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영남씨. 사진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한겨레가 만난 사람]
매일 생일처럼 “나보다 재미있게 산 사람 없을 걸”
최근 수필집서 여성편력 고백…인생 목표는 ‘사랑’
매일 생일처럼 “나보다 재미있게 산 사람 없을 걸”
최근 수필집서 여성편력 고백…인생 목표는 ‘사랑’
“매일을 생일처럼, 찌릿찌릿하게 살자는거지. 난 원없이 살았어. 압록강과 제주 서귀포 사이에서 나보다 더 재미있게, 행복하게 산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고 그래.” 관록있는 인기가수이자 화가 조영남씨는 호쾌하게 내뱉었다.
발 아래 한강을 수직으로 가로지른 영동대교로 차량들이 홍수처럼 밀려들고 있었다. 강 너머에는 성동구의 고층빌딩군과 그 너머 산들이 그림처럼 펼쳐졌다. 청담동 강변 고급빌라 ‘카이룸 2’ 9층의 조씨 자택은 아이맥스 영화관 초대형 스크린처럼 압도적인 3차원 풍경을 배경으로 마치 강물 위에 떠 있는 듯 어질어질했다. “16가구가 사는데, 내 집은 185평짜리로 인터넷에 보니 100억원대로 연예인들 집 중에 가장 비싼 집으로 돼 있더군.”
지난 8일, 환갑을 넘긴 나이에도 또래 답지않게 시대를 분방하게 헤쳐가고 있는 조영남씨를 만나 그가 이제까지도 그랬고 여생의 화두로도 삼고 있는 그만의 ‘자유’와 ‘사랑’ 등에 대해 물어봤다. “아버지는 내가 1944년에 태어났다고 했고 어머니는 그게 45년이라고 했어.” 따라서 62~63살인 조씨는 예의 건조한 캐주얼 차림에 거침없었다. “뭐든 물어보세요.”
19살 고3 딸, 일하는 할머니와 셋이 사는 그 광활한 실내 한쪽 방엔 수백권이 넘는 손때묻은 책들이 꽂혀 있었다. 거실 쪽엔 화투와 태극기, 바둑판을 모티프로 한 큼직한 그림들이 여기저기 늘려 있고 한 가운데에 그랜드 피아노가 버티고 있었다.
왜 하필 화투그림이냐? “화투란 게 일본 그림, 오락물 아니냐. 일본을 그렇게 비판하면서 일본사람보다 더 그걸 즐기니 이런 모순이 어디 있어. 또 학생들이 서양 포커를 하면 아무 말 하지 않고 화투치면 난리잖아. 일종의 이중성 고발이라 할까. 저항감과 반감 같은 것도 있고, 그 색깔과 조형성도 기가 막히잖아. 동양화의 대표야. 화투는 그냥 화투일 뿐이지.” 그런데 정작 화투는 “쳐 본 적이 없다”고 했다. 바둑판은? “화투 그리다가 바둑판을 보니 몬드리안이나 칸딘스키 미술의 원초적 형태 같은 게 보였어. 하지만 바둑과는 상관없어. 그런 머리 복잡해지는 건 싫어. 사람은 태어난 곳에서 왔다갔다 하지. 거기서 못 벗어나. 나는 어릴 때부터 기와, 구들장 보고 자랐는데 우리 것 자꾸 잊어버리니까 문제야. 종교고 뭐고 다 잊어버렸잖아.” 그는 대종교의 나철에 관해 글을 쓴 적도 있다.
최근에 써낸 단행본 <어느 날 사랑이>(한길사)에서 그는 말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오락으로 가장 즐기는 화투를 현대미술화시켜서 화투는 나쁜 것이라는 잘못된 인식을 어느 정도 바로잡았고, <화개장터>라는 노래를 직접 만들고(작사자는 김한길씨) 불러서 경상도와 전라도의 고질적인 지역갈등을 어느정도 해결했다고 믿게 된 나는 거기서 탄력을 받아 이번에는 일본과의 아물지 않은 역사적 갈등까지 해결한다고 독립투사의 폼을 잡고 나서서 일본과 한국이 어쩌구저쩌구 하다가 심봉사 발 헛디디듯 맨홀에 빠져 일년 반을 허우적거린 끝에 간신히 목숨만 건졌다. 맞아죽지만 않은 거다.” 그러니까 2005년 초에 <맞아죽을 각오로 쓴 100년만의 친일선언>을 출간하고 그해 5월 중국과 한국에서 고이즈미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참배와 과거사 관련 발언으로 대규모 항일시위가 번지던 그 험악한 시절에 그가 야스쿠니 신사를 찾고 극우 <산케이신문>에 일본이 독도문제에서 한국보다 한 수 위라고 발언했다는 보도로 진짜 ‘맞아죽을 뻔’했던 것은 나름의 ‘괜찮은’ 의도가 와전되고 오해받은 탓이라는 말이렷다. “지금은, 아, 그때 내가 너무 잘난 척했구나 하는 생각뿐이야.”
그 사건으로 잘 나가던 그는 하루아침에 대중매체에서 완전히 ‘축출’당했고 밤무대 개런티도 뚝 떨어졌다. “헌데, 그게 전화위복이 됐어. 오히려 해방감 속에 완전히 새로운 인생을 찾았어. 그게 인생의 막판 뒤집기가 된거야. 그 기간에 책 2권 냈지, 큰 미술전람회도 열었지. 값진 인생 역경이었다고 할까.” 그는 요즘 다시 문화방송 라디오 프로에 매일 2시간씩 나간다.
