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김훈씨가 29일 경기도 광주시 중부면 산성리 남한산성의 남문 앞에서 인조가 청나라 군에 쫓겨 산성으로 들어 올 때 다급했던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광주/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이 문은 남한산성의 문들 가운데 가장 슬프고 비통한 문입니다. 송파에서 가장 가까운 문이 바로 이 서문이죠. 병자호란 때 인조 임금은 가까운 서문을 두고 그 바쁜 와중에도 성남 쪽으로 돌아서 남문을 통해 성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그것은 남문이 남한산성의 정문이자 가장 큰 문이었기 때문이죠. 그것이 임금의 위엄이었습니다. 그러나 병자호란을 마감할 때 청 황제는 임금이 남문으로 나오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서문은 너무 낮아서 말을 타고는 나올 수가 없었어요. 임금과 소현세자는 말에서 내려 문을 통과한 다음, 가파른 비탈길을 걸어서 평지까지 내려갔고, 삼전도에서 항복했습니다.”

“힘들 때마다 이곳에 와서 삶의 힘 얻어” 29일 낮 경기도 남한산성 서문 앞. 소설 〈남한산성〉의 작가 김훈(59)씨가 70여명의 독자들에게 병자호란 당시의 상황을 설명하고 있었다. 출판사 학고재와 인터넷 서점 ‘예스24’ 등이 함께 마련한 ‘작가 김훈과 함께하는 남한산성 답사’ 행사였다. 소설은 이날로 10만부를 넘게 팔린 상태다.
이날 아침 9시 버스 두 대로 서울에서 출발한 일행은 남한산성에 오는 길에 우선 삼전도비를 들렀다. 누군가 몰래 페인트 칠을 해 놓은 것을 지우느라 보수 작업 중인 삼전도비를 둘러보며 김훈씨는 “이곳은 민족의 치욕을 만세에 기록해 놓은 곳이지만, 이 비석을 세우지 않았으면 조선 조정과 백성들은 살아나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일행은 먼저 남문에 도착해 작가 김씨의 설명을 들은 다음 산성 마을의 중심지인 종로를 거쳐 숭렬전과 수어장대를 지나 서문에서 점심을 먹었다. 작가는 자전거 타기로 단련된 건각을 자랑하듯 성벽에 이르는 산길을 앞장서서 재게 올랐다. 서문 근처의 성벽에서 그는 성벽과 성첩의 구조, 총안의 모양 등이 어떻게 전투 효과를 높이도록 만들어졌는지를 세세하게 설명하면서 “비록 전쟁에서 이기지는 못했지만, 남한산성은 매우 견고하게 잘 쌓은 성”이라고 말했다. “임금은 감당할 것을 다 감당하면서 삶의 길을 열어나간 것입니다. 아무리 치욕스럽고 고통스럽더라도 인간의 삶은 영원한 것이죠. 저는 힘들고 고통스러울 때마다 여기 와서 성벽의 돌덩이를 만져 봅니다. 그러면 삶의 경건성이 느껴지면서 다시 살아갈 힘을 얻곤 합니다.” 인조 임금의 피난 조정이 자리잡았던 행궁에서는 주최 쪽이 준비한 ‘깜짝 공연’이 벌어졌다. 인조 임금과 주전파의 대표자 김상헌, 주화파인 최명길, 그리고 청의 통역 정명수와 가공의 인물인 대장장이 서날쇠, 사공의 딸 나루 등 소설 속 주요 인물들이 나와 각자의 처지에서 상황에 대응하는 말의 대결을 펼쳤다. 죽더라도 싸우다가 죽을 것을 주장하는 상헌과 우선은 굴욕스럽더라도 항복할 것을 주장하는 명길의 다툼을 지켜보다가 인조는 괴롭게 결론을 내린다: “짐의 뜻은, 나의 뜻은, 나는, 살고자 한다. 나는 살고자 한다.” 그것으로 논쟁은 일단락되고, 상헌이 쓰러져 통곡하는 사이 명길은 청 황제에게 보낼 항복 문서를 작성한다. 공연이 끝난 뒤에는 소설을 놓고 작가와 독자들 사이의 질의응답이 이어졌다. 소설의 핵심을 30분 정도로 축약해서 보여주는 동안 일행은 숙연한 분위기 속에 자신을 병자호란 당시 상황 속에 놓아 보는 모습이었다. 경기도 산본에서 온 독자 이미례(46)씨는 “〈칼의 노래〉의 경우 이순신 한 사람에게 집중된 소설인 데 비해, 〈남한산성〉은 김상헌과 최명길 양쪽에 같은 비중이 두어지는 작품”이라며 “소설 현장에 와서 직접 작가의 설명을 듣다 보니 새삼스럽게 살아간다는 것이 정말 중요하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고 소감을 말했다. 최재봉 문학전문기자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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