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월17일 오후 서울 마포구 상암동 영상물등급위원회 심사실에서 위원들이 심의할 영하를 관람하고 있다. 위원들은 하루 평균 5~7시간 동안 3~4편을 본 뒤 등급에 대한 의견을 내놓는다.
[토요판] 르포
영상물등급심의위원회 심의 현장
영상물등급심의위원회 심의 현장
영화가 끝났다. 깜깜했던 회의실에 불이 켜졌다. 20평쯤이나 될까. 작은 교실만한 공간이다. 7명의 남녀가 말없이 앞에 놓인 컴퓨터 자판을 치기 시작했다. 주제·선정성·폭력성·대사·공포·약물·모방 위험. 7가지 등급분류 기준에 따라 방금 본 영화의 등급에 대한 의견을 한 문단 안팎의 짧은 글로 쓴다. 7분이 지났다. 새 영화가 시작되고 불이 다시 꺼졌다. 미처 글을 완성하지 못해 급히 새 영화를 보면서 마무리하는 이들도 있다.
<줄탁동시>는 왜 제한상영가?
한 위원은 남성간 구강성교가
혐오감을 줄 수 있다고 말했다
또다른 위원은 선정성보다는
어두운 주제 때문이라고 했다 등급을 정하는 잣대는
위원들마다 다른 듯했다
지순한 남녀사랑은 관람가
유부남 사랑이면 청불이라는
기준을 밝힌 위원도 있었다 지난달 13일 서울 상암동 영상물등급위원회(영등위)의 영화등급분류소위원회(등급분류소위) 회의실에서는 ‘소위 위원’들이 참석한 가운데 영화 상영등급 심의가 이뤄졌다. 우리나라에서 영화는 영등위로부터 상영등급을 받아야 극장에 걸 수 있다. 전체 관람가, 12살 이상 관람가(12살가), 15살 이상 관람가(15살가), 청소년 관람 불가(청불). 이 네 등급에 끼지 못하고 ‘제한상영가’ 등급으로 판정을 받으면 일반 극장에서 상영할 수 없다. 영등위의 결정에 따라 영화에는 ‘어떤 연령대의 관객들에게 보일 수 있는지’ 자격이 매겨지는 것이다. 올해 초엔 한국 사회 하층민으로 살아가는 탈북 청소년 등의 이야기를 다룬 한국 영화 <줄탁동시>가 선정성 등을 이유로 제한상영가 판정을 받았다. 영화인들은 영등위의 등급 분류에 불만과 성토를 쏟아냈다. 누가, 어떤 원칙에 따라 영화와 관객의 만남을 결정하는지 들여다봤다. 심의수요 급증…아침부터 살육장면 보는 고역
아침 9시. 영등위 등급분류소위 회의실로 7명의 위원이 속속 ‘출근’했다. 9명의 위원 중 2명은 사정이 있어 ‘결석’했다. 오늘 볼 영화는 네편. 식인물고기가 등장하는 공포영화 <피라냐 3DD>가 첫 영화다. 한 위원은 아침부터 잔인한 살육 장면을 보는 일이 괴롭다고 했다. 두번째 영화도 신체 훼손 장면이 쉴 틈 없이 이어지는 판타지 공포물 <플래닛 랩터>다. 살인 공룡의 공격에 사람의 목이 잘리고 상반신이 뜯겨나가는 장면이 반복된다. “아휴, 쯧쯧.” “거 참, 목을 계속 잘라내네.” 간간이 가벼운 탄식이 터져 나왔다. 한 위원은 “이 정도는 약과”라며 “일반 관객이었다면 보지 않았을 영화를 의무적으로 보는 것도 정말 고역”이라고 토로했다. 소위 위원들은 하루 평균 5~7시간 동안 3~4편을 본다. 이날은 4편을 오전 9시부터 오후 2시께까지 봤다. 휴식 시간은 없다. 한 영화가 끝나면 5~10분가량 등급에 대한 의견을 각자 작성해 내놓고 의장이 내용을 취합해 다수결에 따라 그 자리에서 등급을 정한다. “<플래닛 랩터>는 5 대 2로 청불 결정을 내립니다.” 이날 임시의장을 맡은 위원이 등급 결정 내용을 공지했다. 다음 영화는 이미 시작된 상태다. 