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릉에 사는 백석예씨는 시속 60㎞ 이상을 달리지 못하는 낡은 ‘도라꾸’를 몰고 나무를 베어내는 산판에서 일을 한다.
나라에서 15년된 ‘영업용’은 폐차시키라잖소
그래서 30년된 ‘자가용 도라꾸’ 저거를 샀제
산더미 나무짐 싣고 시속 20km 유유자적
달릴 필요가 어디 있소? 다 저 할 몫 있잖소
산다는 것은 결국 깨달음…절로 끄덕끄덕
그래서 30년된 ‘자가용 도라꾸’ 저거를 샀제
산더미 나무짐 싣고 시속 20km 유유자적
달릴 필요가 어디 있소? 다 저 할 몫 있잖소
산다는 것은 결국 깨달음…절로 끄덕끄덕
이지누의 인물로 세상읽기/백복령 앞길 막은 ‘지에무씨’ 운전수 백석예씨
그이의 자동차는 흔히 ‘지에무씨(GMC)’라고 부르는 낡은 트럭이며 1953년식이다. 지금껏 멀쩡하다면 50년이 넘어서도 씽씽 굴러다니는, 나라 안에서 드물게 보는 오래된 자동차가 되는 셈이다. 그 트럭은, 아니 그냥 ‘도라꾸’라고 하자. 그게 맞는 것 같다. 짜장면을 짜장면이라 부르지 못한 채 자장면이라고 부르기 시작하자 그것의 맛조차 달라져버린 듯 한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나를 두고 일제강점시대의 잔재 용어를 사용한다고 비난할지라도 이 오래 묵은 자동차는 ‘도라꾸’라고 부르는 것이 제격인 듯하다. 그것은 그 도라꾸의 제조회사인 지엠씨를 지에무씨라고 불러야 그 자동차를 제대로 상징하는 것과도 같은 맛이다.
뒤뚱뒤뚱 자기만의 속도로
그 도라꾸를 처음 본 것은 1995년, 강릉의 성산에서 백복령을 넘어 임계 그리고 태백으로 이어지는 국도에서였다. 그는 내 앞에서 도무지 속도를 내지 않을 뿐더러 뒤뚱거리기조차 하며, 오로지 자기만의 속도로 제 갈 길을 가고 있을 뿐이었다. 능히 그를 추월할 수 있었지만 넘어가지 않은 까닭은 그를 뒤따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나에게 생겨나는 호기심 때문이었다. 도무지 그 한결같은 속도를 유지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궁금했던 것이다. 물론 그 호기심은 조금 후에 산산조각 나버리고 말았다. 그 한결같은 속도는 그 도라꾸를 운전하던 칠순의 백석예씨가 그리 한 것이 아니라 자동차의 물리적인 능력이 그것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실망하지 않았다. 그토록 덜컹거리며 낡고 속도조차 거북이걸음 같은 자동차를 애지중지하고 있는 사람 또한 그 못지않게 무던한 사람일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윽고 그를 만난 것은 무턱대고 그를 뒤따라 닭목령을 넘고 어느 곳인지 가늠하기도 힘든 비포장 길을 돌아들어 큰 산판이 벌어진 곳이었다. 훤칠하게 큰 키를 한 그이에게 다짜고짜 말을 건넸다. “할배요, 차 좋네요.”하고 말이다. 그러자 생뚱맞은 얼굴로 “나를 아오?”하는 무뚝뚝한 반응이었다. 그러나 자동차에 대해 무한한 애정을 표하자 이내 그이는 달라졌고 술술 이야기가 풀려 나왔다.
