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생의 참재미 춤에 있습니다”
그의 춤은 쉽다. 왕초보도 스텝 몇번 따라하며 그에게 손을 맡기면 저절로 몸이 돌아간다. 종류도 단순하다. 둘이 추는 춤과 혼자 흔들면서 추는 춤. 굳이 분류하자면 이 두 가지다. 혼자 흔들면서 추는 춤이 그냥 ‘막춤’이라면, 둘이 추는 춤은 블루스 내지 지터벅(일명 지르박) 정도다. 정식으로 배운 적은 없고, 그저 음악에 취해 흥에 취해 추는 춤이다.
예닐곱살 때 텝댄스맛 알았다
고등학교 때 카바레 진출했다
신설 뉴욕학국문화원 자원했다
홍신자·홍혜경·백남준·커닝햄과
‘문화살롱’ 꾸리고 놀았다
퇴직후 공연전문장 운영하며
‘천호선표’ 사교춤 가르친다 공예전문숍 ‘인사동 쌈지길’ 대표 천호선(62·단국대 대중문화예술대학원 겸임교수)씨는 “춤은 몇가지 안되는 인생의 재미 중 참 재미”라고 말한다. 맛난 것을 먹는 재미, 새로운 것을 배우는 재미,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는 재미 등을 따져 봐도 역시 춤추는 재미가 단연 최고라는 것이다. 그가 춤을 알게 된 것은 예닐곱 살 때쯤 고등학생 형으로부터 탭댄스를 배우면서부터였다. 형은 당시 거리에서 공연하던 러시아 출신 탭 댄서에게서 몇 가지 동작을 배워와 동생과 함께 마루를 구르며 춤을 췄다. 그때 익힌 리듬감은 어린 소년을 깊이 감동시켰다. 중학생 때는 몸을 맘껏 흔들며 노래하는 것으로 장기자랑 시간을 독차지하더니, 고등학생이 되자 더욱 대담하게 춤의 세계로 진입했다. 화신백화점 근처 스탠드바에서 마담의 손에 잡혀 사교댄스를 배우고 난 뒤엔 빡빡머리에 모자를 쓰고 신세계백화점 캬바레까지 진출한 것이다. 진분홍처럼 자유로웠던 인생은 대학 졸업 뒤 68년 청와대 행정관(6급)으로 들어가면서 회색으로 변하는 듯싶었다. 당시 외교담당 행정관이었던 그는 유신 말기 날로 험악해져가는 대미관계를 누구보다 가까이서 목도했다. 위험 수위로 치닫는 권력에 줄을 서다 한낱 도구로서 끝나기는 싫었다. 방도를 모색하던 중 뉴욕에 한국문화원이 생긴다는 소식이 들려왔고 선뜻 자원했다. 79년 4월 주미 한국문화원 문정관으로 발령을 받았다. 그렇게 시작된 해외 생활은 딱딱했을 뻔한 관료의 삶을 잘 매만진 가죽처럼 부드럽고 윤기 있게 만들어줬다. 80년대 초 뉴욕에서 천 대표의 집은 그야말로 ‘문화 살롱’이었다. 홍신자씨가 춤을 췄고, 홍혜경씨가 노래를 불렀으며, 학비가 모자란 젊은 화가들이 와서 그림을 팔았다. 백남준을 비롯해 ‘플럭서스’ 멤버들과도 교류를 텄고, 현대 무용가인 머스 커닝햄과도 친분을 쌓았다. 그 와중에 천씨는 외교관 부부들을 초청해 블루스·지터벅 등을 가르쳤다. 복잡한 동작은 빼고 핵심적인 몇가지 스텝으로 꾸민 ‘천호선식 사교댄스’. 월 4회 정도 배우면 누구나 흥겹게 춤을 출 수 있었다. 그뒤 문화관광부(당시 문공부) 예술국장·캐나다와 덴마크 공보관 등을 거쳐 2003년 국회 문광위 수석전문위원을 끝으로 그는 공직생활을 마감했다. 동생 천호균씨가 대표로 있는 토탈패션업체 ‘쌈지’와 연계해, 그는 요즘 예술가의 재능과 활기가 어우러진 복합문화공간 ‘쌈지길’을 운영하는 데 골몰하고 있다. 자칭 타칭 ‘아마추어 댄스 단기 속성 지도자’인 천씨는 30일 오후 8시 문예진흥원 대극장 춤 무대에 오른다. 국제현대무용제(MODAFE) 출품작 중 하나로, 아티스트 ‘사사’가 안무하는 ‘쑈쑈쑈:쇼는 계속되어야 한다를 재활용하다’라는 작품에 출연하는 것이다. 프랑스 출신의 안무가 제롬 벨의 ‘쇼는 계속되어야 한다’를 패러디한 이 작품은 유행가에 맞춰 20명가량의 예술가 20여명이 나와 춤을 춘다. 이중 천 대표는 출연진 중 가장 나이가 많다. 50년 넘게 춤을 췄지만 정식 무대는 처음이라며 쑥스러워 하는 그는 “내년께 쯤 쌈지길에서 춤강좌를 한번 열어보고 싶다”고 포부를 밝혔다. 역시, 춤은 계속된다. 글 이유주현기자 edigna@hani.co.kr 사진 이종근 기자 root2@hani.co.kr
