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석의 종횡사해
김지석의 종횡사해 /
얼마 전 방한한 독일 사회학자 울리히 벡은 적극적인 세계주의(Cosmopolitanism) 주창자다. 그의 세계주의는 지구촌 주민들이 문화·사고방식·역사·목표·진로 등에서 다르다는 사실을 충분히 인식하고 받아들인다는 점에서 세계화나 보편주의(Universalism)와 구별된다. 또 국제주의(Internationalism)와는 주체 측면에서 차이가 있다. 국가가 중심이 돼 이해관계 조화를 꾀하는 국제주의와 달리 세계주의는 사고 기반을 세계시민(Cosmopolitan)에 둔다.
세계주의 운동은 근대 이래 몇 차례 있었다. 첫 물결을 상징하는 이는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1724~1804)다. 18세기 유럽에서 여러 전쟁과 혁명을 목격한 그는 세계시민사회가 성장해야 평화가 이뤄진다고 믿었다. 하지만 그의 소망과 달리 국민국가의 위력은 이후 더욱 강해졌다. 20세기 초·중반의 두번째 물결은 1·2차 대전을 배경으로 한다. 많은 이들은 국가의 한계를 극복하지 않는 한 참극이 되풀이될 수밖에 없다고 봤다. 그런 노력 중 하나가 유엔 창설이다.
국가 중심 질서를 넘어서야 한다는 세계주의 문제의식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다만 논의 초점이 상당히 바뀌었다. 평화는 여전히 중요하지만 지구온난화 등 환경문제, 세계적 빈부격차, 인권 등 초국가적 문제들이 주요 관심사가 됐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1879~1955)은 두 번째 물결의 한가운데에 있었다. 그에 관한 최고 전기로 꼽히는 <아인슈타인-삶과 우주>(까치 펴냄)는 그의 삶이 천재 과학자와 일관된 세계주의자라는 두 축으로 이뤄져 있음을 보여준다. 과학자로서 뛰어난 업적은 그의 세계주의 활동을 뒷받침했고, 그의 세계주의 성향은 과학적 창의성에 크게 기여했다.
세계주의자로서 그의 삶은 실패의 연속이었다. 2차대전 이전 독일에서 역적으로 몰린 데 이어, 냉전기 미국에선 자신을 받아준 사회의 고마움을 모르는 회색분자로 찍혔다. 그는 “군비경쟁이 계속되는 한 어느 나라에서 그런 경쟁을 중단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믿었다. 그래서 세계정부 등의 해결책을 추구하는 것이 더 현실적이라고 봤지만, 그의 구상은 많은 이에게 ‘세상물정 모르는 과학자의 순진한 생각’으로 받아들여졌다.
세계화와 대테러 전쟁 시대인 지금의 세계주의는 그때보다 유리한 조건에 있다. 그린피스와 엠네스티 인터내셔널 같은 국제 비정부기구들이 자리잡고 있고, 다름에 대한 포용력도 커졌다. 또한 9·11테러와 이라크전,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심각한 부작용 등은 세계주의가 극복해야 할 대상이 뭔지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다름을 무시하는 단일 세계질서는 기껏해야 패권주의의 산물일 뿐이다.
국가와 세계주의는 역사의 쌍생아다. 세계주의는 국가 중심 질서의 모순에 맞서면서 그 대체물을 만들어낸다. 아인슈타인은 핵무기 통제 노력의 실패가 분명해지자 이렇게 말했다. “3차대전이 어떻게 진행될지는 모르겠지만 4차대전에서 무엇을 사용하게 될 것인지는 말해줄 수 있다. 돌이다.” 그가 숨진 지 쉰세 돌(18일)이 지났지만, 세계주의자로서 그의 꿈은 여전히 살아 있다. 김지석 논설위원 jkim@hani.co.kr
국가와 세계주의는 역사의 쌍생아다. 세계주의는 국가 중심 질서의 모순에 맞서면서 그 대체물을 만들어낸다. 아인슈타인은 핵무기 통제 노력의 실패가 분명해지자 이렇게 말했다. “3차대전이 어떻게 진행될지는 모르겠지만 4차대전에서 무엇을 사용하게 될 것인지는 말해줄 수 있다. 돌이다.” 그가 숨진 지 쉰세 돌(18일)이 지났지만, 세계주의자로서 그의 꿈은 여전히 살아 있다. 김지석 논설위원 j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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