대부분 영화는 서면 의견을 취합해 등급이 결정된다. 의견이 갈릴 때는 간단히 토론을 하기도 한다. 그래도 결론이 나지 않으면 의장이 등급을 결정한다. 위원들은 의장의 발언을 들으면서 영화를 보기 시작한다. “체력 부담이 크죠. 쉬는 시간이라도 있으면 좋겠는데 봐야 할 영화가 많으니까 어쩔 수 없어요.”(한 위원) 낮 12시. 점심시간도 따로 없다. 불 꺼진 회의실 뒤쪽 의자에서 배달된 도시락을 먹으며 영화를 계속 본다. 회의실에서 점심과 저녁 식사를 모두 때우는 날도 있다. 오후 1시. 딱딱한 의자에 앉아 4시간째다. 몸이 뻐근해진다. 한 위원이 자리에서 일어나 간단한 스트레칭을 한다. 한 위원은 목베개를 한 채 영화를 본다. 졸음과 피로를 쫓으려고 회의실에 비치된 커피와 빵, 과자 같은 간식을 틈틈이 챙겨 먹는다. “2~3년 전만 해도 지금처럼 하루에 4편이나 보진 않았다고 하는데, 지난해부터 갑자기 편수가 늘었어요.” 지난해엔 영화 895편을 보고 등급을 분류했다. 2010년 612건에 비해 크게 늘어났다. 올해는 지난 5월까지 373편을 봤다. 한달에 75편가량을 본 것이다. 평일에 매일 모이는 것도 모자라, 한달에 두번 정도는 토요일에도 모여 회의를 했다고 한다. 최근 ‘심의 대상’ 영화 편수가 급증한 것은 “케이블 채널과 종합편성채널 등 영화를 트는 창구가 많아지면서 등급 분류를 신청하는 영화가 큰 폭으로 늘었기 때문”(영등위 안치완 정책홍보 과장)이라고 한다. 영화 배급사·제작사 등에서 케이블 채널 등에 영화를 판매할 때, 극장에서 상영했던 영화는 더 높은 금액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극장에서 1회만 상영하고 케이블 채널 등으로 직행하겠다는 생각으로 제작하는 영화들 때문에 등급분류소위 업무가 크게 늘었다는 이야기다. 에로영화만 3~4편 연속 봐야 하는 날도 있다. 한 남성 위원은 “지금은 현재의 소위 위원들이 꾸려진 지 1년이 다 돼 가니까 서로 익숙해져서 나아졌지만, 소위 구성 초반엔 낯선 사람들과 에로영화를 보는 일이 영 어색했다”고 말했다. 이날 마지막 영화는 일본 에로영화. “잠깐만 나가 주세요.” 기자에게 한 여성 위원이 다급히 말했다. 잠시 뒤 또다른 위원이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기자에게 “이런 영화를 처음 보는 사람(기자)과 보는 게 불편하다는 의견이 나왔다”며 양해를 구했다. 할 수 없이 자리를 피해야만 했다. “청소년 보호”에 “사실상 검열” 비판 목소리
올해 들어 제한상영가 판정을 받은 영화는 <줄탁동시>와 <아버지는 개다>, <너무 밝히는 소녀 알마>, <그녀는 좀비를 좋아해> 등 네편이다. <줄탁동시>와 <너무 밝히는 소녀 알마>는 일부 장면을 삭제하거나 모자이크 처리한 뒤 재심을 요청해 청불 등급을 받아 극장에서 개봉했다. 지난해엔 <자가당착> 등 7편이 제한상영가 판정을 받았다. 영화계에선 영등위의 등급 결정이 표현의 자유를 위축시킨다고 지적하고 있다. 한국독립영화협회 이지연 사무국장은 제한상영가가 창작자들에게 ‘자기 검열’을 강요하는 수단이 되고 있다고 꼬집는다. 감독들 처지에선 제한상영가가 나오면 영화를 틀 수가 없는 만큼, 그 이하의 등급을 받기 위해 스스로 문제가 될 만한 장면이나 주제를 피하게 된다는 것이다. 