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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문화일반

[이사람] “아름다운 음악은 이념의 벽도 뚫을 수 있죠”

등록 2007-11-19 18:50

국립오페라단 정은숙 단장
국립오페라단 정은숙 단장
‘통일운동 무대의 영원한 프리마돈나’ 국립오페라단 정은숙 단장
‘오페라+통일운동’, 서구 자본주의 문화를 대표하는 종합예술과 북한은 선뜻 교집합을 찾기 힘든 결합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프리마돈나 출신으로 국립오페라단을 6년째 이끌고 있는 정은숙(61·?5s사진) 단장에게 그 둘은 운명처럼 하나를 향해 뻗어가고 있는 삶의 두 궤적이다.

“오페라란 예술이 있는 줄로 모른체 그저 노래가 좋고 음악이 좋아 성악가가 됐듯이, 통일운동 역시 이념이나 정치적 노선을 떠나 노래를 통해 자연스럽게 인연을 맺었어요.”

그가 말하는 ‘인연’은 지금도 ‘가장 이상적인 예술가 부부’로 꼽히는 작곡가이자 연출가 고 문호근 선생과의 만남에서 비롯됐다. 1970년 김자경오페라단의 <아이다> 오디션에 합격해 오페라 무대에 데뷔한 그는, 당시 그 작품의 조연출을 맡고 있던 호근씨를 만나 5년 연애 끝에 결혼했다. 이후 2000년 데뷔 30돌 기념 독창회를 하기까지 줄곧 국립오페라단의 프리마돈나로서 ‘최다 출연’ 기록을 세울만큼 활약했으니 그의 음악 인생은 그지없이 화려한 셈이다. 하지만 ‘통일운동의 거목’ 늦봄 문익환 목사의 맏며느리가 된 순간부터 그는 남모를 ‘인고의 세월’을 겪어야 했다.

30년간 오페라단 ‘최다 주역 출연’ 기록
문익환 목사 맏며느리로 ‘첫 민중 성악가’
남편 유업 ‘오페라 대중화’ 강한 열정
“쓰러질 때까지 합창단과 함께 평화 노래”

“결혼하기 1년 전 남편은 이미 영국 정부로부터 장학금을 따놓았지만 반체제 인사로 찍혀 있던 숙부님(문동환 목사)과 연좌제로 묶여 떠날 수가 없었죠.” 80년 4월 ‘서울의 봄’이 와 “극적으로” 비자가 나와 영국 로열오페라단으로 연수를 간 부부는 ‘5·18’ 이후 귀국길이 막혀 “어쩔 수 없이” 독일 뮌헨과 이탈리아 씨에나 등에서 ‘망명 유학생’으로 떠돌아야 했다. “그 4년간 3개국어를 배우느라 울기도 많이 울었지만, 뜻하지 않게 예술CEO 임무를 맡고 보니 ‘남편이 위로한대로’ 매우 유용한 자산이 됐어요.”

89년 3월 시아버지 문 목사의 ‘전격적인 방북’은 분단에서 통일로 현대사의 물꼬를 튼 사건이자 그가 ‘운동권 노래를 부르는 최초의 성악가’로 거침없이 발을 내딛은 전기가 됐다. 8·15 행사, 양심수의 밤같은 90년대들어 활화산처럼 분출한 통일운동의 현장에서 그는 노래로, 남편은 연출가로 늘 함께 하는 ‘동지’였다. “성악가라 하면 통제를 덜 받아서 차에 먹을거리를 가득 싣고 봉쇄된 집회장으로 나르는 임무도 내 몫이었다”고 그는 그 엄혹했던 시절을 회고했다.


이런 남다른 이력은 2001년 “여자로서 아껴주고 예술가로 존중해주었던” 남편과의 갑작스런 사별의 아픔을 딛고, 이듬해 공모제를 통한 국립오페라단의 첫 여성 단장이자 예술감독으로 뽑힌 그에게 놀라운 추진력을 발휘하는 원천이 됐다. 그는 지금 ‘오페라 대중화와 국립오페라단의 수준을 세계적으로 끌어올렸다’는 평과 함께 ‘역대 첫 3연임 단장’에 도전중이다. 상근단원제, 전속 합창단, 무대용품 전용보관소, 전용 연습실 등 오페라계의 60년 묵은 숙원들을 풀어온 그가 “마지막 과제인 전용극장 설립을 위해” 또한번 ‘용기’를 낸 것이다.

통일운동 역시 그가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꿈”이다. “좋은 예술은 이념과 체제의 벽을 넘어 공감을 끌어낸다고 믿기 때문”이다. 단장으로 바쁜 와중에도 ‘통일’ 행사에서는 늘 축가를 불러온 그는 “이제 각 장르마다 최고 수준의 공연을 소개해 남북 교류의 질을 한차원 높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지난 14일 열린 ‘남북화합과 북한 수해돕기-평화기원 뮤직포원 갈라콘서트’를 후원하고, 오는 27일 ‘2007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 후원의 밤’ 공연(오후 6시30분 한전 남서울전력관리처 강당)을 하는 한겨레 평화의나무 합창단의 초대 단장을 기꺼이 맡은 이유이기도 하다.

운동판에서 ‘바우’로 불리던, 대학시절 연극 실습에서 삼촌 문성근씨를 빼닮은 연기로 웃음짓게 했던 외아들 용민(29)씨도 조만간 프랑스로 작곡 유학에 올라 “예술을 통한 통일운동의 유전자”를 잇게 됐다.

“슬픔이나 음모까지도 아름다운 노래로 승화시키는 것이 오페라의 최고 매력”이라는 그는 ‘합창단과 함께 연습도 하고 공연도 하며 무대에서 쓰러질 때까지 노래를 하고 싶다’는 성악가로서 마지막 꿈도 감추지 않았다.

글·사진 김경애 기자 ccandor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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