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대인생 50년 안숙선 명창
무대인생 50년 안숙선 명창
영원한 국악인 안숙선(59)씨가 올해로 ‘소리인생 50년’을 맞았다. 이순을 바라보는 나이지만 ‘국악계의 프리마 돈나’라고 할 정도로 대중적인 인기가 높아 나라안팎에서 공연 요청이 많다. 지난 20일 서울 강남구 세곡동 은곡마을 자택으로 그를 찾았다. 그는 중요무형문화재 제23호 가야금 산조 및 병창 예능 보유자이지만 판소리 명창으로 더 알려져 있다.
오척단구의 아담한 체구에 시원한 모시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손님을 맞는다. 정갈하게 쪽진 머리의 단아한 용모는 한점의 흐트러짐이 없다. 하지만 나직나직하면서 차분한 말투가 금세 긴장된 기분을 편안하게 눅인다. 수박을 썰어오고 연신 부채질을 부쳐주는 품이 마치 손자를 맞는 외할머니 같다.
“제가 아홉살 때부터 어른들한테 가야금도 배우고 소리도 배우고 한 것이 벌써 50년이나 되었네요. 그동안 공부를 너무 못했어. 한참 전성기 때는 하루에 10시간 이상씩 매일 소리만 했는데…. 7월쯤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산속에 들어가서 심신을 단련시키고 공부 좀 하려고 해요.”
소리인생 50년을 맞는 소감을 묻자 그는 “제가 여러분들에게 사랑받은 소리꾼이기 때문에 소리를 잘했으면 좋겠다. 저를 아껴주는 많은 분들이 제 소리를 듣고 걱정 근심을 풀게끔 소리를 잘했으면 좋겠어요”라고 운을 뗀다.
그는 1997년부터 이태 전까지 국립창극단 단장과 예술감독을 맡아왔고 전주세계소리축제 위원장으로 있으면서 한해에 서너 차례 국외공연을 비롯해 국내외의 크고 작은 공연에 참가하느라 누구보다도 바쁜 활동을 하고 있다. “거절하지 못하고 쓸데없이 오지랖이 넓어서 여기저기 쫓아다니다보니 소리 공부도 못하고 세월만 자꾸 간다”는 것이 그의 변명이다.
9살 입문 40대에 판소리 다섯마당 완창
김소희 박귀희가 키워낸 ‘국악계 스타’
“사람들 근심 풀리게 소리 더 잘했으면” 1949년 소리의 고장 전라북도 남원의 예인 집안에서 태어난 그에게 국악은 숙명이었다. 대금 산조 인간문화재인 강백천(1898~1982)이 그의 어머니 강복달의 사촌이고, 외삼촌이 작고한 동편제 판소리 인간문화재 강도근(1919~1996)이며, 이모가 신관용(1912~1961)류 가야금산조 경남도 예능보유자인 강순영(80)이다.
그는 아홉살 때부터 이모인 강순영에게 가야금 산조와 병창을 배웠고 명인 주광덕으로부터 소리의 기초를 다졌으며 강도근에게서 <수궁가>와 <흥보가> <적벽가> 등 동편제 소리를 익혔다. “첫날 주광덕 선생님을 뵙고 절을 하니까 따라해 보라고 하셨어. 처음 배운 대목이 <심청가> 중에 심봉사가 아기 심청이 어르는 대목이었다, “둥둥둥 내 딸이야, 천하천지 보배동이, 남전북답을 장만을 한들, 든든키가 너같으랴. 산호진주를 얻었은들, 사랑하기가 너같으랴…. 아유, 옛날 가사가 다 나오네.” ‘녹음기’라는 별명답게 천부적인 기억력과 재능을 타고난데다 ‘풀쐐기’라는 또다른 별명처럼 악발이 근성으로 이미 열살 때부터 전국의 각종 학생명창대회를 휩쓸면서 ‘애기 명창’으로 이름을 떨쳤다. 남원여고를 졸업하고 19살에 상경해 만정 김소희(1917~1995)에게 판소리 <흥보가>와 <춘향가>를 배우면서 본격적인 판소리 수업을 받았다. 박봉술(1922~1989)에게서 <적벽가>를, 정광수(1909~2003)에게서 <수궁가>를, 성우향(75)에게 ‘강산제’ <심청가>를 배우는 등 국창급 명창들의 바디를 고루 익히며 판소리 다섯 바탕을 배워나갔다. 특히 만정 김소희 명창은 그를 자신의 집에서 기거하게 하면서 소리 공부를 시킬 만큼 아꼈다.