제한상영가 결정의 법적 근거는 영화 및 비디오물의 진흥에 관한 법률 제29조 2항의 ‘선정성·폭력성·사회적 행위 등의 표현이 과도하여 인간의 보편적 존엄, 사회적 가치, 선량한 풍속 또는 국민 정서를 현저하게 해할 우려가 있는 영화는 상영 및 광고 선전에 일정한 제한이 필요하다’는 규정이다. 실제 ‘심의’ 과정에서 등급을 정하는 잣대는 위원들마다 다른 듯했다. 한 위원은 “지고지순한 남녀의 사랑이면 청소년 관람 가능, 유부남과 유부녀의 사랑이면 청소년 관람 불가”라는 기준을 밝히기도 했다. <줄탁동시>는 9명의 위원 가운데 제한상영가와 청불 의견이 6 대 3으로 맞서 제한상영가로 결정됐다. 제한상영가 의견을 냈다는 한 위원은 “남성 간의 구강성교 장면이 풀샷으로 세 컷이나 나오는 부분이 혐오감을 줄 수 있다”는 점을 꼽았다. 또다른 위원은 선정성이 아니라 영화의 주제 때문에 제한상영가 의견을 냈다고 했다. 그는 “사회의 가장 어두운 곳 이야기를 지나치게 암울한 방식으로 그려서, 건전한 사회의식에 혼란을 줄 수 있다고 봤다”며 이런 우려를 덧붙였다. “외국 사람이 그 영화를 봤을 때 우리나라의 국격을 떨어뜨릴 수 있지 않겠습니까.” 반면 또다른 위원은 “포르노그래피가 아닌 이상 일부 장면이나 전체적인 맥락 때문에 ‘제한상영’이 돼야 한다고 보진 않는다”며 ‘제한상영가’ 등급 자체에 대한 회의를 드러내기도 했다. 소위원회 내부에서도 “제한상영가 극장이 없는 상황에서 제한상영가라는 등급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모순”이란 시각이 존재한다. 영화의 사회인식을 문제삼을 때도 있다. 지난해 제한상영가 판정을 받은 <자가당착>에 대해 한 위원은 “영화가 끊임없이 대통령을 비하하는가 하면, 박근혜 의원을 홍보하는 사람의 목을 마네킹이 자르는 장면이 나오는 등 부적절한 사회인식이 깔려 있어 제한상영가 의견을 냈다”고 말했다. 2009년엔 여고생과 이주노동자의 우정을 다룬 <반두비>가 청불 등급을 받았다. 당시 영등위는 ‘여고생이 불법 스포츠마사지업소에서 아르바이트한다는 내용이 선정적으로 묘사됐다’는 의견을 내놨다. 이에 대해 한국영화제작자협회 최현용 사무국장은 “쥐새끼 등의 표현과 뉴타운 공약, 교회 등을 비판하는 내용이 문제가 됐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줄탁동시>와 <자가당착>은 베를린영화제 등 해외 영화제에 초청된 작품이다. 이에 대해 류종섭 영등위 영화부장은 “등급 분류는 영화의 질을 판단하는 게 아니라 적정한 관람층을 일러주는 정보일 뿐”이라고 답했다. 제한상영가 결정은 해당 영화엔 사형 선고나 마찬가지다. 국내에 제한상영가 영화를 틀 수 있는 전용 극장이 없기 때문이다. 영화인들이 제한상영가 결정에 민감해하는 이유다. 조금환 등급분류소위 의장은 “등급 분류의 첫째 목표는 청소년 보호”라고 강조했다. 하지만 영화계에선 ‘청소년 보호’란 명목을 내세워 영등위가 사실상 검열까지 하고 있다는 주장도 나온다. 이에 대해 박선이 영등위원장은 “영등위가 표현의 자유를 보장해야 할 의무는 없다. 영등위의 임무는 영상물의 공공성과 윤리성을 확보하고, 청소년을 보호하는 것”이라고 거듭 강조했다. 한 소위 위원은 “제한상영가 등급 자체가 아니라 이런 영화를 틀 수 있는 인프라가 없다는 현실이 진짜 문제인데 영등위에 화살이 날아오는 건 잘못”이라고 주장했다.
