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석 영산대 교수
김용석의 대중문화로 철학하기 /
가면의 앞과 뒤 OSMU의 전형
<오페라의 유령> 가스통 르루의 소설 <오페라의 유령>(1910년)은 연극·영화·애니메이션·뮤지컬을 통해 대중에게 더 많이 알려졌다. 이른바 ‘단일원천 다중활용(One Source Multi-Use)’된 작품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캐머런 매킨토시가 제작한 뮤지컬은 세계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이 작품의 매력은 무엇일까? 예술 장르 구분 없이, 이 작품의 매력이자 마력은 가면의 비밀에 있다. 가면의 앞과 뒤에 ‘모든’ 것이 있기 때문이다. 소설에서는 주인공 에릭의 파란만장한 삶과 그가 뛰어난 재능으로 만든 비밀의 방, 신비로운 거울, 지하 통로 등이 긴박한 스토리와 함께 독자를 끌고 가지만, 르루의 작품이 영상화되면서 가면의 의미는 더욱 작품의 중심에 자리잡는다. 미와 추의 대비는 매력적인 소재이다. <미녀와 야수>, <노트르담의 꼽추>, <프랑켄슈타인> 등이 그렇다. 하지만 미와 추 사이에서 가면의 효과를 극대화하는 데 성공한 것은 <오페라의 유령>이다. 가면은 감추기 위해서만 있지 않다. 가면은 감춤과 드러냄의 기제이다. 가면은 뒤를 감추지만 앞은 더 확연히 드러낸다. 먼저 가면의 뒤부터 보자. 에릭은 가면의 뒤에 인간의 급소를 감추고 있다. 명자리란 드러나기만 하면 치명적인 타격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에릭의 존재에서 가장 중요한 곳이다. 다만 절대 부정적으로 중요하다는 것이 그의 비극이다. 에릭은 비상한 머리와 뛰어난 재주 그리고 강한 의지와 탁월한 감수성을 지녔다. 그는 음악 천사처럼 웅장하고도 감미로운 목소리를 지닌 천재 음악가이자 전설의 마법왕도 감탄할 마술사이다. 또한 요정의 나라 같은 도시를 건설할 정도의 건축가이자 발명가이며 누구의 목소리도 흉내낼 수 있는 복화술사이다. 하지만 그는 자신을 낳은 어머니조차 아들의 얼굴을 보지 않으려고 가장 먼저 가면을 선물로 주었을 정도로 흉측한 얼굴을 지녔다. 르루의 소설 마지막 장도 이렇게 맺는다. “그는 너무나 흉측하게 생겼다. 그래서 아예 자신의 재능을 감추거나 그것을 가지고 장난을 칠 수밖에 없었다. 만일 보통얼굴을 지녔더라면 인간들 중에서 가장 고결한 사람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제국을 지배할 만한 배포를 가지고 있었지만 결국 지하의 밀실에 만족해야만 했다. … 신께서는 어찌하여 그처럼 흉측한 인간을 만드셨나이까?”
