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명은 빛보다 어둠 만드는 일이다”
한국의 대표적 연극 연출가로 꼽히는 오태석(65)씨의 작품 크레디트에 주요 스태프로 공연 때마다 실리는 이름이 있다. 15년이 넘는다. 아이카와 마사아키(56). 일본의 가장 유명한 무대조명 연출가 가운데 한 명이다. 이제 한국 무대판에서도 그를 모르는 이가 드물다.
이 달 아이카와는 국내에서 가장 바쁜 조명 디자이너다. 지난 1일 귀국했다. 그리곤 16년만에 재공연되는 오씨의 기념비작 <물보라>(9~19일·국립극장 달오름극장)에서 조명을 총감독했다.
오태석씨와 15년 함께 작업
‘부토 페스티벌’ 조명 총연출
“무용수 몸짓·몸선보다 조명이 튀면 절대안돼” 24일부터 7월14일까지도 꼬박 국립극장에서 살아야 한다. 국제무대에서 일본을 대표하는 춤 양식으로 꼽히는 ‘부토’를 국내 최초로 집중 ‘조명’하는 <부토 페스티벌>(국제무용협회 한국본부 주최)에서 조명 연출을 도맡는다. 이번에 초대된 부토 무용수들이 하나같이 “그 사람은 내 작품을 알지”라며 거들었다. 춤, 특히 빛과 어둠의 조합이 절대적 구실을 하며 서사보다 몽환적이고 그로테스크한 이미지 등이 강조되는 ‘부토’ 조명의 명실 공히 일인자다. 1989년 국내에 초청된 일본 무용수 야마다 세츠코와 함께 한국을 밟았던 게 인연이 되어 이제까지 춤 쪽의 김매자, 박명숙, 연극 쪽의 오태석 등과 함께 만들어온 작품만도 100개가 넘는다. “<심청>(김매자) <태>(오태석) 등 한국적 요소가 진한 작품을 함께 만들 때가 힘들지만 가장 인상적이다. 현대인도 이해하기 어려운 깊이를 어떤 색감과 질감으로 관객에게 전할지 외국인으로서 재해석하는 일이 흥미진진하다.” 가장 자신 있는 한국말은 “재떨이” “라이터” “담배” 정도다. 한국 담배를 피운 지는 10여년 째. 다른 말은 어렵다. 통역이 항상 붙지만 현해탄을 건넌 뒤 “가장 많은 에너지를 쏟아야 하는 건 말이 아닌 조명”이고 조명을 위해선 “대화보다 먼저 작품을 보는 일이 중요”하다.
1972년 게이오대 철학과를 졸업한 아이카와는 우리의 386세대에 견줄 만한 ‘전공투’(전학공투회의) 세대다. 전공투는 반정부 시위가 극에 달하던 1960년대 후반 일본 학생운동의 결집체였다. “데모만 하는 대학생들 서둘러 졸업시켜 사회로 몰아냈다. 나도 덕분에 졸업하긴 했지만. (하하) 하지만 사회체제 속에 내몰리듯 얽매이고 싶진 않았다. 당시 소극장 구실을 했던 ‘라이브 하우스’ 카페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익혔던 조명을 ‘선택’했고 그 선택을 책임지기 위해 여기까지 왔다.” 첫 공식 데뷔 무대가 지금 ‘부토의 니진스키’라 불리는 가사이 아키라의 1971년 부토 공연이었다. 유럽의 표현주의, 일본 전후 사회의 허무주의 따위가 섞여 탄생한 부토가 1960~70년대 일본에선 외면당했다가 80년대 유럽과 미국 등지에서 주목받은 뒤 다시 본토로 건너와 다채롭게 양식화했다. 아이카와는 그때 이미 “척박한 토양 위에서 온몸으로 춤추는 무용수들의 힘을 보았다”며 “자신의 조명으로 그들의 에너지가 분배되는 형식미가 부각된다”고 말한다. ‘빛’ 철학이 단호하다. “조명이 무용수의 몸짓, 몸선보다 튀면 안 된다.” 무늬를 화려하게 찍어내는 ‘고보’(우엉) 장치나, 10여년 전 미국에서 처음 시도된 사각 조명이 무분별하게 한국에서 사용되는 게 달갑지 않다고 말한다. “조명은 빛보다는 어둠을 만드는 일이다. (어둠을 이해해야) 무대에 오르는 사람의 어두운 마음 속에 감춰져 있는 면을 비추는 일이 가능하다.” 글·사진 임인택 기자 imit@hani.co.kr