지금은 녹음기로 소리를 배우지만 그 때는 소리 선생이 부르는대로 따라 부르면서 수작업으로 소리를 익혔다. “그때는 소리를 몸으로 체험하고 익혀서 공부를 했지. 선생님도 될 때까지 가르쳐주시고, 그렇게 수작업을 하니까 잘 잊어버리지 않아요.” 그 덕분에 1986년 남원춘향제 전국 명창경연대회 대통령상, 이듬해 한국방송(KBS) 국악대상, 1993년에는 대한민국 문화예술상 등을 수상했다. 40대에 이미 명창 반열에 오른 그는 1986년 국립극장 완창 판소리 무대에서 판소리 완창 발표회를 시작하면서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동초제 판소리 인간문화재인 오정숙(72), 박동진(1916~2003)만이 해낸 판소리 다섯 바탕 완창을 차례로 소화해 냈다. 1979년 국립창극단에 입단하면서 타고난 좋은 성음과 뛰어난 연기력으로 일약 창극의 명인으로도 자리잡았다. 또한 향사 박귀희(1921~1993)로부터 가야금 병창을 익혀 1989년 가야금 병창 준인간문화재가 되었고 1997년 49살의 젊은 나이로 중요무형문화재 제23호 가야금 산조 및 병창 예능 보유자로 지정되었다. “김소희 선생님과 박귀희 선생님은 소리만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저를 국악계의 스타를 키워내려고 했던 것같아. 예술로 고급스럽게 승화시키려고 했는지 음악뿐만 아니라 인격, 무대에 섰을 때 예절 등도 가르치셨어요. 거의 어머니 아버지 노릇을 다 하셨어요.” 인터뷰를 하다말고 그가 기자의 손을 이끌고 경기도 성남시에 있는 경기저축은행 분담지점으로 데리고 갔다. 이날 경기저축은행이 안 명창을 위해 마련한 ‘안숙선 뮤지엄’이 문을 열었다고 한다. 10평(33㎡) 규모로 꾸며진 뮤지엄에는 그가 처음 소리를 배울 당시 공부했던 가사집과 부채 등 개인 소장품과 스승인 고 김소희 명창 유품 등 ‘소리 인생 50’년이 담긴 각종 소장품 120여점이 전시되어 있다. 손때 묻은 소장품들을 둘러보는 그에게 50년 소리인생을 걸어오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을 묻자, 86년부터 <적벽가>를 시작으로 판소리 다섯 바탕을 완창한 일을 꼽는다. 그러면서 “이 분야를 앞으로 가려는 소리꾼으로서 교과서를 뗐다는 느낌으로 했다”면서 “어린 나이에 겁없이 소리도 모르면서 했던 것같다”고 멋쩍어했다. 또 1988년 유럽 8개국 12개 도시 순회공연과 1998년 제52회 프랑스 아비뇽페스티벌-한국의 밤 공연도 기억에 새롭다고 한다. 외국인들이 우리 소리를 어떻게 받아들일까? 오페라나 성악처럼 하는 것도 아닌데 두세 시간씩 앉아서 들어줄 수 있을까? 중간에 다 나가버리면 어쩔까? 걱정을 했으나 많은 관객들이 끝까지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을 보고 감동했다고 한다. “그 때 아, 음악이라는 것이 국적을 떠나서도 서로 공감할 수 있는 것이구나, 우리 판소리에 사람이 살면서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것이 들어있구나 하는 것을 느꼈어요. 판소리가 상당한 음악적인 수준을 갖고 있구나, 우리 문화유산들이 현실에 바쁘게 살아가는 사람에게 이득을 주는 것은 아니지만 정신적인 가치관이나 교훈을 담고 있구나 하는 것을 깊이 깨달았지요.” 그는 “그때부터 우리 문화를 대표하는 일을 하고 있다는 긍지와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고 털어놓는다. 