고등학교 때 카바레 진출했다
신설 뉴욕학국문화원 자원했다
홍신자·홍혜경·백남준·커닝햄과
‘문화살롱’ 꾸리고 놀았다
퇴직후 공연전문장 운영하며
‘천호선표’ 사교춤 가르친다 공예전문숍 ‘인사동 쌈지길’ 대표 천호선(62·단국대 대중문화예술대학원 겸임교수)씨는 “춤은 몇가지 안되는 인생의 재미 중 참 재미”라고 말한다. 맛난 것을 먹는 재미, 새로운 것을 배우는 재미,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는 재미 등을 따져 봐도 역시 춤추는 재미가 단연 최고라는 것이다. 그가 춤을 알게 된 것은 예닐곱 살 때쯤 고등학생 형으로부터 탭댄스를 배우면서부터였다. 형은 당시 거리에서 공연하던 러시아 출신 탭 댄서에게서 몇 가지 동작을 배워와 동생과 함께 마루를 구르며 춤을 췄다. 그때 익힌 리듬감은 어린 소년을 깊이 감동시켰다. 중학생 때는 몸을 맘껏 흔들며 노래하는 것으로 장기자랑 시간을 독차지하더니, 고등학생이 되자 더욱 대담하게 춤의 세계로 진입했다. 화신백화점 근처 스탠드바에서 마담의 손에 잡혀 사교댄스를 배우고 난 뒤엔 빡빡머리에 모자를 쓰고 신세계백화점 캬바레까지 진출한 것이다. 진분홍처럼 자유로웠던 인생은 대학 졸업 뒤 68년 청와대 행정관(6급)으로 들어가면서 회색으로 변하는 듯싶었다. 당시 외교담당 행정관이었던 그는 유신 말기 날로 험악해져가는 대미관계를 누구보다 가까이서 목도했다. 위험 수위로 치닫는 권력에 줄을 서다 한낱 도구로서 끝나기는 싫었다. 방도를 모색하던 중 뉴욕에 한국문화원이 생긴다는 소식이 들려왔고 선뜻 자원했다. 79년 4월 주미 한국문화원 문정관으로 발령을 받았다. 그렇게 시작된 해외 생활은 딱딱했을 뻔한 관료의 삶을 잘 매만진 가죽처럼 부드럽고 윤기 있게 만들어줬다. 80년대 초 뉴욕에서 천 대표의 집은 그야말로 ‘문화 살롱’이었다. 홍신자씨가 춤을 췄고, 홍혜경씨가 노래를 불렀으며, 학비가 모자란 젊은 화가들이 와서 그림을 팔았다. 백남준을 비롯해 ‘플럭서스’ 멤버들과도 교류를 텄고, 현대 무용가인 머스 커닝햄과도 친분을 쌓았다. 그 와중에 천씨는 외교관 부부들을 초청해 블루스·지터벅 등을 가르쳤다. 복잡한 동작은 빼고 핵심적인 몇가지 스텝으로 꾸민 ‘천호선식 사교댄스’. 월 4회 정도 배우면 누구나 흥겹게 춤을 출 수 있었다. 그뒤 문화관광부(당시 문공부) 예술국장·캐나다와 덴마크 공보관 등을 거쳐 2003년 국회 문광위 수석전문위원을 끝으로 그는 공직생활을 마감했다. 동생 천호균씨가 대표로 있는 토탈패션업체 ‘쌈지’와 연계해, 그는 요즘 예술가의 재능과 활기가 어우러진 복합문화공간 ‘쌈지길’을 운영하는 데 골몰하고 있다. 자칭 타칭 ‘아마추어 댄스 단기 속성 지도자’인 천씨는 30일 오후 8시 문예진흥원 대극장 춤 무대에 오른다. 국제현대무용제(MODAFE) 출품작 중 하나로, 아티스트 ‘사사’가 안무하는 ‘쑈쑈쑈:쇼는 계속되어야 한다를 재활용하다’라는 작품에 출연하는 것이다. 프랑스 출신의 안무가 제롬 벨의 ‘쇼는 계속되어야 한다’를 패러디한 이 작품은 유행가에 맞춰 20명가량의 예술가 20여명이 나와 춤을 춘다. 이중 천 대표는 출연진 중 가장 나이가 많다. 50년 넘게 춤을 췄지만 정식 무대는 처음이라며 쑥스러워 하는 그는 “내년께 쯤 쌈지길에서 춤강좌를 한번 열어보고 싶다”고 포부를 밝혔다. 역시, 춤은 계속된다. 글 이유주현기자 edigna@hani.co.kr 사진 이종근 기자 root2@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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