전문위원제와 등급 세분화의 필요성
영화계에선 등급분류소위 위원 확충 필요성이 제기된 상태다. 등급 분류 수요가 급증해 등급 분류 신청부터 결정까지 한달 가까이 기다려야 하는 일도 잦고, 시간에 쫓겨 충분한 토론이 부족하다는 문제의식에서다. 영등위의 개선책은 전문위원제다. 현재 소위에 ‘참고 의견’을 전달하는 예비등급분류위원제에 견줘 좀더 권한을 부여한 형태다. 한 팀인 현행 예비등급분류위원제 대신 전문위원제가 도입되면 3명씩 두 팀으로 나뉜 전문위원들이 영화를 보고 등급을 매기게 된다. 전문위원들이 특정 영화에 대해 이견 없이 전체관람가와 청불 등급을 매길 경우, 해당 등급이 애초 등급 분류를 신청한 쪽의 희망과 같으면 소위는 지금처럼 모든 영화를 다 보는 대신 전문위원들의 등급 결정에 동의하는 방식으로 간다는 것이다. 영등위 쪽은 전문위원제가 도입되면 소위 위원의 부담이 크게 줄고 등급 분류가 적체되는 문제도 개선될 것으로 보고 있다. 전체 관람가부터 제한상영가까지 5개로 나뉘는 현행 등급을 세분화해야 한다는 데는 소위 위원들과 영화인들이 모두 동의한다. 한 위원은 “12살가인지 15살가인지 청불인지 나누기가 모호할 때가 많은데 고민을 하다가 높은 등급을 주는 경우가 잦다. 15살가와 청불 사이에서 고민되면 청불을 주게 된다”며 ‘부모 동반’ 같은 좀더 자세한 분류 기준이 마련되면 위원들도 수월해질 것이라고 말했다. 현 위원들이 1년 임기를 마치는 8월이면 소위가 새로 꾸려지고 전문위원제가 본격 시행된다. 현재 소위 위원은 30대 후반이 1명, 40대와 50대가 각각 4명이다. 영화계에선 소위 위원진이 보수적 인사가 다수인데다 20~30대보다는 40~50대 위주로 구성돼 있어 등급 판단이 보수성을 띤다는 지적도 있다. 표현의 자유를 중시하는 영화인과 젊은 연령층이 보강돼야 한다는 요구도 나온다. 한국영화제작자협회 최현용 사무국장은 “지금의 영등위는 사회적인 상식의 수준을 못 따라가고 있다”며 “영등위가 형식적으론 민간기구이지만 내용적으로 국가기구다. 영상물의 내용 규제가 정권이나 특정 집단에 의해 좌우될 소지가 높다”고 주장했다. 또 그는 “영등위를 대체할 민간 자율 등급분류기구를 만들자는 움직임도 영화계에서 본격화되고 있다”고 말했다. 전문위원제라는 ‘효율성’ 측면의 개선책을 내놓은 영등위와, 영등위 기구 자체의 성격에 의문을 제기하며 ‘새로운 민간 자율기구 출범’ 논의까지 진행중인 영화계의 목소리가 어떻게 절충점을 찾을 수 있을지 주목된다. 글 박보미 기자 bomi@hani.co.kr 사진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한겨레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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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원들마다 다른 듯했다
지순한 남녀사랑은 관람가
유부남 사랑이면 청불이라는
기준을 밝힌 위원도 있었다 지난달 13일 서울 상암동 영상물등급위원회(영등위)의 영화등급분류소위원회(등급분류소위) 회의실에서는 ‘소위 위원’들이 참석한 가운데 영화 상영등급 심의가 이뤄졌다. 우리나라에서 영화는 영등위로부터 상영등급을 받아야 극장에 걸 수 있다. 전체 관람가, 12살 이상 관람가(12살가), 15살 이상 관람가(15살가), 청소년 관람 불가(청불). 이 네 등급에 끼지 못하고 ‘제한상영가’ 등급으로 판정을 받으면 일반 극장에서 상영할 수 없다. 영등위의 결정에 따라 영화에는 ‘어떤 연령대의 관객들에게 보일 수 있는지’ 자격이 매겨지는 것이다. 올해 초엔 한국 사회 하층민으로 살아가는 탈북 청소년 등의 이야기를 다룬 한국 영화 <줄탁동시>가 선정성 등을 이유로 제한상영가 판정을 받았다. 영화인들은 영등위의 등급 분류에 불만과 성토를 쏟아냈다. 누가, 어떤 원칙에 따라 영화와 관객의 만남을 결정하는지 들여다봤다. 심의수요 급증…아침부터 살육장면 보는 고역
