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눈물의 진실을 보았습니다 “눈물…, 힘들게, 어렵게 살아가는 이들을 위해 흘리는 눈물이 점점 메말라가고 있어요. 아직도 가난하고 힘든 이웃은 많고, 그래서 눈물은 아직도 유효한데. 내 아버지의 삶, 우리 가족, 그리고 함께 고단하게 살아온 사람들의 삶을 책으로 쓰면서 그런 눈물을 다시 본 것은 가장 큰 보람이었지요.” 딸은 아버지의 마음을 이제야 온전히 긍정할 수 있게 됐다고 말한다. 최근 아버지의 삶과 신념, 사랑, 가족의 이야기를 담은 책 <탐루>(探淚: ‘눈물을 찾다’, 한울 펴냄)를 낸, 평화통일운동가 김낙중(74)씨의 딸 선주(35)씨는 29일 “나의 아버지는 너무도 고지식했고 민주적이며 평화적인 가장이자 통일운동가였다”고 회고했다. 이 땅의 고난 보며 평화통일 한마음
간첩으로 몰려 4번 구속 18년 옥고
남북이 함께 흘릴 눈물 평생 찾았던
아버지의 마음 이제야 온전히 긍정 아버지의 삶은 “유별났다.” 한국전쟁의 포연이 채 가시지 않은 1954년, 부산 광복동 거리에서 서울대 재학 시절의 청년 아버지는 이승만 정권의 ‘무력 북진’에 반대해 혼자 삭발하고 소복을 입은 채 ‘탐루’란 글이 쓰인 등불을 들고 ‘평화통일’을 외쳤다. ‘눈물을 가진 사람은 없는가? 전선에서 피를 토하며 죄 없이 쓰러져가는 가난한 이 땅의 아들들을 위해 전쟁을 반대하며 눈물을 흘려줄 사람은 없는가?’ 그 청년 아버지는 평화통일 방안을 이승만 대통령한테 청원하려다 한 때 정신병원에 수용됐고, 북한 정권에 평화 통일안을 전하려고 임진강 건너 월북했다가 ‘미제의 간첩’으로 몰리기도 했다. 남으로 송환돼 간첩 혐의로 구속됐던 아버지는 63년, 73년, 92년에도 간첩 혐의로 구속돼 모두 18년을 감옥에서 보내야 했다.
‘간첩’ 혐의의 아버지는 딸한테 큰 상처였다. “어린 시절, 아버지가 뭐하는 사람인지 떳떳하게 말할 수 없어 늘 풀이 죽어 있었죠. 빨갱이 콤플렉스 때문에 빨간색만 봐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거든요. 그런 나를 유가협, 민가협 등의 고마운 분들이 세상으로 다시 데리고 나왔지요.” 아버지의 가족사를 쓰기로 한 건 지난 2000년. 아버지가 98년 형집행정지로 풀러나고 선주씨가 첫째 아이(6)을 낳고 얼마 뒤인 2000년, 가족의 온갖 기록들을 모아 모질게 살아온 아버지와 어머니 김남기(66)씨의 이야기를 기록하고자 마음먹었다. 이후 재판기록, 일기, 편지 등을 모아 5년 동안 틈틈이 책을 썼다. “아버지와 많은 얘기를 나누면서 내가 몰랐던, 잘못 알았던, 막연하게 알았던 아버지의 마음을 알게 됐지요.” 딸은 아버지의 청년시절 일기를 뒤적이고 아버지를 ‘취재’하며 ‘진리를 위해 살자’며 18살 때 목욕재계 명세를 하고 24살 때 정신의 흐트러짐을 다잡고자 왼손 새끼손가락 절단의 맹세을 했던 아버지한테서 “구도자”의 삶을 발견했다. “아버지는 예민한 20대 때에 한국전쟁의 비극을 겪지 않았다면, 평화로운 사회에 태어났다면 아마도 철학자나 신학자가 되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92년 아버지가 네번째 간첩 혐의로 구속됐을 때 아버지와 가족 모두가 느낀, 우리 사회에 대한 깊은 좌절과 고통, 그리고 다시 일어나는 희망의 이야기는 가족사의 잔잔한 감동을 준다. “한 평생 남북이 함께 흘릴 눈물을 찾았던 아버지의 노력이 앞으로 어떻게 평가될지 알 수 없지만, 늘 ‘진인사 대천명’의 자세로 엄격하고 성실했으며 대화와 소통을 즐겨했던 아버지의 삶은 딸의 가장 큰 자랑“이라고 선주씨는 말한다. 글 오철우 기자 cheolwoo@hani.co.kr 사진 김종수 기자 jongso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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