“저게 오십삼년식이래. 첨엔 군용 포차로 나왔던 모양인데 내가 저걸 계속 탄 건 아니고, 전에는 영업용을 탔지 않소. 그런데 팔십년도 유월 달인가 그때, 나라에서 십오년 이상 된 영업용 화물차는 전부 폐차시키라고 했지 않소. 그래 그거를 삼십만원 주고 폐차시키고 이백오십만원 주고 저 걸 산기지. 먹고 살아야 하니 어쩌겠소. 저거는 영업용이 아이라 자가용이거든, 그러이 문제가 없었다 말이오. 오십삼년 식이니까 한 사십삼년 됐나. 저것도 내가 살 때는 일제 도요다 구십 마력짜리 엔진이랐는데 내가 인따나쇼나루 엔진으로 바꽜어. 백칠십 마력이 넘는 걸로 바꽈 놓으이 힘을 쫌 쓰네. 산판에서 왕왕거리고 다니려면 무조건 힘이 좋고 막 가야 되거든. 그래도 저기 보이기는 뭐 저런 기 있나 싶고 데자인도 볼 품 없어서 고물처럼 보이도 저런 기 없으마 안 되는 일이 있지 않겠소. 사람하고 똑같지. 다 저 할 일들이 있지 않소.” 이야기를 마치고 나는 그이의 도라꾸를 태워 달라고 했다. 나무를 싣고 강릉의 성산 목재소에 부려 놓고 다시 올라와야 한다기에 냉큼 차에 올라탔다. 비포장 길에서는 길에 놓인 작은 돌 하나의 충격까지도 고스란히 전해 주는 군데군데 헤진 의자에다가 창문은 아예 붙박이여서 떼는 것과 막아 놓는 기능밖에 없으며 에어컨은 고사하고 그 흔한 라디오조차도 없었다. 자동차 문은 덜컹거릴 때마다 열렸다 닫히기를 반복했지만 그이는 새끼손가락의 손톱만큼도 신경을 쓰지 않았다. 이윽고 나무를 바리바리 실은 도라꾸가 아스팔트로 내려섰지만 시속 20㎞를 넘지 못했다. 생전 달려 볼 일이 있어야지…
애시 당초, 그이의 도라꾸가 바람을 가르며 달리거나 편안한 쿠션 혹은 승차감으로 나를 맞을 것이라고는 기대조차 하지 않았으니 자동차는 그렇다 쳤다. 그리곤 그이를 눈여겨봤다. 그이는 아예 자신의 도라꾸에 중독이라도 된 듯 천연덕스럽게 길 양쪽의 풍경을 응시할 뿐 전혀 답답해하지 않았다. 오히려 답답한 것은 나와 도라꾸의 뒤를 따라 오는 자동차들일 뿐, 그들은 자신의 속도를 뽐내기라도 하려는 듯 잠시의 틈도 주지 않고 쌩쌩 도라꾸를 앞질러 가며 더러는 짜증섞인 경적을 울려대곤 했다. 처음에는 좋다가도 서서히 답답함을 느끼던 나도 넌지시 물었다. “이게 본래 속도가 이렇게 밖에 안 나오는 모양이지요?” 그러자 그이가 받았다. “왜? 답답하오. 아까 내가 말하지 않았소. 다 자기 할 일들이 있는 거라고, 이 차는 물건 많이 싣고 험한 곳을 다니는 힘이 필요한거지 빨리 달리는 게 필요한 거는 아니라고 말이오. 이게 달리면 시속 60㎞는 나올라나 모르겠네, 생전 달려 볼 일이 있어야지 말이오.”
그러더니 한 마디 더 보탰다. “세상 모든 게 다 자기 몫이 있는 법 아니겠소. 딴 거 안 쳐다보고 자신한테 주어진 몫만 잘 하믄 세상 어지러울 일 하나 없는 거라 말이오. 내가 지금 낭구를 이래 싣고 저 작은 차들 맨치로 냅다 달려 보오. 용을 써서 달리믄 커브 길에서 낭구가 쏟아지던지 차가 뒤집어지는 거는 순간 아니겠소. 그 뻔한 짓을 왜 하오.”
다시 내가 되물었다. 그래도 모험으로라도 한번 해 보지 않으셨나고 말이다. 그러자 “모험이라는 것도 터무니없는 거는 모험이 아니라 오기 부리는 거라 말이오. 모험도 어차피 다 자기 몫 안에서 이루어지는 거지 내가 뭔지도 모르면서 어째 모험을 할 수 있겠소. 나도 모험을 하기는 하지. 낭구 실으러 산판으로 가다가 진창 길 같은데 만나믄 건너편 낭구나 바웃돌에다가 윈치 걸고 윈치로 차를 땡겨서 가기는 한단 말이오. 요새는 장비가 좋으니 길이나 좋지, 전에는 어데 그랬소. 길 같지도 않은 길 만들어 놓고 그 길로 못 오르내리믄 운전솜씨가 없다고 일을 주지 않으이 어쩌겠소. 목숨 걸고 그 길로 오르내려야 식구들 입에 쌀알이라도 넣는다 말이오. 진창에 바쿠가 다 빠지고 옆으로는 천길 벼랑이라도 윈치 걸어 땡기면서 숱하게 산을 오르내렸지만 저래 작은 차들 맨치로 냅다 달리는 거는 내가 할 모험이 아니지 않소.”
