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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문화일반

“어른은 시큰둥한데 아이들이 좋아해 이거다 했죠”

등록 2012-03-12 21:11

가치를 생각하게 하는 교양지
10년간 학습지 홍수속 `꼿꼿’
“좌우 떠나 교육양극화 심각”
생활속 교육운동 연구소 발족
[어린이잡지 ‘고래가 그랬어’ 100호 낸 김규항씨]

10년 가까이 다달이 냈던 잡지 100권을 한 줄로 쌓으니 그의 키보다도 높게 올라갔다. 평소 사진 찍는 걸 정말 싫어한다는 그가 ‘책탑’ 앞에서 어색하게나마 이리저리 자세를 취한다. “100권이나 냈다는 의미 있는 사실을 세상에 좀 더 잘 알려야 하잖아요.”

2003년 처음 만들어진 월간 어린이 교양지 <고래가 그랬어>가 통권 100호를 냈다. 지난 10일 서울 마포에 있는 <고래…> 사무실에서 그날 오전 나온 100호를 손에 든 발행인 김규항(50·사진)씨는 무표정해 보이는 얼굴과 달리 “진짜 100권이 나왔네”라고 혼잣말을 하며 남몰래 감격한 듯 했다.

교과서와 학습지, 자기계발 책에 둘러싸인 한국 사회의 어린이와 부모들에게, <고래…>는 노동·환경·인권·민주주의 등의 가치를 이야기하고 어린이들이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도록 돕는 교양지로서 꾸준한 사랑을 받아왔다. 현재 4000여명의 정기구독자가 있고, 더 많은 아이들이 볼 수 있도록 돕는 후원단체 ‘고래동무’의 도움으로 3000여부가량을 어린이 도서관이나 공부방 등에 보낸다. 100호 발간은 별다른 광고나 홍보를 할 수 없는 넉넉지 못한 형편 속에서, 아이들에게 권할 수 없는 광고는 싣지 않는다는 원칙을 지키느라 늘 빈곤한 광고 수익의 한계를 딛고서 이뤄낸 값진 결실이다.

김씨는 100호 발간에 대해 “오로지 아이들이 <고래…>를 사랑해줬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라고 말했다. 보통 어른들이 좋다고 평가하는 어린이책은 정작 아이들에게 외면받기 쉬운데, <고래…>는 ‘아이들 스스로 좋아하는 책’으로 만들어왔기 때문에 꾸준한 사랑을 받았다는 것이다. 창간호를 내기 전에 시험삼아 만들었던 ‘준비호’를 어른들은 좋아했지만, 아이들 반응이 시큰둥한 걸 보고 이런 성찰이 시작됐다고 한다. “그 뒤 나온 창간호에 대해 어른들은 시큰둥한 대신 아이들이 좋아하는 걸 보고 ‘이거다’ 생각이 들었죠. 운영하면서 겪은 어려움은 이루 말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지만, ‘아이들이 좋아한다’는 것 하나를 믿고 계속 달려왔습니다.”

매호 어른들의 간여 없이 어린이들이 직접 벌이는 토론을 그대로 싣는 대표 꼭지인 ‘고래토론’이나 아이와 부모들이 보내오는 엽서들은 아이들의 적나라한 생각과 관심사를 그대로 보여준다. 창간 때 연재해 화제를 불러일으켰던 전태일 열사의 전기만화 <태일이>처럼, 학교에서 잘 가르치지 않는 노동이나 환경, 인권을 주제로 한 만화와 글들이 꾸준히 실린다. 단지 어떤 가치를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왜?’라고 더 깊게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 공통적인 특징이다. 그래서 발행인 김규항에 대해서는 ‘너무 교조적’이라며 싫어해도, 집에서는 아이들에게 <고래…>를 읽히는 가정도 많다고 한다. ‘<고래…>를 본 뒤 아이들이 집 안에서 민주주의를 요구해서 오히려 불편해졌다’는 농담도 가끔 듣는다고.

김씨는 100호에 실린 ‘발행인 삼촌’의 편지에서 “<고래…>를 만들기로 마음먹은 건 한국 어린이들이 너무나 불쌍해 보였기 때문”이라고 썼다. 군사독재가 끝나고 민주화가 된 지금에도 한국 어린이들은 밤늦게 학원을 돌아야 하는 등 도통 ‘자유와 인권’을 찾아보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는 ‘사람이 그러면 안 돼’ 등 ‘인간의 꼴’에 대한 교육이 사라진 대신 어떻게 하면 경쟁에서 이겨 ‘더 좋은 상품’이 될지에만 관심을 두는 교육만 남았다고 비판한다. “여기에는 진보·보수가 따로 없어요. 진보든 보수든 인텔리 계층은 자신의 신분을 세습하는 교육에 매진하고, 대다수 서민 대중들이 여기에 들러리를 서고 있어요. 진보·보수의 대립이 아니라 ‘교육의 양극화’가 가장 큰 문제입니다.”

한번은 한국에서 가장 잘산다고 알려진 동네 아이들이 모여서 ‘놀 시간이 너무 부족해’란 주제로 ‘고래토론’을 연 적이 있다고 한다. 몇몇 아이들이 “놀 시간을 희생해서 공부에 매진해야만, 나중에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고 내가 결혼하고 싶은 사람과도 결혼할 수 있다”는 주장을 폈고, 결국 결론처럼 굳어졌다. 편집진은 고심을 거듭한 끝에 이 아이들의 토론이 우리 사회 보편적인 아이들의 인식을 보여주지 못한다고 보고, 학업에 따른 놀 시간 부족에 대해 답답함을 호소하는 다른 지역 아이들의 토론으로 대체했다고 한다. 김씨는 “우리 사회 교육 양극화를 단적으로 드러내 보여주는 사례”라며 “<고래…>를 만들면서 가장 마음이 아팠던 일”로 꼽았다.

100호를 맞은 <고래…>가 비교적 안정기에 접어들었다고 본 김씨는 또다른 활동을 준비하고 있다. 그는 서민 대중들과 함께 실생활에서 교육운동을 실천하는 것을 목표로 최근 ‘고래교육연구소’를 만들었다. 연구소의 첫 활동은 ‘부모의 열 가지 약속’이란 제목의 서명운동을 퍼뜨리는 것. 아직 초안 단계인 열 가지 약속을 보면, ‘아이의 미래 행복을 위해 현재 행복을 빼앗지 않습니다’ ‘사교육과 대학 진학 여부는 아이와 민주적인 대화를 통해 결정합니다’ ‘아이의 직업 선택에 내가 가진 직업에 대한 편견을 강요하지 않습니다’ 등으로 겉보기엔 아주 ‘당연한 말씀’처럼 보인다. 그러나 김씨는 “실천하려면 정말 어려운 과제일 수 있다”며 “‘그 잡지 좋더라’ 얘기를 듣는 데 그치지 않고, 실제 삶의 변화를 이끌어내는 일로 이어졌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발행인이 ‘급진적’ ‘교조적’이라는 세간의 평가가 <고래…>에 혹시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치는 부분이 있지는 않을까? 김씨는 명쾌하게 대답했다. “<고래…>가 바로 나예요.” <고래…>는 ‘현실은 어쩔 수 없으니까’라는 말로 어린이의 자유와 인권을 손쉽게 앗아가는 세상에 ‘이건 아니지 않으냐’며 문제를 제기했는데, 자신도 <고래…>처럼 현실주의가 팽배한 세상 속에서 본질적인 가치의 중요성을 되새기려 한다는 얘기다. 글 최원형 기자 circle@hani.co.kr

사진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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