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성 기자
광화문 흥국생명 빌딩은 여러모로 문화의 랜드마크다. 건물 앞의 ‘망치질하는 사람’부터 지하의 예술영화 전용관 씨네큐브까지. 특히 씨네큐브는 도심 한 복판에 있으면서도 넉넉한 분위기에서 영화를 볼 수 있어 예술영화 팬들의 성지나 다름 없었다.
지난 2000년 개관한 씨네큐브가 짧은 시간에 예술영화의 대명사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극장을 운영해 온 영화사 백두대간의 공이다. 영화 <아름다운 시절>의 이광모 감독이 대표로 있는 백두대간은 탁월한 프로그래밍 능력과 고집스런 극장 운영 원칙으로 국내 예술영화 시장을 선도해 왔다. 백두대간이 다음 달부터 씨네큐브 운영에서 손을 떼게 됐다는 소식이 예술영화팬들에게 충격으로 다가오는 것은 ‘백두대간 없는 씨네큐브’를 상상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건물 소유주인 흥국생명은 왜 백두대간에게 ‘방을 빼달라’고 요구했을까? 그것도 계약 만료 시한(2015년)을 6년이나 앞두고. 이에 대해 흥국생명 홍보담당자는 “모르겠다”고 답했다. “극장 인수 실무 작업은 흥국생명 인사팀이 하고 있지만, 총괄 부서가 어디인지는 알 수 없다”는 것이다. 모기업인 태광그룹의 개입 여부에 대해서도 “그룹과 인적 교류가 없어 누가 누구인지 전혀 모른다”고 했다. “씨네큐브가 문을 닫는 일은 없으며, 현재 다른 운영자를 찾고 있다”고 밝히고 있으나, 왠지 허둥거리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이런 상황에서 정치적인 배경을 원인으로 지목하는 소문이 나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그 소문은, 지난 대선 때 이명박 대통령을 도왔던 여권의 한 거물급 인사가 태광그룹 오너 일가와 가까운 친인척 관계라는 사실을 근거로 댄다. 진보 성향의 백두대간이 불편했을 거라는 추측이다. 청와대 행정관 성접대 파문의 주인공인 태광그룹 소속의 케이블방송업체 티브로드가 극장 인수 작업에 관여하고 있다는 얘기도 있다.
예술영화의 향기가 풍기던 곳에서 이런 비문화적 소문을 듣는 것은 서글픈 일이다.
이재성 기자 s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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