영적인 문제와 관련지어 보려다 방향을 바꿨다. 지도교수는 1년을 지켜보다가 “건너편 육지가 보일 때 바다를 건너야 한다”는 말을 해 주었다. 한 우물만 깊이 파는 대신 널리 그리고 이질적이고 대비적인 부문을 함께 공부할 것을 권했다. 거기서 공통점을 찾아내면 자기 것이 된다면서. 논문 주제는 <보바리 부인>. 쉽게 이뤄지는 것에는 무관심하고 될듯말듯 벅찬 것에 몰두하는 사람 이야기. 병리가 규명되니 묘사의 아름다움에 대한 설명이 쉬워졌다. 두집 짓고 난 뒤의 행마처럼.

입국해서 그가 펼친 프랑스어 교수법은 획기적이었다. 당시 외국어 교육은 관사, 형용사 변화 등 문법을 외우게 하는 구태의 반복. 완전한 문장으로 가르치는 그의 강의는 인기가 높았다. 가르칠 책도 없는 형편. 닥치는 대로 책을 읽고 번역해 냈다. 귀국 일주일만에 뚝딱 교과서를 쓰기도 했다. 학생은 물론 외교관을 가르치고 정부에 프랑스 손님이 찾아오면 상대해야 했다. 그렇게 40여년. 성균관대 이화여대 한양대에서 수많은 제자를 길렀다. 번역 또는 지은 책이 100권을 넘는다.

프랑스어의 직설법-접속법 구분은 그의 삶에 배었다. 자신의 말에 책임지기, 생각(바람)과 현실을 분리해서 사고하기가 그것. 접속법은 “(서점에 있는) 그 책을 사다줄 게”라 말할 때 쓰는 화법. 팔렸으면 못 사다주지만 자신의 말을 어긴 게 아니다. 테제베 도입 협상 당시, 약탈해간 강화도 서고의 ‘의궤’를 돌려 주겠다고 했을 때 프랑스 대통령이 사용한 어법이다. 프랑스는 목적한 고속철을 팔아치웠고 의궤를 돌려주지 않아도 되었다. 핑계는 실무담당자의 반대.

‘불교 교수법’ 개척…쓴 책 100권

잠시 휴식. 나머지 네 곳의 책방 탐험에 나섰다. 같은 층 건넌방. 머리를 숙이고 들어가는 구조. 주로 일어 문고본. 시리즈별로 나뉘어 겹으로 뉘었다. 책꽂이 맨 위에 그의 저서와 역서가 먼지를 썼다. 의자를 놓고 하나하나 내려 쌓으니 키를 넘어 쌓을 수가 없다. 바닥에 두 겹으로 늘어놓고 카메라를 통해 보니 책등의 제목이 보이지 않는다. 그의 표정이 착잡했다. 쪽방에는 불교책 500~600권이 쌓였다. 지하실은 본래 보일러실. 바닥을 깔고 책을 부려놓았다. 책을 찾아낼 수 있을까 의심스러울 정도. 불문·영문의 전공책, 백과사전만은 종이상자 또는 책꽂이에 두었다. 전공책은 그의 존재증명과 같아서 손이 타지 않는 곳에 두고 필요할 때만 꺼내본다고 설명했다. 보고나서는 제자리에 반납한다. 프랑스 작가의 작품은 모두 있고 백과사전도 여러 가지다. 하지만 프랑스 백과사전은 너무 상세해 자주는 안 본다. 일층은 일반책이라 건너뛰었다.

다시 서재. 과연 이 많은 책 가운데 원하는 책을 바로 찾아낼 수 있을까? 방마다 분야별로 나누고 책꽂이를 세분해 대부분 잘 안다는 답변이다. 하지만 서재의 책은 손을 많이 타는 통에 둔 곳을 잊는 경우가 잦다고 털어놨다. 같은 책을 다섯 권이나 반복해 산 것도 있다. 이중으로 쌓아둔 책 뒤로 넘어간 책을 찾아낼 재간이 없다. 귀한 책을 구경할 기회를 놓칠 수 없지 않은가. 까치발로 (M. E. Burnouf 역. 프국립인쇄소, 1973)를 뽑아왔다. 법화경의 불역본. 19세기 초 초판이 나왔고 3단계로 걸쳐 완간되었다. 내용이 상세해 한문, 또는 국역본으로는 불분명하던 개념이 쏙쏙 들어온다고 설명했다. “희귀본이나 절판본은 관심없소. 관심이 있는 것이 귀할 뿐이오.” 그의 관심사는 불문학과 간다라문화. 불문학에 관심이 쏠렸을 때는 그쪽 분야의 책이, 간다라에 쏠렸을 때는 그쪽의 책이 무한 가치를 갖는다. 지나고 나면 껍데기다. 딩동댕 정답. 눈호사를 하려다 호된 꾸지람을 받은 꼴이다. 저·역서 책 무더기를 바라보는 그의 눈길이 그래서 착잡했던 걸까.

퇴임하면서 연구실에 있던 책은 “집으로 나르기 귀찮아” 필요한 사람들한테 나눠주었다. 요즘도 빌려달라는 이한테 선뜻 빌려주고 반납을 채근하지 않는다. 책은 다른 것과 달리 대체 불가한 것. 자신의 욕심에 견주어 다른 사람들의 책욕심을 이해한다. 그래서일까. 책 알맹이는 다 뽑아져 그의 머리로 옮겨지고, ‘괜찮은 책’은 빌리는 형식으로 다른 주인에게 옮겨졌으니 책꽂이의 책들은 빈 껍데기처럼 보였다. 그래도 다른 사람들이 감히 탐내지 않는 책은 고스란히 남아있을 터.

“우리 집은 도둑이 든 적이 없어요. 책밖에 없으니까요.” 살 때는 제값이지만 팔때는 값없는 책, 책들. 하긴 살때만 사용가치와 싯가가 일치하지 않겠는가. 외출 때도 대문만 잠근다. 그가 쓰는 방은 온통 책과 책상, 그리고 침대 하나뿐. 나머지 옷장이나 장식장 따위는 모두 마루에 나와있다. 책 이외에 하다못해 골동품 하나, 그림 한점 없다.

책밖에 없으니 도둑도 안 드네요

요즘도 그는 하루에 책 3권을 읽는다. 식전에 한권, 일과 중 돌아다니는 중에 한권 그리고 저녁때 잠자리에 들기전 한권. “하루 다섯권을 읽는 사람도 있는데요 뭘.” 요령은 삼매경. 집중하면 안될 것도 없다. 전철 같은데서 오히려 집중이 잘 된다. 책의 핵심은 20%, 나머지는 불필요하거나 보조적인 내용이라며 핵심을 잡아내는 것이 중요하다. 읽는 속도보다 사들이는 속도가 더 빨라 걱정이다. 책을 사지 않는 날이 거의 없다. 가까운 삼선서림은 산보삼아 들른다.

정원 한쪽 맑은 물웅덩이. 비단잉어와 금붕어가 노닐었다. 청계천 상류다! 도시가 아스팔트로 뒤발하고 있어도 맑은 지하수는 흐르는 모양이다. 그렇지 않겠는가. 선거판 구호의 시끄러움과 아랑곳없이 책에 침잠한 은사가 있는 것처럼.

글 임종업 기자 blitz@hani.co.kr, 사진 장철규 기자 chang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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