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태호 작가. 한겨레TV 영상 갈무리.
북하니-한겨레TV 공동기획, 2030 여성들을 위한 감성 토크
[현주의 책 6회] 〈미생〉 윤태호 만화가 편
[현주의 책 6회] 〈미생〉 윤태호 만화가 편
[현주의 1분 서평]
“누구나 자신만의 바둑이 있다” 인생은 거대한 바둑판이다. 그 위에 던지는 오늘의 한 수. 만화가 윤태호의 ‘아직 살아 있지 못한 자들의 이야기’ <미생>은 기업이라는 거대한 판 위에 바둑돌처럼 존재하는 샐러리맨들의 삶을 그린다. 원 인터내셔널 종합상사 인턴사원 장그래의 어린 시절 꿈은 프로 바둑 기사였지만 입단에 실패하고 취업의 문에 버려졌다. 바둑밖에 몰랐던 삶에서 철저히 바둑을 지운 삶으로. 숨 돌릴 틈 없이 펼쳐지는 종합 상사의 직장생활이 신입사원 장그래와 ‘일 중독’ 오 과장, 든든한 멘토 김대리를 중심으로 펼쳐진다. 아직 살아 있지 못한 ‘미생’에서 언젠가 도달할 ‘완생’을 향해 오늘도 한 수 한 수 걸어가는 대한민국 직장인들에게. 만화가 윤태호는 “누구나 자신만의 바둑이 있다”고 훈수한다. 전현주 북하니 에디터 bookhani@hani.co.kr [박 기자·조 피디의 제작 후기]
누구도 대체할 수 없는 ‘윤태호의 고유성’을 보다 판 위에서 비틀거리는 인생, <미생>. 바둑의 한 수 한 수처럼 펼쳐지는 인턴 장그래의 대기업 직장생활 적응기. 바둑에 대해서 아는 것이라고는 흰 돌과 검은 돌이 네모판에서 집짓기 싸움으로 승부를 가린다는 정도의 지식밖에 없지만, 판 위에서 비틀거리는 군상들의 모습이 남 일 같지 않아 금방 빠져들게 된다. 바둑과 직장생활에 대한 소름 끼치는 디테일. 작가의 뛰어나 취재력이 밑바탕이 되었겠지만, 웹툰으로 연재하면서 댓글 속에 담긴 독자들의 가슴 절절한 경험담은 작품에 생기를 불어넣었다. 독자의 참여로 진화하는 작품을 만들고 있다는 점에서 미생은 흥미로운 연구대상이다. 훗날 누군가 ‘디지털 소통이 윤태호의 미생에 미친 상호작용 연구’(?) 따위의 제목으로 논문을 쓰게 될지도…. 윤태호 작가가 이 작품에서 사회문제를 드러내는 방식도 눈여겨봐야 할 것 같다. “사회인식은 작가로서 당연히 가져야 할 문제의식”이라고 말하는 윤 작가는 누구보다 판, 사회, 시스템 등의 문제를 깊이 있게 관찰하고 그것의 모순을 집요하게 추궁한다. 그러나 그것은 당위나 논리, 주장이 아니라 현실 속에서 자연스럽게 끄집어낸 이야기일 뿐이다.(그의 말처럼 수많은 사회현상이라는 레이어에서 가장 민감한 레이어 하나를 끄집어내는 것처럼) 그리고, 상식과 합리성에 기초해 문제제기의 방향을 잡는다. 그러면서 작가는 자기만의 스토리텔링 전략에 직업적 소명을 덧붙여 가치화한다. “종로 거리에 가면 무수하게 마주치는 사람들, 아이콘으로 뭉뚱그려지는 샐러리맨들, 그 사람들 한명 한명이 삶에 색을 칠해주고 싶은 욕심이 있다.” 판을 관찰하고 묘사하는 그이지만, 자신에게 주어진 판에서는 직업인으로서 길을 뚜벅뚜벅 걸어가려 한다. 작가로서 희망에 대해 그는 “나이가 먹어서도 누구도 대체할 수 없는 나만의 고유성으로 젊은 작가들과 나란히 어깨 싸움을 하고 싶은 작가가 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가 쓴 ‘고유성’이라는 단어는 40분 인터뷰를 관통하는 워딩 가운데 단연 최고였다. 후기의 후기. 촬영 당일 윤태호 작가는 <미생> 웹툰 마감을 하느라 날을 샜고, 진행을 맡은 전현주씨는 책을 읽고 큐시트를 작성하느라 날을 샜다. 그리고 나와 조소영 피디는 두 사람의 이야기를 40분짜리 영상으로 만드느라 날을 샜다. 날을 샜어도 두 사람의 이야기가 생기가 넘쳐 좋았다. 가장 꽉 찬 <현주의 책>이 만들어진 것 같다. 윤 작가는 촬영 내내 편안한 형님 같은 느낌이었다. 그런 편안한 분위기에서 속 깊은 이야기가 빵빵 터졌다. (그런 점에서 2부를 꼭 보셔야 한다) 윤 작가는 조 피디의 평대로 ‘만화계의 김제동’이 아닐까 싶다. 생각도 깊고, 소신이 있으며, 정곡을 찌르는 촌철살인의 멘트를 수시로 날렸다. 김제동이 수다스럽다면 윤 작가는 좀 진지한 편이라는 차이가 있다. 좋은 사람의 좋은 생각을 전하는 일은 늘 즐거운 일이다. 연출 박종찬 기자 조소영 피디 pjc@hani.co.kr
