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학의 울림 독일에 나지막이 20일 저녁8시(현지시각) 독일 남부 대학도시 튀빙엔의 중심가에 위치한 유서 깊은 가스틀 서점 행사장. 작가 공지영(42)씨가 자신의 단편소설 <귓가에 남은 음성> 일부를 나직한 목소리로 읽어 내려갔다. “…그날 결혼선물로 위장된 쿠키상자에 담겨져 도쿄로 간 필름은 다시 독일로 날아가 전세계에 처음으로 광주를 타전하게 되었다네.” 이 소설은 80년 5월 광주학살 현장을 카메라에 담아 세계에 전한 독일 기자 위르겐 힌츠페터를 주인공으로 삼은 작품. 공씨가 소설 제3장의 전반부를 한국어로 낭독한 뒤 연극배우이자 전문 낭독자인 파리다 쉐하다가 소설 마지막까지를 독일어로 읽었다. “그리하여 두레박 밑에 덮어둔 등불은 지붕으로 올라가고 어둔 밤 구석에서 소곤거리던 말들은 지붕 위의 외침으로 퍼져나갔네.” 이번 낭독회는 ‘2005 프랑크푸르트도서전 주빈국조직위원회’가 10월의 본행사를 앞두고 독일 내에서 한국문학에 대한 관심을 높이기 위해 열고 있는 순회 낭독회의 일환이었다. 3월과 4월, 5월에 이어 네 번째인 6월 낭독회는 공지영, 한강씨말고도 같은 시각 슈투트가르트 ‘작가의 집’에서 낭독회를 한 강석경, 서영은씨, 그리고 오정희 신경숙 이혜경 배수아 하성란씨 등 모두 9명의 여성 작가가 참여해 오는 23일까지 독일 남부지역을 돌며 독자들을 만난다. 공씨 작품 낭독에 이어서는 한강씨의 단편 <내 여자의 열매> 낭독이 이어졌다. 서가 사이에 마련된 넓지 않은 행사장을 가득 메운 50명 남짓한 청중은 조금의 동요도 없이 자리를 지키고 앉아 낭독에 귀를 기울였다. 한강씨는 낭독에 앞서 자신의 소설이 “거칠게 말하면 여성을 위한 소설, 한국만 아니라 세상의 어떤 여자라도 이해할 수 있는 소설이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차소리가, 간선도로를 거센 속력으로 질주하는 엔진음들의 불쾌한 울림이 집안의 단단한 적막 위로 칼금을 긋고 있었다.” 역시 작가 한강씨가 작품 일부를 읽은 뒤 독일어 낭독이 이어졌다. 두 작가의 작품 낭독이 끝난 뒤에는 객석에서 질문이 던져졌다: 광주학살이나 아프가니스탄 및 이라크전쟁 같은 과거의 일들이 지금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공씨가 대답했다. “이 작품을 쓰면서는 한국과 독일의 연관말고도 ‘세계시민’이라는 것을 생각했다. 경제의 세계화만이 아니라 선함의 연대 역시 세계화해야 한다는 말이다. 힌츠페터가 독일의 안락한 삶을 떨치고 베트남전쟁을 거쳐 한국에 왔듯이 우리도 지금쯤은 세계의 어려운 곳을 찾아가서 봉사하고 같이 싸워야 한다는 의미를 담으려 한 것이다.” 낭독에 앞선 한강씨의 발언과 함께 공씨의 이런 말은 한국의 여성작가들이 자신들의 좁은 경험과 사유에 머무르지 않고 세계를 향해 목소리를 내고 있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졌다. 이날 낭독회가 열린 서점의 한쪽에는 이 지역 튀빙엔대학에 교수로 재직했던 마르크스주의 철학자 에른스트 블로흐가 동료 교수 및 학생들과 함께 앉아 토론을 벌였던 의자가 남아 있었다. 시인 파울 첼란 역시 이 서점을 즐겨 찾았다고 했다. 블로흐와 첼란으로 상징되는 독일 문화의 연륜과 무게가 간직되어 있는 서점 가스틀에서 한국문학은 소박하지만 의미있는 첫발을 내디뎠다. 이 서점의 작은 행사장에서 낮은 목소리로 말을 걸기 시작한 한국문학은 언젠가 ‘지붕 위의 외침’으로 바뀌어 독일과 전세계에 퍼져나갈 것이다.
이날 낭독회 실황은 다음달 6일 <한국방송> 제1텔레비전 <낭독의 발견> 프로그램을 통해 방영될 예정이다. 튀빙엔(독일)/글.사진 최재봉 문학전문기자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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