인간은 아주 작은 ‘손상’에도 자기 존재 자체가 모두 부정될 수 있다. 이것은 바로 ‘가면의 뒤’가 우리에게 던지는 철학적 주제이다. 이것은 모든 사람들이 부정하고 싶어하지만 그러지 못하는 것이다. 동서고금의 현자들이 그렇지 않다고 가르치려 했지만, 현실이 부정한 것이다. 깨지기 쉬운 유리잔, 아니 쉽게 부스러지는 박하사탕 같은 것이 인생인지 모른다. 파스칼은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라고 했다. 인간은 자연에서 가장 연약한 갈대이지만, 생각하기 때문에 우주보다 더 고귀하다고 했다. 당연히 그의 방점은 ‘생각’에 있었다. 하지만 좀 짓궂게 ‘갈대’에 방점을 찍는다면, 인간은 작은 손상에도 한 순간에 사라질 수 있는 존재이다. 저 넓은 우주를 사유하고 거센 바람에 유연하게 춤출 수 있는 갈대라고 할지라도 명자리에 손상을 입으면 단박에 사라질 수 있다. 이것은 비관주의적 관점이 아니다. 무엇이 진정 인간 존재의 급소가 될 수 있는지 인지하고 배려하려는 심오한 비극적 의식이다. 이제 가면의 앞을 보자. 에릭의 가면은 ‘노골적으로 위장된’ 아킬레스 힘줄이다. 아킬레스의 급소는 발뒤꿈치에 있다. 일상적 삶에서 노출되지 않는 부분이다. 아킬레스는 그것을 굳이 감추지 않아도 된다. 아니 그래야만 비밀이 노출되지 않는다. 그러나 에릭은 전면에 노출된 손상을 가면으로 가리지 않으면 안 된다. 바로 ‘괴물’이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곧 만인의 ‘적’이 되어버린다. 그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존재할 수 없다. 그러므로 자신의 급소를 가면으로 ‘드러낼’ 수밖에 없다. 그것은 겉으로 드러낸 치명적 힘줄이다. 그러면서 비참함을 당당함으로 위장한다. 가면은 급소를 무기로 위장하는 기제이다. 또한 표식을 암호로, 분명한 사실을 매혹적인 신비로 바꾸어버린다. 그럼으로써 그것은 상징적 힘이 된다. 그 힘이 에릭을 지탱한다. <오페라의 유령>을 다양하게 재생산하면서 제작자들이 가면을 표현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음은 그 변천사를 보아도 알 수 있다. 1925년 무성영화로 만들어질 때 가면은 머리와 얼굴 전체를 가리던 것이, 점점 작아져 최근의 뮤지컬에서는 얼굴의 한쪽 눈 부위만 가린다는 사실은 흥미롭다. ‘작은 손상’의 의미가 극대화한 것이다. 이 상징을 통해 인간 존재가 품고 있는 모순의 극치가 드러난다. 에릭은 그 모순의 슬픈 곡예사이다. 모순의 곡예는 예술적 표현 방식에서도 기막힌 효과를 낸다. 뮤지컬은 에릭의 비극이 드러내는 시각의 비참함을 청각의 장엄함으로 장식하기 때문이다. 김용석 영산대 교수, anemos@ysu.ac.kr
<오페라의 유령> 가스통 르루의 소설 <오페라의 유령>(1910년)은 연극·영화·애니메이션·뮤지컬을 통해 대중에게 더 많이 알려졌다. 이른바 ‘단일원천 다중활용(One Source Multi-Use)’된 작품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캐머런 매킨토시가 제작한 뮤지컬은 세계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이 작품의 매력은 무엇일까? 예술 장르 구분 없이, 이 작품의 매력이자 마력은 가면의 비밀에 있다. 가면의 앞과 뒤에 ‘모든’ 것이 있기 때문이다. 소설에서는 주인공 에릭의 파란만장한 삶과 그가 뛰어난 재능으로 만든 비밀의 방, 신비로운 거울, 지하 통로 등이 긴박한 스토리와 함께 독자를 끌고 가지만, 르루의 작품이 영상화되면서 가면의 의미는 더욱 작품의 중심에 자리잡는다. 미와 추의 대비는 매력적인 소재이다. <미녀와 야수>, <노트르담의 꼽추>, <프랑켄슈타인> 등이 그렇다. 하지만 미와 추 사이에서 가면의 효과를 극대화하는 데 성공한 것은 <오페라의 유령>이다. 가면은 감추기 위해서만 있지 않다. 가면은 감춤과 드러냄의 기제이다. 가면은 뒤를 감추지만 앞은 더 확연히 드러낸다. 먼저 가면의 뒤부터 보자. 에릭은 가면의 뒤에 인간의 급소를 감추고 있다. 명자리란 드러나기만 하면 치명적인 타격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에릭의 존재에서 가장 중요한 곳이다. 다만 절대 부정적으로 중요하다는 것이 그의 비극이다. 에릭은 비상한 머리와 뛰어난 재주 그리고 강한 의지와 탁월한 감수성을 지녔다. 그는 음악 천사처럼 웅장하고도 감미로운 목소리를 지닌 천재 음악가이자 전설의 마법왕도 감탄할 마술사이다. 또한 요정의 나라 같은 도시를 건설할 정도의 건축가이자 발명가이며 누구의 목소리도 흉내낼 수 있는 복화술사이다. 하지만 그는 자신을 낳은 어머니조차 아들의 얼굴을 보지 않으려고 가장 먼저 가면을 선물로 주었을 정도로 흉측한 얼굴을 지녔다. 르루의 소설 마지막 장도 이렇게 맺는다. “그는 너무나 흉측하게 생겼다. 그래서 아예 자신의 재능을 감추거나 그것을 가지고 장난을 칠 수밖에 없었다. 만일 보통얼굴을 지녔더라면 인간들 중에서 가장 고결한 사람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제국을 지배할 만한 배포를 가지고 있었지만 결국 지하의 밀실에 만족해야만 했다. … 신께서는 어찌하여 그처럼 흉측한 인간을 만드셨나이까?”