그 뒤 2000년대 초반 그를 포함한 5명창이 파리와 뉴욕, 에딘버러 등을 돌며 순회공연을 했으며, 마침내 2003년 11월 판소리가 세계무형유산으로 지정되는데 한몫을 했다는 것에 소리하는 이로서 큰 보람을 느꼈다고 한다. 그는 우리 소리의 매력을 “누구나가 공감하는 것이 소리에 들어있기 때문”이라고 본다. 다시 말해 판소리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정서를 음악으로 표현한 것이다. “한과 사랑, 이별 같은 거. 춘향이가 옥중에서 나와서 이 도령과 만나서 품는 희망, 또 고통에 대한 공감대 등. 그런 것을 한사람의 창자가 많은 등장인물과 상황변화를 오페라처럼 다 하는 것을 외국사람이 보고 듣고 놀라요. 그러면서 판소리에는 품격이 있지.” 그는 1988년 유럽 8개국 순회공연 때의 일화를 들려준다. “겨울철에 스웨덴에서 공연을 하는데 그 사람들이 ‘이것은 언어를 몰라도 음악을 듣고 몸짓만 보아도 아, 저것은 여자가 하는 아름다운 소리인지, 남자가 하는 소리인지, 슬픈 소리인지를 알겠다’고 말하더군요. 우리 소리가 인물에 맞게, 상황에 맞게 음악에 맞게 ‘조’를 잘 표현한 거죠.” 그는 “판소리는 사설과, 음악, 연극 등 3가지 요소로 이뤄져 있는데 아주 예술적으로 잘 만들어진 장르”라면서 “외국에서도 판소리와 비슷한 것이 있다고 하지만 우리 소리처럼 사람의 심리를 잘 표현한 예술장르는 없을 것”이라고 강조한다. 늘 웃음을 잃지 않을 것같은 그도 요즘 “우리 국악계가 어떻게 하면 여건이 나아지고, 우리 소리를 잘 보전하면서 보급할 것인가 고민하고 있다”고 털어놓는다. 2000년부터 한국종합예술학교 전통예술원 성악과 교수로 부임했지만 여러가지 잡무에 쫓겨서 ‘거의 내팽겨쳐 두었던’ 제자들에게 늘 미안하다. “나이가 들수록 제자들이 제가 나은 아이처럼 소중해지더라. 앞으로 우리 소리를 이어갈 사람이기 때문에 소중해지고…. 나도 이제 할머니가 되어가는 조짐인가 봐요.” 그를 아끼는 이웃들이 그의 ‘소리 인생 50년’을 정리하는 무대를 꾸미고 있다. 7월 말께 국립창극단과 한국방송이 ‘소리인생 50년 기념 음악회’를 마련한다. 또 11월 초에는 정동극장이 그에게 처음 가야금과 소리를 가르쳤던 이모 강순영과 가야금 산조 명인인 동생 안옥선(54·중앙대 초빙교수), 자신의 맏딸 최영훈(국립창극단 거문고 연주자) 등 가족, 제자들과 함께 가야금 병창과 판소리, 창극 등 다양한 장르가 아우러진 공연을 준비한다. “끝날은 창극을 할 생각입니다. 토끼를 해볼까, 나이먹은 심청이 해볼까. 아니면 나이든 춘향이를 해볼까 고민하고 있어요.” 이순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젊은 소리꾼’로 남으려는 욕심이 아름답다. 글 정상영 기자 chung@hani.co.kr 사진 김경호 기자 jijae@hani.co.kr, 국립창극단 제공
무대인생 50년 안숙선 명창
9살 입문 40대에 판소리 다섯마당 완창
김소희 박귀희가 키워낸 ‘국악계 스타’
“사람들 근심 풀리게 소리 더 잘했으면” 1949년 소리의 고장 전라북도 남원의 예인 집안에서 태어난 그에게 국악은 숙명이었다. 대금 산조 인간문화재인 강백천(1898~1982)이 그의 어머니 강복달의 사촌이고, 외삼촌이 작고한 동편제 판소리 인간문화재 강도근(1919~1996)이며, 이모가 신관용(1912~1961)류 가야금산조 경남도 예능보유자인 강순영(80)이다.
