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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문화일반

텅…뚫린 가슴 다시 헤집는 통증

등록 2008-11-25 19:39

심정수 조각전 ‘팬텀 리얼’에는 대부분 10~20년 전 작품들이 나왔다. 그 뒤 작품은 장식처럼 끼어 있다. ‘현실과 발언’ 멤버였던 심씨의 작품은 당대의 고민이 절절히 녹아 있어 지금도 보는 이의 가슴을 후벼 판다.  <가슴 뚫린 사나이>(왼쪽), <청년>(오른쪽)
심정수 조각전 ‘팬텀 리얼’에는 대부분 10~20년 전 작품들이 나왔다. 그 뒤 작품은 장식처럼 끼어 있다. ‘현실과 발언’ 멤버였던 심씨의 작품은 당대의 고민이 절절히 녹아 있어 지금도 보는 이의 가슴을 후벼 판다. <가슴 뚫린 사나이>(왼쪽), <청년>(오른쪽)
심정수 회고전 ‘팬텀 리얼’
기둥 뒤의 소년. 맷자국으로 갑옷처럼 부풀어 오른 가슴. 그는 고개를 틀어 가멸찬 눈초리를 저기 어드메쯤 겨누고 있다. 팔 끝에 덩굴손처럼 말아쥔 두 손. 아귀에 잔뜩 힘이 들었다. 아비, 아니면 언니, 아니면 누나가 끌려간 걸까?

20년 전 만들어진 브론즈 작품 하나가 가슴을 친다. 심정수의 <청년>(제목과 달리 인체 비례로 보아 소년임이 분명하다). 그의 시선 끝에 군부독재 정권, 혹은 군부의 개떼가 있었을 터이지만, 20여 년이 지난 지금, 작품에는 다만 어딘가 향하는 시선만 남아 있다.

‘청년’ 등 1980~90년대 움찔한 인체 조각
당시 치열함 우두커니…밖엔 무심한 걸음

그럼에도 이토록 가슴 한쪽을 저며내는 까닭은 무엇일까. 시선의 끝이 ‘무엇인가’ 내포하기 때문. 20년 전 전경의 방패 너머 뚜렷하던 그것은 이제 ‘세계화’가 되어 유령처럼 떠돈다. 멜라민 파동부터 청년 실업, 비정규직 양산, 거덜나는 농촌에 이르기까지 그 유령은 전방위로 어른거린다. 어디라 돌팔매를 겨눌 수도 없다. 분말 소화기와 물대포가 곤봉과 대검을 대신하지만, 촛불과 물대포의 거리는 그 시절 짱돌과 대검의 그것이나 도찐개찐이다.

<사슬을 끊고>(일부)
<사슬을 끊고>(일부)
소년상이 다시금 가슴을 치는 까닭은 무엇인가?

그 가운데에 불안정이 자리한다. 그때, 소년과 군부 사이에 존재했던, 불안정에서 비롯한 긴장은 옛적 청동기시대 사람들이 이리 떼에 맞닥뜨렸을 때처럼 원초적인 것. 그것은 지금, 관객과 세계화 사이에서 그대로 반복되면서 세계화의 존재를 환기한다.


시절의 불안함은 작가 내부로 들어간 뒤 차원을 바꾸어 순간 정지한 소년상이 되어 있다. 시대의 움직씨는 작가의 어찌씨를 부르고 그것은 브론즈에 움직씨로 전사된 것이다. 작가가 조각을 시라고 표현하는 까닭이 바로 거기에 있다. 고개 틀어 어딘가를 향한 눈, 늘어뜨려 바투 쥔 주먹.

서울 세종로 일민미술관에서 지난 21일 시작한 중견 조각가 심정수씨의 작품전 ‘팬텀 리얼’에는 작가의 1980~90년대 작품들이 전시되고 있다. 그 <청년>뿐이겠는가. 또 한 청년은 닫힌 고리를 부수고 나오려 하지만 아직 철문에 갇혀 있다. 그들이 깃발을 들고 행진하며 바라는 <그날>은 해방과 대동세상. 삼각산이 일어나 춤출 그날이 오면 자신의 가죽을 벗겨 둥둥 북을 메워 쳐도 좋지 않겠는가. 그래서, 또다른 <청년>은 자신의 오른팔을 떼내어 의연하게 움켜쥐고 <가슴 뻥 뚫린 사나이>는 빈 사각 가슴을 그러안고 숨을 고르고 있다.

날던 새가 지상에 착지할 때의 긴장된 발끝, 또는 지상에서 비상하는 순간의 모습. 작가는 살아 있음을 그런 순간에서 포착해 낸다. 나아가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까지 드러내고자 한다. 20년 전 작품이 지금도 진한 감흥을 부르는 것은 그렇기 때문이다. 이에 더하여 소나무 껍질 같은 질감은 브론즈의 느끼함을 상쇄한다.

<위를 향해 걷는 발>(왼쪽) <그날>(오른쪽)
<위를 향해 걷는 발>(왼쪽) <그날>(오른쪽)
브론즈에 앞선 진흙 소성작업. 긁고, 찌르고, 베어내고…. 심지어는 밀실에서처럼 굵은 장작개비로 마구 두들겨 시대의 질감을 재현했다. 그것은 곧 거친 땅과 평생 씨름해 갈퀴가 된 농투성이의 손발과 다르지 않고, 바위 벼랑에 겨우 존재하는 거친 껍질의 소나무와 다르지 않다. 또 수천 년 기능을 벼려온 낫과 쟁기의 선명함과도 다르지 않은 것. 80년대 전국을 돌며 끄집어낸 한국미의 조형성은 서양에서 건너온 브론즈의 기운을 누르고 한판승을 거뒀다.

다시 묻는 질문. 왜 20년 전 통증을 헤집는가. 작가는 브론즈와 철에서 스테인리스·에프아르피로 이미 옮겨와 있고, 인체에서 서해안 개펄의 말조개와 소라, 추상화한 청산과 바다에 부는 바람까지로 관심사를 넓혀왔는데 말이다. 그는 자신과 함께 시대와 치열하게 겨뤘던 80년대 ‘현실과 발언’ 동인들의 엇갈리는 행로를 들었다. 급한 이는 일찌감치 세상을 뜨고 나머지는 민주화 이후 동력을 잃었다. 또 어떤 이는 ‘센세이션’의 외피를 뒤집어쓰고, 다른 어떤 이는 때깔 고운 화랑으로 자리를 옮겨 미디어의 조명을 즐긴다. 그렇지 않으면 뜸뜸이 환경 조각으로 겨우 연명하든지. 그것이 바로 이유라고 했다.

역사의 변화를 지켜본 광화문 네거리 미술관. 어둑신한 전시장에 20년 전 치열했던 우리의 옛 모습이 우두커니 서 있다. 밖에는 무심한 차들과 인파가 흐르는데…. 내년 1월25일까지. (02)2020-2055.

글 임종업 선임기자 blitz@hani.co.kr

사진 이종근 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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