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박완서씨가 젊은 시절 아기를 안고 밝게 웃고 있다.
작품 세계는…
전쟁의 상흔과 ‘기억 투쟁’
중산층 속물근성에 일침도
한국 페미니즘 문학 이끌어 인생 여정은…
전쟁통에 오빠 비참한 죽음
불혹 등단뒤 왕성한 활동중
남편·아들 잇따라 잃고 통곡 22일 세상을 뜬 작가 박완서의 문학은 ‘기억을 통한 복수’ 의지에서부터 출발했다. 전쟁 중 좌우 세력 사이에 끼인 오빠의 비참한 죽음을 겪은 작가는 그 고통스러운 경험을 ‘언젠가는 글로 쓰리라’는 증언의 욕구로 힘든 세월을 버텼다. 작가로서의 삶을 회고한 어느 산문에서 그는 이렇게 썼다.
“남들은 언제 그랬더냐 싶게 상처도 감쪽같이 아물리고 잘만 사는데, 유독 억울하게 당한 것 어리석게 속은 걸 잊지 못하고 어떡하든 진상을 규명해 보려는 집요하고 고약한 나의 성미가 훗날 글을 쓰게 했고 나의 문학정신의 뼈대가 되지 않았나 싶다.” 증언의 욕구와 기억을 통한 복수 의지는 등단작 <나목>에서부터 뚜렷했다. 1950년 겨울 서울을 무대로 삼은 이 소설에서 스무 살 여주인공은 폭격으로 어이없게 죽은 오빠들과 그 때문에 삶의 생기를 놓아 버린 어머니로 인해 황폐해진 자신의 청춘을 상대로 버거운 싸움을 이어 간다.
<나목>으로 시작된 그의 ‘기억 투쟁’은 <부처님 근처> <카메라와 워커>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틀니> <엄마의 말뚝> 같은 단편들로 이어진다. 하나뿐인 오빠를 삼켜 버리고 집안을 무너뜨린 전쟁에 대한 분노와 증언 의지는 이 소설들을 관류하는 일관된 태도라 할 수 있다. 90년대에 발표한 두 장편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와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에서도 전쟁에 할퀴인 비통한 가족사를 다시 곱씹을 정도로 작가에게 전쟁 체험은 절대적이었다.
초기 단편들에서 오빠의 죽음을 초래한 전쟁과의 싸움을 ‘일단락’한 작가는 70~80년대에는 장편 <휘청거리는 오후>와 <도시의 흉년>, 그리고 <주말농장> <저렇게 많이!> 등의 단편에서는 중산층의 허위의식과 속물근성을 날카롭게 꼬집었다.
이와 함께 장편 <살아 있는 날의 시작>과 <서 있는 여자> <그대 아직도 꿈꾸고 있는가>, 그리고 <지렁이 울음소리> <그 가을의 사흘 동안> <꿈꾸는 인큐베이터> 등의 단편을 통해 그는 한국 페미니즘 문학을 앞장서 이끌기도 했다. 여성문제에 대한 의식은 그가 20대 초에 결혼해서 마흔 살에 등단하기까지 평범한 전업주부로서 겪은 체험에서 빚어져 나왔다.
‘경험하지 않은 것은 쓰지 않는다’는 식의 체험주의적 태도는 박완서 문학을 관통하는 커다란 특징이었다. 그의 유일한 역사소설이라 할 <미망>은 조선 말부터 전쟁기까지를 배경 삼았는데, 이 작품에서도 작가는 자신이 직접 체험하지 않은 시절의 이야기는 어머니의 증언을 듣는 식으로 사실성과 구체성을 확보하고자 했다.
뛰어난 이야기꾼이었던 어머니한테서 어려서부터 들은 숱한 이야기들, 그리고 이를 들으면서 직접 확인한 ‘이야기의 힘’은 박완서 문학을 뒷받침하는 또 다른 축이었다. 작가는 ‘소설은 이야기다’라는 소박한 신념 아래 ‘뛰어난 이야기꾼이고 싶다’는 바람을 밝히기도 했는데, 그의 소설의 인기가 어디에서 연유하는지를 여기에서 확인할 수 있다.
당대의 대다수가 누리는 일상적 삶을 사실적으로 그리는 가운데 그 안에 깃든 상처 또는 거짓을 까발려 보이는 것이 박완서 소설의 방법론이다. 그의 작가적 시선이 가 닿는 곳은 얼핏 사소하고 당연하게만 보이는 일상의 세목들이다. 당연히 그의 소설은 이른바 세태 소설의 외양을 띠는데, 그러나 그 안에는 우리네 삶의 무겁고도 근본적인 문제들이 넉넉히 녹아 들어가 있는 것이다. 물 흐르듯 거침없으며 한껏 웃음을 자아내기까지 하는 유머러스한 문체로 치장한 그의 글을 속절없이 따라가노라면 독자는 어느새 세태의 비속성과 허무한 욕망을 향해 따끔하게 일침을 놓고자 하는 작가의 의도를 알아차리고는 새삼 통쾌하면서도 뜨끔한 복합감정에 사로잡히게 된다. 익숙한 소재에 친절한 메시지, 그리고 자연스러우면서도 읽는 맛을 돋우는 문장은 그의 소설이 많은 독자들에게 사랑받은 비결이었다.
