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석의 종횡사해
김지석의 종횡사해 / 전례없는 경제위기를 겪으면서 서구문명의 위기를 긴 시야로 바라보는 분석이 늘고 있다. 공통점은 지난 수백년 동안 지속된 서구 문명의 패권이 막바지에 이르렀지만 어떤 문명이 새 주도권을 행사할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해는 지지만 어떤 아침이 올지는 알기 어렵다는 얘기다. 여기서 서구문명의 핵심은 무엇이며 그것은 얼마나 큰 잠재력을 갖는가 하는 의문이 생긴다. 다른 문명과 구별되는 서구의 정체성은 기독교, 낙관주의, 과학, 성장, 자유주의, 개인주의 등 독특한 여섯 가지 사상의 공동 경험에서 찾을 수 있다고 <서구의 자멸>(말·글빛냄 펴냄)은 말한다. 이 가운데 개인주의와 자유주의가 가장 중요하다. 모든 개인에게 개성과 깊은 내면, 확고한 자아가 있다는 생각은 서구 정체성을 이루는 기본 요소다. 개인주의의 상승은 기독교에서부터 르네상스, 종교개혁, 현대 경제·사회의 성장에 이르기까지 서구 역사를 관통하는 모티프다. 기독교는 개인의 헌신을 요구하고 개인 책임을 물은 첫 종교라고 한다. 기독교가 보편화시킨 영혼이라는 개념은 세속화해 자아 개념이 됐으며, 이는 노력·자기개발·자기책임 등 개인주의 핵심 요소와 밀접하게 연관된다. 개인주의를 사회적 차원에서 실현하는 유력한 방법이 민주주의에 기초한 자유주의다. 이런 사회는 종교의 자유, 양심, 관용, 협동력,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지려는 시민들의 의지 등을 특징으로 갖는다. 자유주의가 그냥 생겨난 건 아니다. 어느 정도 교육 수준과 독창력, 독립심을 갖춘 자유롭고 자치적인 시민은 자유주의 사회의 결과물이라기보다 전제조건이다. 또한 자유주의는 그에 걸맞은 경제·정치 체제를 요구한다. 과학·성장·낙관주의는 개인주의와 자유주의가 만들어낸 찬란한 승리다. 처음에는 성장이 과학을 이끌어내는 데 도움을 줬으나 지난 3세기 동안은 과학이 성장의 주된 요인 가운데 하나였다. 18~19세기에는 서구의 과학적 주도권이 경제 주도권으로 이어졌고, 경제성장은 낙관주의자들의 힘을 키웠다. 계몽사상가들은 개인의 자율성과 진보를 옹호하면서 낙관주의를 뒷받침했다. 하지만 개인주의·자유주의는 지금 위기에 처해 있다. 개인화한 사회는 공동체를 약화시키고 개인의 중압감을 증가시킨다. 한편으로는 사회의 분열, 사회자본과 공동체의식의 붕괴가 나타나고, 다른 한편으로는 개인의 책임과 근심이 엄청나게 높아진다. 서구의 자유주의도 도덕적 기반으로부터 분리, 공동체에 대한 헌신 약화, 열정 부족 등의 문제에 부닥치고 있다. 서구 문명이 앞날은 이런 문제점을 극복하고 개인주의·자유주의의 활력을 되살릴 수 있을지에 달렸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국가·종교 권력의 억압에 맞서는 해방의 이념으로 출발한 개인주의와 민주적 자유주의는 자신감과 신뢰, 평등과 솔선, 책임감을 기반으로 아래에서부터 솟아나는 문명을 형성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서구의 위기는 개인주의와 자유주의의 이런 장점이 침식되고 보수적 성격이 강해졌음을 뜻한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아직 개인주의·자유주의의 진보적 성격을 충분히 맛보지 못한 상태다. 문명 패권의 향방을 가름할 중요한 열쇠의 하나가 여기에 있다.
김지석 논설위원 j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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