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석의 종횡사해
김지석의 종횡사해
제갈량(181~234)은 207년 자신의 집을 세 차례 찾아온 유비에게 중국을 통일하기 위한 경륜을 밝힌다. 그 유명한 ‘초려대’(또는 융중대)다. ‘초려’는 ‘초가’, ‘대’는 ‘물음에 답한다’는 뜻이며, 융중은 그가 살던 곳의 지명이다. 초려대는 300여자에 불과하지만 ‘출사표’와 함께 제갈량을 대표하는 글로 꼽힌다.
형주와 익주를 확보해 위·오와 더불어 3국 정립의 형세를 만든 뒤 오와 동맹을 맺고 형주와 익주에서 동시에 위를 공격하는 것이 초려대의 핵심 내용이다. 형주는 지금의 후난성과 후베이성을 합친 전략 요충지다. 북쪽으로 위와 접하며, 서쪽 익주(지금의 쓰촨성)에서 동쪽 오로 갈 때는 반드시 형주를 거쳐야 한다. 위는 당시 13개 주 가운데 7개 주, 오는 4개 주를 차지한 상태였다. 제갈량은 남은 2개 주를 기반으로 천하를 얻겠다는 대전략을 세운 것이다.
대전략은 형주와 익주에 촉나라를 세울 때까지만 해도 순조롭게 진행됐으나 곧 난관에 부닥쳤다. 형주를 오에 빼앗기고 유비의 의동생인 관우마저 숨졌기 때문이다. 촉은 이후 형주를 영원히 되찾지 못한다. 그럼에도 제갈량은 대전략을 바꾸지 않고 여러 차례 위를 공격한다. <제갈량 평전>(지훈 펴냄)은 정치인으로서 그의 뛰어난 자질과 역량을 다각적으로 분석한 뒤 시대가 그를 받아들이지 않았음을 지적한다.
제갈량의 실패는 국운이 융성하려면 그에 걸맞은 지역적 기반과 통합 에너지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역사에서 이런 사례를 찾기는 어렵지 않다. 카스티야의 이사벨 공주와 아라곤의 페르난도 왕자가 결혼해 스페인의 부부왕이 된 뒤 15세기 말 완성한 레콩키스타(국토 재회복 운동)가 대표적이다. 700년 이상 이베리아 반도를 점거한 이슬람 세력을 아프리카 북부로 밀어낸 스페인은 그 에너지를 기반으로 단기간에 지구촌 패권국으로 떠오른다. 수십 개의 작은 나라로 쪼개져 있던 독일도 19세기 후반 프로이센 주도로 통일을 이룬 뒤 한 세대 만에 세계 최강국 대열에 올라선다. 미국은 1776년 13개 주가 단일국가를 만든 이후부터 비약적으로 성장하고, 일본의 저력도 16세기 말 통일을 이룬 뒤에야 축적되기 시작한다.
남북한은 제갈량 시대의 익주와 형주, 15세기의 카스티야와 아라곤에 비교될 수 있다. 형주를 잃은 촉이 실패했듯이 분단된 한반도는 세계사의 주역이 되기 어렵다. 출사표는 제갈량이 위 공격을 위한 출정에 앞서 유비의 아들 유선에게 올린 글이다. “지금 천하는 셋으로 나뉘어져 있고 익주는 피폐하오니… 이제 곧 먼 길을 떠나며 표문을 올리니 눈물이 앞을 가려 무슨 말을 더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습니다.” 나라의 기반이 약하므로 오히려 대전략 실행을 서둘러야 한다는 초조감이 묻어난다. 제갈량은 결국 병이 나 전장에서 숨진다.
다행히 우리의 현실은 제갈량 시대의 중국과는 다르다. 카스티야와 아라곤의 평화로운 결합처럼 한반도의 에너지를 통합하는 과정이 이미 시작됐기 때문이다. 이달초 남북 정상회담에서 채택된 ‘남북관계 발전과 평화번영을 위한 선언’은 그런 노력에서 중요한 발판이 될 것이다.
김지석 논설위원 j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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