인간은 아주 작은 ‘손상’에도 자기 존재 자체가 모두 부정될 수 있다. 이것은 바로 ‘가면의 뒤’가 우리에게 던지는 철학적 주제이다. 이것은 모든 사람들이 부정하고 싶어하지만 그러지 못하는 것이다. 동서고금의 현자들이 그렇지 않다고 가르치려 했지만, 현실이 부정한 것이다. 깨지기 쉬운 유리잔, 아니 쉽게 부스러지는 박하사탕 같은 것이 인생인지 모른다. 파스칼은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라고 했다. 인간은 자연에서 가장 연약한 갈대이지만, 생각하기 때문에 우주보다 더 고귀하다고 했다. 당연히 그의 방점은 ‘생각’에 있었다. 하지만 좀 짓궂게 ‘갈대’에 방점을 찍는다면, 인간은 작은 손상에도 한 순간에 사라질 수 있는 존재이다. 저 넓은 우주를 사유하고 거센 바람에 유연하게 춤출 수 있는 갈대라고 할지라도 명자리에 손상을 입으면 단박에 사라질 수 있다. 이것은 비관주의적 관점이 아니다. 무엇이 진정 인간 존재의 급소가 될 수 있는지 인지하고 배려하려는 심오한 비극적 의식이다. 이제 가면의 앞을 보자. 에릭의 가면은 ‘노골적으로 위장된’ 아킬레스 힘줄이다. 아킬레스의 급소는 발뒤꿈치에 있다. 일상적 삶에서 노출되지 않는 부분이다. 아킬레스는 그것을 굳이 감추지 않아도 된다. 아니 그래야만 비밀이 노출되지 않는다. 그러나 에릭은 전면에 노출된 손상을 가면으로 가리지 않으면 안 된다. 바로 ‘괴물’이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곧 만인의 ‘적’이 되어버린다. 그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존재할 수 없다. 그러므로 자신의 급소를 가면으로 ‘드러낼’ 수밖에 없다. 그것은 겉으로 드러낸 치명적 힘줄이다. 그러면서 비참함을 당당함으로 위장한다. 가면은 급소를 무기로 위장하는 기제이다. 또한 표식을 암호로, 분명한 사실을 매혹적인 신비로 바꾸어버린다. 그럼으로써 그것은 상징적 힘이 된다. 그 힘이 에릭을 지탱한다. <오페라의 유령>을 다양하게 재생산하면서 제작자들이 가면을 표현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음은 그 변천사를 보아도 알 수 있다. 1925년 무성영화로 만들어질 때 가면은 머리와 얼굴 전체를 가리던 것이, 점점 작아져 최근의 뮤지컬에서는 얼굴의 한쪽 눈 부위만 가린다는 사실은 흥미롭다. ‘작은 손상’의 의미가 극대화한 것이다. 이 상징을 통해 인간 존재가 품고 있는 모순의 극치가 드러난다. 에릭은 그 모순의 슬픈 곡예사이다. 모순의 곡예는 예술적 표현 방식에서도 기막힌 효과를 낸다. 뮤지컬은 에릭의 비극이 드러내는 시각의 비참함을 청각의 장엄함으로 장식하기 때문이다. 김용석 영산대 교수, anemos@ys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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