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학자 수전 로메인
언어학자 수전 로메인
영어 몰입교육에 찬성하는 언어 다양성 옹호론자가 있다. 21일부터 고려대 인촌기념관에서 열리고 있는 세계언어학자대회에 참가한 수전 로메인 영국 옥스퍼드대 석좌교수다. 그는 얼핏 보기엔 서로 배치되는 두 가치, 즉 더 많은 외국어 습득과 강력한 모국어 보호를 동시에 추구한다.
언어 다양성 분야의 세계적 권위자인 그는 22일 오전 인촌기념관에서 열린 기자 간담회에서 “언어 습득의 효율성 면에서 ‘몰입교육’이 가장 효과적”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소수 언어의 권리가 침해받는 것은 심각한 문제이며, 영어의 세계적 확산에 맞서 자국어의 사용과 보호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말했다. 영어가 지배하는 세계가 아니라 다양한 언어가 공존하는 세계를 위해 외국어를 배우는 일과 모국어를 지키는 일이 모두 중요하다는 것이다.
한국의 영어 몰입교육 논란에 대해 로메인 교수는 “한국만이 아니라 유럽을 비롯한 모든 나라의 문제”라고 운을 뗐다. “영어 학습 능률을 높이는 데 몰입교육이 효과적인 것은 맞다. 문제는 자국어가 위험에 처하는 것이다.” 그가 제시하는 해법은 모국어를 사용하는 ‘공동체’의 유지다. “공동체의 보존 없이 그 언어를 지킬 수는 없다. 호랑이를 동물원에 가두는 것은 진정한 보존이 아니듯이, 학교에서 자국어를 가르치는 것만으로는 언어를 보존할 수 없다. 공동체 전체에 걸쳐 일상적이고 지속적으로 자국어가 널리 사용되게 해야 한다. 당신들이 쓰는 언어를 ‘강화’해야 한다.”
언어 다양성을 옹호하는 학자로서 그는 ‘영어 패권’에 비판적이었다. “학문 용어가 영어로 통일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다양한 언어를 통해 더 많은 지식을 습득할 수 있다. 세계의 수많은 생물종 가운데 영어로 표현되는 것은 10~15% 정도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제3세계 사람들이 영어를 익히려 하는 이유에 대해 그는 “권력 차원의 문제가 있다”고 분석했다. “외국어를 배우지 않으면 경제적으로 불공평한 상황에 처하게 되니까 영어를 공부하게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런 점에서 “(당분간) 영어의 세계적 확산 자체를 막을 수는 없다”고 내다봤다. 다만 그는 “영어의 확산으로 한국어가 사라질 것이라고 지나치게 두려워하기보다는 문화적 정체성 유지에 각별한 관심을 쏟으면서 자신들이 사용하는 언어를 강화하면 된다”고 해법을 제시했다.
로메인 교수는 유네스코 전문위원 시절, 소수민족 언어의 권리를 보존하기 위한 유엔헌장 공포에 기여하는 등 이 분야의 이론과 실천에서 꾸준한 업적을 쌓아왔다. 2003년 번역 출간된 그의 저서 <사라져가는 목소리들>(이제이북스)은 적지 않은 관심을 모았다. 언어 다양성 차원에서 모국어와 외국어의 ‘평화로운 공존’을 주창하는 그의 특별강연은 24일 오후 2시 인촌기념관에서 들을 수 있다.
글 안수찬 기자 ahn@hani.co.kr, 사진 이종근 기자 root2@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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