열여덟에 조수 시작해 일흔넷까지
가만히 듣고 있다 보니 주장자 쿵쿵 울리며 ‘할’을 내 뱉는 선사들의 법문 뺨치는 말이다. 자기자리를 깨우치고, 자기 몫을 감당하며, 밀물처럼 달려드는 욕심조차 다스리며 스스로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일을 가늠할 수 있다는 것은 이미 한 깨달음을 이룬 다음에야 가능한 것이니까 말이다. 열여덟에 도라꾸의 조수생활을 시작으로 일흔넷이 될 때 까지 운전대를 놓지 않았다는 그이는 단 한 차례도 근사한 자동차를 몰아 보지 못했다고 했다. 그저 트럭에 생선을 싣고 서울이나 부천을 오가거나 나중에는 지에무씨를 끌고 강원도 산판을 안 가본 곳이 없을 정도로 돌아 다녔을 뿐이지만 그이의 말 한 마디는 수십 차례나 안거에 든 큰 스님들이나 할 수 있는 깨달음의 말을 한 마디도 틀림없이 하고 있으니 어찌 놀랄 일이 아니겠는가.
그렇다고 지금 내가 공부를 하기는커녕 학교 언저리도 못 가봤다는 그이와 선사들을 견주어서 선사들 보다 그이가 낫다는 말을 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모든 것은 통한다는 것이다. 무슨 일을 하든 궁극의 깨달음은 한 곳으로 모여들 수밖에 없는 것이고 그이는 흔히 고물 자동차라고 거들떠보지도 않을 도라꾸 운전대에서 깨달음을 이룬 것일 뿐인 것이다. 산다는 것은 결국 깨달음의 길 아니던가. 지금 알고 있는 것을 그때도 알았더라면 이라는 상투적인 말이 가슴에 와 닿는 것 또한 그 깨달음을 놓친 것을 아쉬워하며 뒤늦게 깨달은 것에 대한 회오에 대한 공감대가 만들어지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그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들의 삶 속에서 가장 먼저 깨달아야 할 것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이다. 낡아빠진 도라꾸 운전수 백석예 할아버지 말을 되짚어 보면 그것은 자기 자리이다. 비록 그이는 내놓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곰곰이 되씹어 보면 그이는 내가 어디에 있으며 나는 무엇을 하고 어떤 것을 하지 말아야 하는가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던 것이나 다름없다. 그것은 지금, 우리들의 현재에서 가장 중요하고 가슴 아픈 지적일 수 있지 않겠는가. 그리고 과거에 젖어 있거나 미래에 부풀어 있기보다 지금 그리고 여기를 헤쳐 나가지 않으면 그 무엇도 아름다워 질 수 없다는 이야기와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저게 오십삼년식이래. 첨엔 군용 포차로 나왔던 모양인데 내가 저걸 계속 탄 건 아니고, 전에는 영업용을 탔지 않소. 그런데 팔십년도 유월 달인가 그때, 나라에서 십오년 이상 된 영업용 화물차는 전부 폐차시키라고 했지 않소. 그래 그거를 삼십만원 주고 폐차시키고 이백오십만원 주고 저 걸 산기지. 먹고 살아야 하니 어쩌겠소. 저거는 영업용이 아이라 자가용이거든, 그러이 문제가 없었다 말이오. 오십삼년 식이니까 한 사십삼년 됐나. 저것도 내가 살 때는 일제 도요다 구십 마력짜리 엔진이랐는데 내가 인따나쇼나루 엔진으로 바꽜어. 백칠십 마력이 넘는 걸로 바꽈 놓으이 힘을 쫌 쓰네. 산판에서 왕왕거리고 다니려면 무조건 힘이 좋고 막 가야 되거든. 그래도 저기 보이기는 뭐 저런 기 있나 싶고 데자인도 볼 품 없어서 고물처럼 보이도 저런 기 없으마 안 되는 일이 있지 않겠소. 사람하고 똑같지. 다 저 할 일들이 있지 않소.” 이야기를 마치고 나는 그이의 도라꾸를 태워 달라고 했다. 나무를 싣고 강릉의 성산 목재소에 부려 놓고 다시 올라와야 한다기에 냉큼 차에 올라탔다. 비포장 길에서는 길에 놓인 작은 돌 하나의 충격까지도 고스란히 전해 주는 군데군데 헤진 의자에다가 창문은 아예 붙박이여서 떼는 것과 막아 놓는 기능밖에 없으며 에어컨은 고사하고 그 흔한 라디오조차도 없었다. 자동차 문은 덜컹거릴 때마다 열렸다 닫히기를 반복했지만 그이는 새끼손가락의 손톱만큼도 신경을 쓰지 않았다. 이윽고 나무를 바리바리 실은 도라꾸가 아스팔트로 내려섰지만 시속 20㎞를 넘지 못했다. 생전 달려 볼 일이 있어야지…
그이의 ‘도라꾸’는 한국전쟁 당시 포를 끌던 차였다고 하며 조수석에는 기관총 거치대가 아직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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