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용서하고 지금 사랑하라
조연현 글·사진. 비채 펴냄. 1만900원
조연현 글·사진. 비채 펴냄. 1만900원
여성종교인 모임 ‘심소회’ 19일간의 세계성지순례하며
아집 넘어 화해와 포옹 “용서는 자신에 대한 자선”
아집 넘어 화해와 포옹 “용서는 자신에 대한 자선”
“스님은 깎은 중, 수녀님은 쓴 중, 교무님은 긴 중. 생긴 건 달라도 우린 모두 중 아닙니까.”
까르르, 3인의 웃음이 터졌다. 마이크를 잡은 진명스님의 능청에 ‘삼소회’의 아주 특별한 여행은 웃음으로 시작됐다. 세 종교가 웃는다는 뜻의 삼소회는 원불교, 불교, 성공회, 가톨릭의 여성 수도자모임. 한 달 한 번씩 만나 침묵 명상을 해왔지만 함께 먹고 자는 여행은 처음이다. 그것도 다른 종교의 성지를 순례한다니…. 겟세마네 동산의 스님? 바티칸의 교무님? 둥게스와리의 수녀님?
“나를 투신한 출가자에게도 자신과 다른 신앙을 가진 이들과 동행한다는 것은 자신의 아성을 더 큰 바다에 던져야 하는 또 한 번의 출가와 다름없었다.” 지은이는 19일간의 세계성지순례를 ‘제2의 출가’라 일컬었다. 2년 전 인도 순례를 체험한 조연현 한겨레 종교전문기자가 이번에는 관전자가 되어 타인의 순례를 기록했다. 아니, 자칭 ‘삼식이’가 되어 함께 울고 웃으며 뒤섞였다. 서로 다른 종교인에게 ‘19일’이란 시간은 <지금 용서하고 지금 사랑하라>(비채)란 한권의 책이 될 만큼 많은 일이 벌어진 긴 시간이었나 보다. 싸움을 끝내고, 두 손을 마주잡고, 눈물의 폭우를 이루고, 화해의 포옹을 나누는 기승전결의 갈등과 화해가 책장을 넘기는 내내 마음을 출렁인다.
성지순례는 전남 영광(원불교)을 찍고 인도(불교) 영국(성공회) 이스라엘(그리스도교)을 거쳐 이탈리아(가톨릭)로 이어지는 대여정이었다. “독선과 아집과 편견을 넘어 종교의 울도 넘어 한국 여성 수도자의 이름으로 세계 종교의 성지를 순례하면서 그 모든 가르침이 평화임을 가슴에 거듭 새기며 실천하기를 기원하나이다.” 오랜 기다림 끝에 성사된 설렘은 얼마안가 다름에서 오는 갈등과 번민으로 번졌다. 첫날 평화의 기도는 아주 자그만 교리의 차이에서부터 삐걱거렸다.
“이 김치는 오신채가 들지 않은 김치에요.” 스님의 그 말 한마디에 그만 교무님이 내놓은 보통김치에는 스님의 젓가락이 오지 않았다. 김치마저 편이 갈렸다. 메스꺼운 속을 달래려는 배려로 내놓은 젓갈을 두고도 “부처님 성지를 순례하면서 꼭 그런 음식을 가져와야겠어요?”라 해서 무거운 침묵. 캔터베리 대성당에선 일촉즉발의 위기까지 갔다. 스님과 교무님에게 배정된 기도문 문구 때문에 소동이 났다. “하느님이 창조하신 세계의 기쁨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절대자가 없는 불교를 믿는 스님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날 밤 스님들은 “수녀님들이 부처님 탑 앞에서 고개를 돌렸을 때 모욕감에 눈물이 났다”며 서운함을 쏟아냈다. 자기만의 성소가 상대방에겐 성벽이 된 것이다.
답답함을 느끼던 ‘삼식이’는 이들을 여정에 없던 델리의 찬드니초크와 영국의 퀘이커 우드브룩 공동체로 안내했다. 찬드니초크는 다양한 성지가 공존하는 종교 박물관이고 퀘이커교는 유일신 신앙을 버리고 모든 사람의 내면에서 신성한 진리를 보는, “상대에게서 진리와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삼소회가 가려는 길이기도 했다.” 힌두사원에서 ‘삼소’의 기적은 일어났다. 유일신 신앙의 수녀님이 이마에 ‘제3의 눈’인 빨간 점을 붙이고 나온 것이다. “난 완전히 잘렸어”란 익살에 큰 웃음이 터진 ‘3인’, 경계가 무너졌다.
그렇게 종교의 옹벽은 조금씩 무너져 내렸다. 다른 머리모양을 하고 다른 옷을 입고 있어도 똑같은 ‘좁은 문’을 선택한 수도자들 아닌가. 누구보다 상대종교를 이해하려 노력해온 삼소회원이 아닌가. “우리 함께 골고다를 넘읍시다.” 겟세마네 동산에서는 마침내 상대가 사라졌다. 십자가를 진 스님, 눈물을 떨구는 수녀님이 하나가 됐다. 순례의 마지막 장면은 “용서는 상대가 아니라 바로 자신에 대한 자선”임을 깨닫는 포옹.
아기자기한 삼소회 이야기의 거풀을 벗기면 종교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내면에서 퍼올린 깊은 사색이 주는 감동이 우릿하다. 입은 웃게 눈은 울게 하는 지은이의 내공이 아닐 수 없다.
권귀순 기자 gskwon@hani.co.kr
세계성지순례의 마지막 여정지인 로마에 도착한 수녀님과 스님이 어깨동무를 한 채 활짝 웃고 있다. 19일간의 내면의 몸살을 떨쳐버린듯 뒤따라오는 교무님과 수녀님의 표정도 가볍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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