아침 9시. 영등위 등급분류소위 회의실로 7명의 위원이 속속 ‘출근’했다. 9명의 위원 중 2명은 사정이 있어 ‘결석’했다. 오늘 볼 영화는 네편. 식인물고기가 등장하는 공포영화 <피라냐 3DD>가 첫 영화다. 한 위원은 아침부터 잔인한 살육 장면을 보는 일이 괴롭다고 했다. 두번째 영화도 신체 훼손 장면이 쉴 틈 없이 이어지는 판타지 공포물 <플래닛 랩터>다. 살인 공룡의 공격에 사람의 목이 잘리고 상반신이 뜯겨나가는 장면이 반복된다. “아휴, 쯧쯧.” “거 참, 목을 계속 잘라내네.” 간간이 가벼운 탄식이 터져 나왔다. 한 위원은 “이 정도는 약과”라며 “일반 관객이었다면 보지 않았을 영화를 의무적으로 보는 것도 정말 고역”이라고 토로했다. 소위 위원들은 하루 평균 5~7시간 동안 3~4편을 본다. 이날은 4편을 오전 9시부터 오후 2시께까지 봤다. 휴식 시간은 없다. 한 영화가 끝나면 5~10분가량 등급에 대한 의견을 각자 작성해 내놓고 의장이 내용을 취합해 다수결에 따라 그 자리에서 등급을 정한다. “<플래닛 랩터>는 5 대 2로 청불 결정을 내립니다.” 이날 임시의장을 맡은 위원이 등급 결정 내용을 공지했다. 다음 영화는 이미 시작된 상태다. 대부분 영화는 서면 의견을 취합해 등급이 결정된다. 의견이 갈릴 때는 간단히 토론을 하기도 한다. 그래도 결론이 나지 않으면 의장이 등급을 결정한다. 위원들은 의장의 발언을 들으면서 영화를 보기 시작한다. “체력 부담이 크죠. 쉬는 시간이라도 있으면 좋겠는데 봐야 할 영화가 많으니까 어쩔 수 없어요.”(한 위원) 낮 12시. 점심시간도 따로 없다. 불 꺼진 회의실 뒤쪽 의자에서 배달된 도시락을 먹으며 영화를 계속 본다. 회의실에서 점심과 저녁 식사를 모두 때우는 날도 있다. 오후 1시. 딱딱한 의자에 앉아 4시간째다. 몸이 뻐근해진다. 한 위원이 자리에서 일어나 간단한 스트레칭을 한다. 한 위원은 목베개를 한 채 영화를 본다. 졸음과 피로를 쫓으려고 회의실에 비치된 커피와 빵, 과자 같은 간식을 틈틈이 챙겨 먹는다. “2~3년 전만 해도 지금처럼 하루에 4편이나 보진 않았다고 하는데, 지난해부터 갑자기 편수가 늘었어요.” 지난해엔 영화 895편을 보고 등급을 분류했다. 2010년 612건에 비해 크게 늘어났다. 올해는 지난 5월까지 373편을 봤다. 한달에 75편가량을 본 것이다. 평일에 매일 모이는 것도 모자라, 한달에 두번 정도는 토요일에도 모여 회의를 했다고 한다. 최근 ‘심의 대상’ 영화 편수가 급증한 것은 “케이블 채널과 종합편성채널 등 영화를 트는 창구가 많아지면서 등급 분류를 신청하는 영화가 큰 폭으로 늘었기 때문”(영등위 안치완 정책홍보 과장)이라고 한다. 영화 배급사·제작사 등에서 케이블 채널 등에 영화를 판매할 때, 극장에서 상영했던 영화는 더 높은 금액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극장에서 1회만 상영하고 케이블 채널 등으로 직행하겠다는 생각으로 제작하는 영화들 때문에 등급분류소위 업무가 크게 늘었다는 이야기다. 에로영화만 3~4편 연속 봐야 하는 날도 있다. 한 남성 위원은 “지금은 현재의 소위 위원들이 꾸려진 지 1년이 다 돼 가니까 서로 익숙해져서 나아졌지만, 소위 구성 초반엔 낯선 사람들과 에로영화를 보는 일이 영 어색했다”고 말했다. 이날 마지막 영화는 일본 에로영화. “잠깐만 나가 주세요.” 기자에게 한 여성 위원이 다급히 말했다. 잠시 뒤 또다른 위원이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기자에게 “이런 영화를 처음 보는 사람(기자)과 보는 게 불편하다는 의견이 나왔다”며 양해를 구했다. 할 수 없이 자리를 피해야만 했다. “청소년 보호”에 “사실상 검열” 비판 목소리
