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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문화일반

남에 두고 온 어머니 시로 녹여낸 사모곡

등록 2005-08-02 18:01수정 2005-08-02 18:06

지난달 23일 백두산 천지 위에서 마주친 남의 시인 이기형(왼쪽)씨와 북의 시인 오영재씨가 손을 마주 잡은 채 실향의 아픔을 나누고 있다.
지난달 23일 백두산 천지 위에서 마주친 남의 시인 이기형(왼쪽)씨와 북의 시인 오영재씨가 손을 마주 잡은 채 실향의 아픔을 나누고 있다.
북에서 만난 작가들 ② 시인 오영재

 “자리가 비어 있구나/고은 신경림 백락청 현기영 김진경/그리고 간절히 우리를 청해 놓고/오지 못하는 사람들/(…)/지금쯤 어느 저지선을 헤치느라/온몸이 찢기어 피를 흘리고 있느냐(…)”

서울 마포구 아현동 민족문학작가회의 사무실에는 북의 시인 오영재(70)씨의 시 <전해다오>가 액자에 담겨 보관돼 있다. 1989년 3월 민족문학작가회의와 북의 조선작가동맹이 남북 작가회담을 열기로 했다가 무산된 뒤 북쪽 회담 대표로 판문점에서 기다리던 오씨가 즉석에서 쓴 시로 알려져 있다. 이 시는 이렇게 끝을 맺는다.

“전해다오/오늘은 우리 돌아서 가지만/마음만은 여기 판문점/이 회담장의 책상 위에 얹어 놓고/간다고/정의와 량심의 필봉을 높이 들고/통일의 길을 함께 갈/그 날을 기어이 함께 찾자고/바람아 구름아 전해다오.”

지난달 평양과 백두산 등지에서 열린 ‘6·15 공동선언 실천을 위한 민족작가대회’는 16년 전 무산된 남북 작가회담의 발전적 계승이었다. 그런 점에서 16년 전 <전해다오>라는 안타까운 시를 써야만 했던 오영재씨의 감회는 남다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게다가 오 시인은 그 자신이 남쪽 출신으로 부모와 형제를 남겨둔 채 월북한 ‘이산가족’이기도 하다.

16년전 작가회의 무산의 안타까움

1935년 전남 장성에서 태어난 그는 전쟁이 터지자 16살 어린 나이로 인민의용군에 입대했다. 일선 병사로서 전선을 누비며 동족상잔의 참상을 목격한 그는 다름 아닌 전쟁터에서 시를 쓰기 시작했다. 제대하고서 조선작가동맹 산하 작가학원을 1960년에 졸업한 그는 문학예술출판사 기자활동을 거쳐 본격적인 시인의 길로 접어들었다. 1960년대의 그의 시는 <조국이 사랑하는 처녀>(1961)와 <여기에 광부들의 일터가 있다>(1965)와 같은 서정시들에서 보듯 전후 복구 건설시기 노동자·농민의 건강하고 아름다운 면모를 예찬하는 특징을 보인다.

“조국의 아름다운 보화를/지상으로 끌어 올리며/마치 나무를 자래우는 뿌리와도 같이/보이지 않는 땅 속에서/근면하게 꽃을 피우며 열매를 익히는 사람들”(<여기에 광부들의 일터가 있다>)


이후 그는 <철의 서사시>(1981) <대동강>(1985) <인민의 아들>(1992)과 같은 서사시집을 내고 김일성상 계관시인 칭호와 노력영웅 칭호를 받는 등 북쪽 시단을 대표하는 시인으로 자리잡았다.

오영재 시인은 지난 2000년 8·15에 즈음한 이산가족 상봉단의 일원으로 서울에 와 형제들을 만났다. 당시 그는 북에서 어머니를 그리며 썼던 시를 남쪽 언론에 공개했는데, 어머니의 생존 소식을 접하고서 쓴 것과 끝내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확인한 뒤 쓴 시들이 섞여 있어서 독자들의 눈물샘을 자극했다.

“늙지 마시라/늙지 마시라, 어머니여/세월아, 가지 말라/통일 되어/우리 만나는 그날까지도”(<오마니! 늙지 마시라, 어머니여…>)

오마니, 왜 이리 일찍 가셨습니까

“차라리 몰랐더라면,/차라리 아들이 죽은 줄로 생각해 버리셨다면,/속고통 그리 크시었으랴…/그리워 밤마다 뜬눈으로 새우시어서/꿈마다 대전에서 평양까지 오가시느라 몸이 지쳐서…/그래서 더 일찍 가시었습니까./아, 이제는 이 세상에 계시지 않는/어머니 나의 엄마!/그래서 나는 더 서럽습니다./곽앵순 엄마!”(<슬픔>)

지난달 23일 새벽 백두산 천지 위에서 오영재 시인은 남쪽 이기형(88) 시인과 만나 두 사람만의 감회를 나누었다. 함경남도 함주 출신으로 월남한 이기형 시인은 오 시인을 보자마자 손을 부여잡고 울먹이며 말했다. “어머니를 북에 두고 내려온 나와 어머니를 남에 두고 올라온 선생은 같은 처지요. 같은 불효자야.” 오영재 시인은 다만 눈물로 답할 따름이었다.

글·사진 최재봉 문학전문기자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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