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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문화일반

58년전 ‘시인의 집’서 울다

등록 2008-08-14 18:26수정 2008-08-14 23:54

시인의 둘째 아들 충희(74·전 흥국공업 대표)
시인의 둘째 아들 충희(74·전 흥국공업 대표)
이상화 시인 고택 복원…차남 이충희씨 ‘감격방문’
일제 강점기 나라 잃은 설움을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란 시로 표현한 이상화(1901~1943) 시인의 둘째 아들 충희(74·전 흥국공업 대표·사진)씨는 “요즘 아버님이 자꾸 그립다”고 했다.

지난 12일 저녁 대구시 중구 계산동 이상화 고택을 찾은 이씨는 “11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이 집에서 7년을 더 살고 이사를 갔다”며 “1950년 이사를 했으므로 58년 만에 옛집을 찾은 셈”이라고 했다.

이 집은 상화 선생이 4년간 만년을 보낸 곳으로 대구시가 옛 모습대로 복원했다. 그는 “담장이나 집안을 꾸민 자재 등은 약간 다르지만 그때 모습이 되살아난다”며 회상에 젖었다. 205㎡ 규모의 집안에 서있는 석류나무와 감나무는 아직도 잎이 무성하게 잘 자라고 있지만, 집안에 있던 우물은 몇 차례 집주인이 바뀌면서 사라졌다.

상화 선생이 돌아가신 안방을 둘러보던 그는 눈시울을 붉혔다. 상화 선생은 이 방에서 1943년 4월25일 오전 8시45분 할머니, 부인, 세 아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운명했다. 상화는 마지막 순간 “살아서 다시 돌아올 테니 걱정하지 마라”는 유언을 남기며 가족들을 안심시켰다고 한다.

상화고택은 애초 도시계획으로 헐릴 위기에 놓였지만 1999년부터 시작된 시민운동에 힘입어 보존됐다. 이씨는 “아버지가 수입이 없어서 생활형편이 빠듯했다”며 “아버지가 할머니에게 효성이 지극했고, 자식들에게는 자상했고 인자했다”고 회상했다.

상화 선생의 집을 일제가 자주 가택수색을 하는 바람에 유품이 별로 남아 있지 않지만, 이씨는 어렵게 아버지가 남긴 육필 원고 3점과 가족사진 등 10여점을 구해와 대구 시민들에게 공개했다. 이씨는 대구 계산동 고택에서 17살 나던 해 부산으로 옮겨 해양대학을 졸업한 뒤 서울에서 오랫동안 기업가로 활동해왔다.

대구/ 글·사진 구대선 기자 sunny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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