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직한 품성에 ‘국사’ 로 불려
‘서울 진공 작전.’ 6·25 때 얘기가 아니다. 구한말 1907년 고종의 강제 퇴위와 군대해산을 계기로 벌어진 정미의병 때였다. 전국 13도 의병들이 연합해 서울로 진격했다. 그 중심에는 허위가 있었다. 그의 호가 왕산. 호랑이가 가죽을 남기듯 그는 죽어서 이름을 남겼다. 그가 진격하고자 했던 서울 동대문에서 청량리 구간의 길 이름이 왕산로다.
구국의 한뜻에 목숨을 바친 왕산 허위를 재조명하고, 그의 의병활동으로 국내·러시아·중앙아시아 등지로 뿔뿔이 흩어진 왕산의 후손들을 살핀 2부작 다큐멘터리 <왕산가 사람들>이 만들어졌다. 6월22~23일 밤 10시 교육방송에서 방영한다. 1부는 ‘의병장의 후손으로 살아가기’, 2부는 ‘잊혀진 후예들’이다.
당시 왕산이 주도한 ‘서울 진공 작전’은 실패로 돌아갔다. 한번에 서울에 진입해 의병 2천명을 이끌고 동대문 밖 30리 지점에서 일본군과 대치하며 격전을 펼쳤지만 패했다. 경기도 포천 지역에 몸을 숨기고 제2차 서울 탈환 작전을 준비하던 왕산은 1908년 일본 헌병대의 급습으로 체포된다. 일본군은 이날을 ‘폭풍의 날’이라 부르며 큰 의미를 둘 정도였다.
그 뒤 왕산은 서울로 이송돼 심문을 받는다. 조선에 헌병경찰 제도를 도입해 헌병통치를 주도하던 일본 헌병사령관 아카시 모토지로가 그를 맡았다. 일본 입장에서 ‘폭도의 수괴’였기에 사령관이 직접 나선 터였다. 그러나 아카시는 심문 과정에서 왕산의 인품과 식견에 존경의 마음을 품게 된다. 아카시는 마지막 순간까지 그를 살리려고 애썼으나, 왕산은 ‘서대문 형무소 제1호 사형수’로 아까운 목숨을 잃는다.
이번 다큐멘터리에 아카시의 손자 아카시 모토츠구가 나온다. 할아버지의 전기문을 직접 보여주며 “왕산의 강직한 품성에 그를 ‘국사’로 부르며 존경했고, 이토 히로부미에게 구명을 호소하기까지 했다”는 일화를 들려준다. 이는 역사 연구가들 사이에 널리 알려진 이야기지만, 직접 후손이 확인한 것은 처음이다. 게다가 이런 내용들은 아카시 모토지로의 전기문에 기록돼 있다.
한편, 왕산의 후손들의 힘겨운 삶의 모습은 조상의 의병활동 전력이라는 ‘멍에 아닌 멍에’로 고난의 길을 걸어야 했던 애국지사 후손들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준다.
김진철 기자 nowher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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