문학성과 대중적 인기라는 두 마리 토끼를 한 손에 거머쥐고 거침없이 질주하는 듯하던 그의 작가 인생에 커다란 위기가 온 것은 1988년이었다. 그 해 5월과 8월 그는 남편과 아들을 잇따라 잃는다. 특히 젊고 창창한 외아들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그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어려서 잃은 아버지와 젊은 시절 먼저 보낸 오빠, 그리고 남편에 아들까지 집안의 남자들을 차례로 앗아 가는 운명의 심술에 그는 통곡해야 했다. 그는 서울을 떠나 부산의 수녀원에서 한동안 기거하다가 막내딸이 있는 미국에서 머물기도 했다. 당시 잡지에 연재하고 있던 <미망>을 6개월 정도 쉬어야 했지만, 그는 끝내 절망하여 주저앉지는 않았다. 한동안 숨을 고르며 자신에게 닥친 시련의 의미를 곱씹어 본 끝에 나온 것이 일기 <한 말씀만 하소서>와 중편소설 <나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이었다.
대작 <미망>을 힘겹게, 그러나 끈질기게 마무리한 그는 90년대에 들어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와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 두 자전적 장편을 통해 자신을 소설가의 길로 이끈 첫 자리를 차분히 돌아보았다.
남들보다 늦게 등단한 것을 벌충이라도 하듯 쉼 없이 글쓰기를 해 온 작가는 60대 이후로는 자신과 비슷한 또래 남녀 주인공들을 등장시켜 노년의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루었다. 소설집 <너무도 쓸쓸한 당신>과 <친절한 복희씨> 등이 그 산물이다.
2000년대 이후에도 장편 <아주 오래된 농담>과 <그 남자네 집>, 산문집 <호미> <두부> 등을 펴내며 ‘영원한 현역’으로 활동하던 그는 지난해 가을 산문집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를 생전의 마지막 책으로 출간했다. 이 책 서문에서 “또 책을 낼 수 있게 되어 기쁘다” “아직도 글을 쓸 수 있는 기력이 있어서 행복하다”는 소회를 밝혔던 그는 생전에 가 보지 못한 아름다운 길을 찾아 영영 떠났다.
고인과 가까웠던 문학평론가 김윤식 서울대 명예교수는 “박완서는 역사로부터 입은 고통을 자기 고백의 형식으로 표현해 낸 작가”라면서 “자신과 관련된 이야기만을 작품으로 쓰며, 그 작품들에서 자기를 통째로 드러냈다는 데에 박완서 문학의 개성과 힘이 있다”고 평가했다. 최재봉 기자 bong@hani.co.kr
전쟁의 상흔과 ‘기억 투쟁’
중산층 속물근성에 일침도
한국 페미니즘 문학 이끌어 인생 여정은…
전쟁통에 오빠 비참한 죽음
불혹 등단뒤 왕성한 활동중
남편·아들 잇따라 잃고 통곡 22일 세상을 뜬 작가 박완서의 문학은 ‘기억을 통한 복수’ 의지에서부터 출발했다. 전쟁 중 좌우 세력 사이에 끼인 오빠의 비참한 죽음을 겪은 작가는 그 고통스러운 경험을 ‘언젠가는 글로 쓰리라’는 증언의 욕구로 힘든 세월을 버텼다. 작가로서의 삶을 회고한 어느 산문에서 그는 이렇게 썼다.
“남들은 언제 그랬더냐 싶게 상처도 감쪽같이 아물리고 잘만 사는데, 유독 억울하게 당한 것 어리석게 속은 걸 잊지 못하고 어떡하든 진상을 규명해 보려는 집요하고 고약한 나의 성미가 훗날 글을 쓰게 했고 나의 문학정신의 뼈대가 되지 않았나 싶다.” 증언의 욕구와 기억을 통한 복수 의지는 등단작 <나목>에서부터 뚜렷했다. 1950년 겨울 서울을 무대로 삼은 이 소설에서 스무 살 여주인공은 폭격으로 어이없게 죽은 오빠들과 그 때문에 삶의 생기를 놓아 버린 어머니로 인해 황폐해진 자신의 청춘을 상대로 버거운 싸움을 이어 간다.
지난 1991년 여름 연길과 백두산 등을 돌아본 뒤 중국 베이징의 북한 음식점에서 일을 하는 북쪽 여성(한복 입은 이)과 함께 찍은 기념사진.
중국 티베트를 여행하던 중 티베트 여성들과 함께 차를 마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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