올해 들어 제한상영가 판정을 받은 영화는 <줄탁동시>와 <아버지는 개다>, <너무 밝히는 소녀 알마>, <그녀는 좀비를 좋아해> 등 네편이다. <줄탁동시>와 <너무 밝히는 소녀 알마>는 일부 장면을 삭제하거나 모자이크 처리한 뒤 재심을 요청해 청불 등급을 받아 극장에서 개봉했다. 지난해엔 <자가당착> 등 7편이 제한상영가 판정을 받았다. 영화계에선 영등위의 등급 결정이 표현의 자유를 위축시킨다고 지적하고 있다. 한국독립영화협회 이지연 사무국장은 제한상영가가 창작자들에게 ‘자기 검열’을 강요하는 수단이 되고 있다고 꼬집는다. 감독들 처지에선 제한상영가가 나오면 영화를 틀 수가 없는 만큼, 그 이하의 등급을 받기 위해 스스로 문제가 될 만한 장면이나 주제를 피하게 된다는 것이다. 제한상영가 결정의 법적 근거는 영화 및 비디오물의 진흥에 관한 법률 제29조 2항의 ‘선정성·폭력성·사회적 행위 등의 표현이 과도하여 인간의 보편적 존엄, 사회적 가치, 선량한 풍속 또는 국민 정서를 현저하게 해할 우려가 있는 영화는 상영 및 광고 선전에 일정한 제한이 필요하다’는 규정이다. 실제 ‘심의’ 과정에서 등급을 정하는 잣대는 위원들마다 다른 듯했다. 한 위원은 “지고지순한 남녀의 사랑이면 청소년 관람 가능, 유부남과 유부녀의 사랑이면 청소년 관람 불가”라는 기준을 밝히기도 했다. <줄탁동시>는 9명의 위원 가운데 제한상영가와 청불 의견이 6 대 3으로 맞서 제한상영가로 결정됐다. 제한상영가 의견을 냈다는 한 위원은 “남성 간의 구강성교 장면이 풀샷으로 세 컷이나 나오는 부분이 혐오감을 줄 수 있다”는 점을 꼽았다. 또다른 위원은 선정성이 아니라 영화의 주제 때문에 제한상영가 의견을 냈다고 했다. 그는 “사회의 가장 어두운 곳 이야기를 지나치게 암울한 방식으로 그려서, 건전한 사회의식에 혼란을 줄 수 있다고 봤다”며 이런 우려를 덧붙였다. “외국 사람이 그 영화를 봤을 때 우리나라의 국격을 떨어뜨릴 수 있지 않겠습니까.” 반면 또다른 위원은 “포르노그래피가 아닌 이상 일부 장면이나 전체적인 맥락 때문에 ‘제한상영’이 돼야 한다고 보진 않는다”며 ‘제한상영가’ 등급 자체에 대한 회의를 드러내기도 했다. 소위원회 내부에서도 “제한상영가 극장이 없는 상황에서 제한상영가라는 등급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모순”이란 시각이 존재한다. 영화의 사회인식을 문제삼을 때도 있다. 지난해 제한상영가 판정을 받은 <자가당착>에 대해 한 위원은 “영화가 끊임없이 대통령을 비하하는가 하면, 박근혜 의원을 홍보하는 사람의 목을 마네킹이 자르는 장면이 나오는 등 부적절한 사회인식이 깔려 있어 제한상영가 의견을 냈다”고 말했다. 2009년엔 여고생과 이주노동자의 우정을 다룬 <반두비>가 청불 등급을 받았다. 당시 영등위는 ‘여고생이 불법 스포츠마사지업소에서 아르바이트한다는 내용이 선정적으로 묘사됐다’는 의견을 내놨다. 이에 대해 한국영화제작자협회 최현용 사무국장은 “쥐새끼 등의 표현과 뉴타운 공약, 교회 등을 비판하는 내용이 문제가 됐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줄탁동시>와 <자가당착>은 베를린영화제 등 해외 영화제에 초청된 작품이다. 이에 대해 류종섭 영등위 영화부장은 “등급 분류는 영화의 질을 판단하는 게 아니라 적정한 관람층을 일러주는 정보일 뿐”이라고 답했다. 제한상영가 결정은 해당 영화엔 사형 선고나 마찬가지다. 국내에 제한상영가 영화를 틀 수 있는 전용 극장이 없기 때문이다. 영화인들이 제한상영가 결정에 민감해하는 이유다. 조금환 등급분류소위 의장은 “등급 분류의 첫째 목표는 청소년 보호”라고 강조했다. 하지만 영화계에선 ‘청소년 보호’란 명목을 내세워 영등위가 사실상 검열까지 하고 있다는 주장도 나온다. 이에 대해 박선이 영등위원장은 “영등위가 표현의 자유를 보장해야 할 의무는 없다. 영등위의 임무는 영상물의 공공성과 윤리성을 확보하고, 청소년을 보호하는 것”이라고 거듭 강조했다. 한 소위 위원은 “제한상영가 등급 자체가 아니라 이런 영화를 틀 수 있는 인프라가 없다는 현실이 진짜 문제인데 영등위에 화살이 날아오는 건 잘못”이라고 주장했다.
