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철 기자
부산 해운대와 충무로와 함께 서울 청량리는 한국 영화의 핵심지다. 부산 국제영화제가 벌어지는 요즘 청량리에선 난리가 났다. 한국 영화의 오랜 ‘스폰서’인 영화진흥위원회가 넋을 놓고 있는 모양새다.
부산영화제 열기가 한창 달아오르던 11일 오전 청량리 영진위에선 주간 간부회의가 열렸다. 이 자리에서 조희문 위원장은 부서장급 이상 간부 전원에게 보직사퇴서를 제출하라고 요구했다. 사무국장을 포함한 9명의 간부들은 모두 12일 보직사퇴서를 냈다.
어리둥절한 일이다. 독립영화제작지원 사업에 개입해 압력을 행사했다가 망신을 당하고, 문화체육관광부 차관에게 거듭 “책임지라”는 공개 요구를 받고, 국민권익위원회로부터 ‘공직자 행동강령’을 위반했다는 지적을 받고, 최근 영진위원들까지 문화부 장관에게 위원장 해임을 요구했는데도 버티고 있는 바로 그 조희문 위원장이 간부들에게 보직사퇴를 요구했다니.
이유는 국정감사 때문이었다. 부산영화제 개막을 하루 앞두고 ‘레드카펫’이 깔린 6일, 영진위 국감장에서 조 위원장은 ‘레드카드’를 받았다. 6월 임시국회 때 한 인사말 자료를 또다시 의원들에게 돌린 게 직접적 원인이었다. 영진위는 담당 직원의 실수라고 해명했다. 영진위의 설명처럼 흐트러진 근무 기강을 잡고 분위기를 쇄신하기 위해 보직사퇴서를 요구했다”고 볼 수 있다. 영진위 관계자는 “사표를 수리할 의지를 갖고 한 것 같지 않다”고 전했다. 실제로 보직사퇴서는 수리되지 않고 있다.
영진위원들은 보직사퇴 제출 사실을 11일 저녁 전해들었다고 한다. 한 위원은 개인적인 견해임을 전제로 “당황스럽고 황당했다”고 말했다. “잘못한 실무 담당자에게 책임을 묻는 것은 동의가 되겠는데 전체 부서장한테 그렇게 하는 건 과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아무튼 문제를 더 복잡하게 꼬는 것 같아서 걱정입니다.”
한 영화계 인사는 이렇게 해석했다. “국정감사장에서 조 위원장이 쫓겨난 근본적 이유가 자신한테 있는데 그걸 감추려는 술수 같네요.” 영진위 국정감사가 19일로 미뤄진 근본 원인은 당시 의원들 발언에서 확인된다. “심사 외압의 불법, 영진위원들의 사퇴요구로 불신, 영화계와의 불통 등 3불 위원장은 스스로 용퇴하는 게 옳다”거나 “영화인, 영진위원, 문화부가 사퇴를 촉구했으니 삼진아웃으로 위원장 면허가 취소됐다”고 의원들은 목소리를 높였다. 현재 문화부는 영진위원들의 요청에 따라 조 위원장 해임과 관련한 법적 검토 작업을 진행중이다. 모철민 문화부 제1차관은 14일 기자간담회에서 영진위를 감사한 뒤 이번 국감 준비를 부실하게 한 담당자들에 대해 징계 조처를 하라고 영진위에 요구했다고 밝혔다.
징계 경위가 어찌됐든 자료 제출 실수의 귀책사유는 기관장인 조 위원장 책임이 크다. 그의 버티기로 식물인간이 된 영진위의 업무가 정상적으로 이뤄질 리 만무하다. 더구나 올해 국감 자료는 조 위원장이 유난히 꼼꼼히 챙긴 탓에 문방위 의원들은 제때 제대로 자료를 받기 어려웠다고 문방위원들의 보좌관들이 전하는 판이다.
최근 영진위에서 벌어지는 모습은 한 편의 부조리극을 연상시킨다. 조 위원장이 주연인 이 극은 막을 내릴 기미도 없다.
김진철 기자 nowhere@hani.co.kr
김진철 기자 nowher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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