그는 아홉살 때부터 이모인 강순영에게 가야금 산조와 병창을 배웠고 명인 주광덕으로부터 소리의 기초를 다졌으며 강도근에게서 <수궁가>와 <흥보가> <적벽가> 등 동편제 소리를 익혔다. “첫날 주광덕 선생님을 뵙고 절을 하니까 따라해 보라고 하셨어. 처음 배운 대목이 <심청가> 중에 심봉사가 아기 심청이 어르는 대목이었다, “둥둥둥 내 딸이야, 천하천지 보배동이, 남전북답을 장만을 한들, 든든키가 너같으랴. 산호진주를 얻었은들, 사랑하기가 너같으랴…. 아유, 옛날 가사가 다 나오네.” ‘녹음기’라는 별명답게 천부적인 기억력과 재능을 타고난데다 ‘풀쐐기’라는 또다른 별명처럼 악발이 근성으로 이미 열살 때부터 전국의 각종 학생명창대회를 휩쓸면서 ‘애기 명창’으로 이름을 떨쳤다. 남원여고를 졸업하고 19살에 상경해 만정 김소희(1917~1995)에게 판소리 <흥보가>와 <춘향가>를 배우면서 본격적인 판소리 수업을 받았다. 박봉술(1922~1989)에게서 <적벽가>를, 정광수(1909~2003)에게서 <수궁가>를, 성우향(75)에게 ‘강산제’ <심청가>를 배우는 등 국창급 명창들의 바디를 고루 익히며 판소리 다섯 바탕을 배워나갔다. 특히 만정 김소희 명창은 그를 자신의 집에서 기거하게 하면서 소리 공부를 시킬 만큼 아꼈다.
무대인생 50년 안숙선 명창
지금은 녹음기로 소리를 배우지만 그 때는 소리 선생이 부르는대로 따라 부르면서 수작업으로 소리를 익혔다. “그때는 소리를 몸으로 체험하고 익혀서 공부를 했지. 선생님도 될 때까지 가르쳐주시고, 그렇게 수작업을 하니까 잘 잊어버리지 않아요.” 그 덕분에 1986년 남원춘향제 전국 명창경연대회 대통령상, 이듬해 한국방송(KBS) 국악대상, 1993년에는 대한민국 문화예술상 등을 수상했다. 40대에 이미 명창 반열에 오른 그는 1986년 국립극장 완창 판소리 무대에서 판소리 완창 발표회를 시작하면서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동초제 판소리 인간문화재인 오정숙(72), 박동진(1916~2003)만이 해낸 판소리 다섯 바탕 완창을 차례로 소화해 냈다. 1979년 국립창극단에 입단하면서 타고난 좋은 성음과 뛰어난 연기력으로 일약 창극의 명인으로도 자리잡았다. 또한 향사 박귀희(1921~1993)로부터 가야금 병창을 익혀 1989년 가야금 병창 준인간문화재가 되었고 1997년 49살의 젊은 나이로 중요무형문화재 제23호 가야금 산조 및 병창 예능 보유자로 지정되었다. “김소희 선생님과 박귀희 선생님은 소리만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저를 국악계의 스타를 키워내려고 했던 것같아. 예술로 고급스럽게 승화시키려고 했는지 음악뿐만 아니라 인격, 무대에 섰을 때 예절 등도 가르치셨어요. 거의 어머니 아버지 노릇을 다 하셨어요.” 인터뷰를 하다말고 그가 기자의 손을 이끌고 경기도 성남시에 있는 경기저축은행 분담지점으로 데리고 갔다. 이날 경기저축은행이 안 명창을 위해 마련한 ‘안숙선 뮤지엄’이 문을 열었다고 한다. 10평(33㎡) 규모로 꾸며진 뮤지엄에는 그가 처음 소리를 배울 당시 공부했던 가사집과 부채 등 개인 소장품과 스승인 고 김소희 명창 유품 등 ‘소리 인생 50’년이 담긴 각종 소장품 120여점이 전시되어 있다. 손때 묻은 소장품들을 둘러보는 그에게 50년 소리인생을 걸어오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을 묻자, 86년부터 <적벽가>를 시작으로 판소리 다섯 바탕을 완창한 일을 꼽는다. 그러면서 “이 분야를 앞으로 가려는 소리꾼으로서 교과서를 뗐다는 느낌으로 했다”면서 “어린 나이에 겁없이 소리도 모르면서 했던 것같다”고 멋쩍어했다. 또 1988년 유럽 8개국 12개 도시 순회공연과 1998년 제52회 프랑스 아비뇽페스티벌-한국의 밤 공연도 기억에 새롭다고 한다. 외국인들이 우리 소리를 어떻게 받아들일까? 오페라나 성악처럼 하는 것도 아닌데 두세 시간씩 앉아서 들어줄 수 있을까? 