그 2권 중 하나가 지난 6월에 나온 <현대인도 못 알아먹는 현대미술>. 대중적 반응은 나쁘지 않으나 몇가지 사실오인과 ‘애국주의적’ 접근방식을 지적하는 신랄한 비판도 있었다.(<서평문화> 2007년 가을호) 서울이 현대미술의 메카가 될 것이라고 했는데? “그 대목 쓸 때 고민 많이 했는데, 아니면 말고 되면 다행이고, 하는 기분으로 그냥 썼어. 나중에 씨킴(김창일·미술수집가이자 화가)이 나와 꼭같은 생각으로 적극 동조했지”라며 슬쩍 넘어갔으나, “중국 일본보다 우리쪽 사고가 더 다양하고 돌출적”이라며 예의 환경차이에 따른 DNA특성론을 또 꺼냈다. 그는 초등학교 시절부터 미술반에 있었고, 김민기가 서울대 미대를 다니며 매일 기타만 튕겨댈 때 음대생인 그는 맨날 그림만 그렸단다. 오로지 독학이었다.
<어느 날 사랑이>에서 그는 첫사랑, 풋사랑부터 결혼(2번)과 이혼(2번), 그리고 바람난 일(2번)까지 뭍 여성과의 사랑의 편력을 공개했다. ‘성격 차이 때문에’ 운운했던 배우 윤여정씨와의 이혼사유는 실은 그가 피운 바람 때문이었다. “예쁜 여자들이 무차별적으로 피어오르는 담배연기 속에 시골집 앞마당 빨래처럼 널려 있었고 카페엘 가도 예쁜 여자들이 바글거렸고 룸살롱엘 가도 온갖 종류의 여자들이 오빠오빠 하며 손짓해댔다.” “조금만 안면 깔면 훨씬 재미있는데. 천년만년 살 것도 아니고.” 노래 실력이 가져다 준 인기와 돈이야말로 그 전천후적 사랑을 위한 물적 토대였다. 그는 “키는 난쟁이 똥자루에 머리통만 가분수로 댑다 크고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납작한 코와 언제 미끄러져 내려올지 모르는 뿔테 안경의 몽타주 소유자”라는 둥 책 도처에서 자신의 외모에 대해 언급하는데, 외모 콤플렉스를 아직도 갖고 있느냐고 물어봤다. “에이-, 그런 거 없어요. 난 원래부터 그런 거 없었어. 외모 갖고 그러는 거 우리가 후진국이어서 그래.” 비록 대중가수로 ‘환속’했지만 그에겐 예닐곱해 미국에 살면서 학위를 받은 신학도로서의 면모가 짙게 남아 있다. “난 예수공부 했지만 천지창조니 삼위일체니 부활, 구원 따위는 나와 아무 상관이 없다. 신의 존재 여부를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단 말인가. 단지 예수가 한 말, 마음을 긍휼히 하라라든가 이웃을 사랑하라라든가 내가 사랑받으려면 남에게 먼저 그렇게 하라라든가 하는 말이 나를 구속에서 풀어준다. 그런데 관심이 있을 뿐이다.” 인생에 목표가 없다고 했는데? “한 가지 있다. 날 굉장히 괴롭히는 건데, 사랑 한번 제대로 해보고 싶어.” 회한 같은 게 있어 보였다. 그게 산전수전 다 겪은 뒤의 기독교적 사랑으로의 회귀냐? “그렇게 생각해주면 고맙고.” 한승동 선임기자 sdhan@hani.co.kr
조영남씨. 사진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어느 날 사랑이>에서 그는 첫사랑, 풋사랑부터 결혼(2번)과 이혼(2번), 그리고 바람난 일(2번)까지 뭍 여성과의 사랑의 편력을 공개했다. ‘성격 차이 때문에’ 운운했던 배우 윤여정씨와의 이혼사유는 실은 그가 피운 바람 때문이었다. “예쁜 여자들이 무차별적으로 피어오르는 담배연기 속에 시골집 앞마당 빨래처럼 널려 있었고 카페엘 가도 예쁜 여자들이 바글거렸고 룸살롱엘 가도 온갖 종류의 여자들이 오빠오빠 하며 손짓해댔다.” “조금만 안면 깔면 훨씬 재미있는데. 천년만년 살 것도 아니고.” 노래 실력이 가져다 준 인기와 돈이야말로 그 전천후적 사랑을 위한 물적 토대였다. 그는 “키는 난쟁이 똥자루에 머리통만 가분수로 댑다 크고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납작한 코와 언제 미끄러져 내려올지 모르는 뿔테 안경의 몽타주 소유자”라는 둥 책 도처에서 자신의 외모에 대해 언급하는데, 외모 콤플렉스를 아직도 갖고 있느냐고 물어봤다. “에이-, 그런 거 없어요. 난 원래부터 그런 거 없었어. 외모 갖고 그러는 거 우리가 후진국이어서 그래.” 비록 대중가수로 ‘환속’했지만 그에겐 예닐곱해 미국에 살면서 학위를 받은 신학도로서의 면모가 짙게 남아 있다. “난 예수공부 했지만 천지창조니 삼위일체니 부활, 구원 따위는 나와 아무 상관이 없다. 신의 존재 여부를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단 말인가. 단지 예수가 한 말, 마음을 긍휼히 하라라든가 이웃을 사랑하라라든가 내가 사랑받으려면 남에게 먼저 그렇게 하라라든가 하는 말이 나를 구속에서 풀어준다. 그런데 관심이 있을 뿐이다.” 인생에 목표가 없다고 했는데? “한 가지 있다. 날 굉장히 괴롭히는 건데, 사랑 한번 제대로 해보고 싶어.” 회한 같은 게 있어 보였다. 그게 산전수전 다 겪은 뒤의 기독교적 사랑으로의 회귀냐? “그렇게 생각해주면 고맙고.” 한승동 선임기자 sd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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