‘부토 페스티벌’ 조명 총연출
“무용수 몸짓·몸선보다 조명이 튀면 절대안돼” 24일부터 7월14일까지도 꼬박 국립극장에서 살아야 한다. 국제무대에서 일본을 대표하는 춤 양식으로 꼽히는 ‘부토’를 국내 최초로 집중 ‘조명’하는 <부토 페스티벌>(국제무용협회 한국본부 주최)에서 조명 연출을 도맡는다. 이번에 초대된 부토 무용수들이 하나같이 “그 사람은 내 작품을 알지”라며 거들었다. 춤, 특히 빛과 어둠의 조합이 절대적 구실을 하며 서사보다 몽환적이고 그로테스크한 이미지 등이 강조되는 ‘부토’ 조명의 명실 공히 일인자다. 1989년 국내에 초청된 일본 무용수 야마다 세츠코와 함께 한국을 밟았던 게 인연이 되어 이제까지 춤 쪽의 김매자, 박명숙, 연극 쪽의 오태석 등과 함께 만들어온 작품만도 100개가 넘는다. “<심청>(김매자) <태>(오태석) 등 한국적 요소가 진한 작품을 함께 만들 때가 힘들지만 가장 인상적이다. 현대인도 이해하기 어려운 깊이를 어떤 색감과 질감으로 관객에게 전할지 외국인으로서 재해석하는 일이 흥미진진하다.” 가장 자신 있는 한국말은 “재떨이” “라이터” “담배” 정도다. 한국 담배를 피운 지는 10여년 째. 다른 말은 어렵다. 통역이 항상 붙지만 현해탄을 건넌 뒤 “가장 많은 에너지를 쏟아야 하는 건 말이 아닌 조명”이고 조명을 위해선 “대화보다 먼저 작품을 보는 일이 중요”하다.
1972년 게이오대 철학과를 졸업한 아이카와는 우리의 386세대에 견줄 만한 ‘전공투’(전학공투회의) 세대다. 전공투는 반정부 시위가 극에 달하던 1960년대 후반 일본 학생운동의 결집체였다. “데모만 하는 대학생들 서둘러 졸업시켜 사회로 몰아냈다. 나도 덕분에 졸업하긴 했지만. (하하) 하지만 사회체제 속에 내몰리듯 얽매이고 싶진 않았다. 당시 소극장 구실을 했던 ‘라이브 하우스’ 카페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익혔던 조명을 ‘선택’했고 그 선택을 책임지기 위해 여기까지 왔다.” 첫 공식 데뷔 무대가 지금 ‘부토의 니진스키’라 불리는 가사이 아키라의 1971년 부토 공연이었다. 유럽의 표현주의, 일본 전후 사회의 허무주의 따위가 섞여 탄생한 부토가 1960~70년대 일본에선 외면당했다가 80년대 유럽과 미국 등지에서 주목받은 뒤 다시 본토로 건너와 다채롭게 양식화했다. 아이카와는 그때 이미 “척박한 토양 위에서 온몸으로 춤추는 무용수들의 힘을 보았다”며 “자신의 조명으로 그들의 에너지가 분배되는 형식미가 부각된다”고 말한다. ‘빛’ 철학이 단호하다. “조명이 무용수의 몸짓, 몸선보다 튀면 안 된다.” 무늬를 화려하게 찍어내는 ‘고보’(우엉) 장치나, 10여년 전 미국에서 처음 시도된 사각 조명이 무분별하게 한국에서 사용되는 게 달갑지 않다고 말한다. “조명은 빛보다는 어둠을 만드는 일이다. (어둠을 이해해야) 무대에 오르는 사람의 어두운 마음 속에 감춰져 있는 면을 비추는 일이 가능하다.” 글·사진 임인택 기자 imi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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