중간에 다 나가버리면 어쩔까? 걱정을 했으나 많은 관객들이 끝까지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을 보고 감동했다고 한다. “그 때 아, 음악이라는 것이 국적을 떠나서도 서로 공감할 수 있는 것이구나, 우리 판소리에 사람이 살면서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것이 들어있구나 하는 것을 느꼈어요. 판소리가 상당한 음악적인 수준을 갖고 있구나, 우리 문화유산들이 현실에 바쁘게 살아가는 사람에게 이득을 주는 것은 아니지만 정신적인 가치관이나 교훈을 담고 있구나 하는 것을 깊이 깨달았지요.” 그는 “그때부터 우리 문화를 대표하는 일을 하고 있다는 긍지와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고 털어놓는다. 그 뒤 2000년대 초반 그를 포함한 5명창이 파리와 뉴욕, 에딘버러 등을 돌며 순회공연을 했으며, 마침내 2003년 11월 판소리가 세계무형유산으로 지정되는데 한몫을 했다는 것에 소리하는 이로서 큰 보람을 느꼈다고 한다. 그는 우리 소리의 매력을 “누구나가 공감하는 것이 소리에 들어있기 때문”이라고 본다. 다시 말해 판소리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정서를 음악으로 표현한 것이다. “한과 사랑, 이별 같은 거. 춘향이가 옥중에서 나와서 이 도령과 만나서 품는 희망, 또 고통에 대한 공감대 등. 그런 것을 한사람의 창자가 많은 등장인물과 상황변화를 오페라처럼 다 하는 것을 외국사람이 보고 듣고 놀라요. 그러면서 판소리에는 품격이 있지.” 그는 1988년 유럽 8개국 순회공연 때의 일화를 들려준다. “겨울철에 스웨덴에서 공연을 하는데 그 사람들이 ‘이것은 언어를 몰라도 음악을 듣고 몸짓만 보아도 아, 저것은 여자가 하는 아름다운 소리인지, 남자가 하는 소리인지, 슬픈 소리인지를 알겠다’고 말하더군요. 우리 소리가 인물에 맞게, 상황에 맞게 음악에 맞게 ‘조’를 잘 표현한 거죠.” 그는 “판소리는 사설과, 음악, 연극 등 3가지 요소로 이뤄져 있는데 아주 예술적으로 잘 만들어진 장르”라면서 “외국에서도 판소리와 비슷한 것이 있다고 하지만 우리 소리처럼 사람의 심리를 잘 표현한 예술장르는 없을 것”이라고 강조한다. 늘 웃음을 잃지 않을 것같은 그도 요즘 “우리 국악계가 어떻게 하면 여건이 나아지고, 우리 소리를 잘 보전하면서 보급할 것인가 고민하고 있다”고 털어놓는다. 2000년부터 한국종합예술학교 전통예술원 성악과 교수로 부임했지만 여러가지 잡무에 쫓겨서 ‘거의 내팽겨쳐 두었던’ 제자들에게 늘 미안하다. “나이가 들수록 제자들이 제가 나은 아이처럼 소중해지더라. 앞으로 우리 소리를 이어갈 사람이기 때문에 소중해지고…. 나도 이제 할머니가 되어가는 조짐인가 봐요.” 그를 아끼는 이웃들이 그의 ‘소리 인생 50년’을 정리하는 무대를 꾸미고 있다. 7월 말께 국립창극단과 한국방송이 ‘소리인생 50년 기념 음악회’를 마련한다. 또 11월 초에는 정동극장이 그에게 처음 가야금과 소리를 가르쳤던 이모 강순영과 가야금 산조 명인인 동생 안옥선(54·중앙대 초빙교수), 자신의 맏딸 최영훈(국립창극단 거문고 연주자) 등 가족, 제자들과 함께 가야금 병창과 판소리, 창극 등 다양한 장르가 아우러진 공연을 준비한다. “끝날은 창극을 할 생각입니다. 토끼를 해볼까, 나이먹은 심청이 해볼까. 아니면 나이든 춘향이를 해볼까 고민하고 있어요.” 이순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젊은 소리꾼’로 남으려는 욕심이 아름답다. 글 정상영 기자 chung@hani.co.kr 사진 김경호 기자 jijae@hani.co.kr, 국립창극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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