줄탁동시
너무 밝히는 소녀 알마
영화계에선 등급분류소위 위원 확충 필요성이 제기된 상태다. 등급 분류 수요가 급증해 등급 분류 신청부터 결정까지 한달 가까이 기다려야 하는 일도 잦고, 시간에 쫓겨 충분한 토론이 부족하다는 문제의식에서다. 영등위의 개선책은 전문위원제다. 현재 소위에 ‘참고 의견’을 전달하는 예비등급분류위원제에 견줘 좀더 권한을 부여한 형태다. 한 팀인 현행 예비등급분류위원제 대신 전문위원제가 도입되면 3명씩 두 팀으로 나뉜 전문위원들이 영화를 보고 등급을 매기게 된다. 전문위원들이 특정 영화에 대해 이견 없이 전체관람가와 청불 등급을 매길 경우, 해당 등급이 애초 등급 분류를 신청한 쪽의 희망과 같으면 소위는 지금처럼 모든 영화를 다 보는 대신 전문위원들의 등급 결정에 동의하는 방식으로 간다는 것이다. 영등위 쪽은 전문위원제가 도입되면 소위 위원의 부담이 크게 줄고 등급 분류가 적체되는 문제도 개선될 것으로 보고 있다. 전체 관람가부터 제한상영가까지 5개로 나뉘는 현행 등급을 세분화해야 한다는 데는 소위 위원들과 영화인들이 모두 동의한다. 한 위원은 “12살가인지 15살가인지 청불인지 나누기가 모호할 때가 많은데 고민을 하다가 높은 등급을 주는 경우가 잦다. 15살가와 청불 사이에서 고민되면 청불을 주게 된다”며 ‘부모 동반’ 같은 좀더 자세한 분류 기준이 마련되면 위원들도 수월해질 것이라고 말했다. 현 위원들이 1년 임기를 마치는 8월이면 소위가 새로 꾸려지고 전문위원제가 본격 시행된다. 현재 소위 위원은 30대 후반이 1명, 40대와 50대가 각각 4명이다. 영화계에선 소위 위원진이 보수적 인사가 다수인데다 20~30대보다는 40~50대 위주로 구성돼 있어 등급 판단이 보수성을 띤다는 지적도 있다. 표현의 자유를 중시하는 영화인과 젊은 연령층이 보강돼야 한다는 요구도 나온다. 한국영화제작자협회 최현용 사무국장은 “지금의 영등위는 사회적인 상식의 수준을 못 따라가고 있다”며 “영등위가 형식적으론 민간기구이지만 내용적으로 국가기구다. 영상물의 내용 규제가 정권이나 특정 집단에 의해 좌우될 소지가 높다”고 주장했다. 또 그는 “영등위를 대체할 민간 자율 등급분류기구를 만들자는 움직임도 영화계에서 본격화되고 있다”고 말했다. 전문위원제라는 ‘효율성’ 측면의 개선책을 내놓은 영등위와, 영등위 기구 자체의 성격에 의문을 제기하며 ‘새로운 민간 자율기구 출범’ 논의까지 진행중인 영화계의 목소리가 어떻게 절충점을 찾을 수 있을지 주목된다. 글 박보미 기자 bomi@hani.co.kr 사진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한겨레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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