[인터뷰 전문]
“바둑과 샐러리맨 결합, 운명처럼 만났죠”
처음 제목은 고수, 그러나 익숙한 루저로 - 어젯밤은 잘 보내셨습니까. (웃음) 페이스북에 새벽 여섯시까지 글을 올리셔서 놀랐어요. “마감 있는 날은 전날부터 잠을 안 자요. 이틀에 한 번 잠을 자죠. 오늘이 마감이라서 아침 여덟시쯤 작업을 끝내고 나왔습니다.(웃음)” - 단행본 <미생> 1, 2권이 출간되었죠. 반응이 좋은데 예상을 하셨나요. “<미생>은 걱정을 많이 하고 시작한 작품이에요. 그래서 준비도 걱정만큼 하면 독자들의 지지를 받지 않을까 생각은 했지만, 이 정도의 반응은 예상 못 했어요. 기분은 좋은데 앞으로 만들어야 할 회차가 많이 남아 있어서, 기대치만큼 해내야 한다는 고민을 또 합니다.” -다음 포털 사이트에서 동시 연재중인데. 독자평점 1위를 지키고 있죠. ‘바둑’과 ‘직장인’ 을 결합한 작품을 구상하게 된 계기가 있다면요. “사실 10년 정도 전부터 바둑과 창업 소재에 관심이 많아서 준비를 했는데 지지부진 하다가 포기했거든요. 그러다가 위즈덤하우스 출판사로부터 ‘바둑’과 ‘샐러리맨‘에 대한 소재를 제안받았는데 운명 같더라고요. 덥석 시작 했습니다.” - ‘미생’의 뜻이 ‘아직 살아있지 못한 자’죠. 여운이 있는데, 어떻게 나온 제목이죠? “처음 출판사에서 제안한 제목은 ‘고수’ 였어요. 바둑의 ‘고수’가 사회에 나와 세상 사람들에게 바둑의 지혜로 일갈한다는 내용. 그런데 저는 ‘고수의 세계’를 탐내지 않거든요. 한 분야의 고수라고 모든 분야의 고수는 아니잖아요. 사람은 저마다의 포지션이 있다고 생각하는 편이죠. 고민한 뒤 제가 매력을 느끼는 분야인 ‘루저’ 로 돌아갔어요. 바둑 승단에 실패한 사람에서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특별히 악인이 없어도
샐러리맨 일상에서 ‘매력적인 갈등’ 나오겠더라 -주인공 ‘장그래’와 ‘원 인터네셔널 종합상사’의 ‘영업 3팀’. 이들의 일상에 몰입한 독자들이 참 많았는데요. 주요 캐릭터는 어떻게 그려졌습니까. “그동안 드라마, 영화, 소설, 만화 등에서 ‘회사’라는 소재를 많이 다뤘어요. 대부분 인상적으로 접근하고 묘사했고요. ‘무협지’처럼 대단한 승부가 있는 곳, 그 승부에 대다수 사람들이 속한 양 말이죠. 하지만 실상 그렇지 않거든요. 최종 서류에 ‘사인’하는 사람들은 따로 있고, 그 사인이 있기까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준비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의 샐러리맨이에요. 때문에 특별한 악인 없이도 위기가 만들어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어요. 이 평범한 이들의 소소한 일상에서 이야기를 시작해보자, 일상에서 만들어진 갈등에서 아주 매력적인 이야기와 샐러리맨들이 나올 거다, 싶었죠. 그래서 꾸린 팀이 ‘영업 3팀’이에요. 그렇게 워커홀릭 오과장, 착실한 김대리, 그리고 주인공 장그래가 태어났어요.” - 특별히 애착 가는 인물이 있나요? “아무래도 기질적으로 가장 닮은 ‘오과장’을 좋아해요. 과로의 아이콘이죠. 늘 일에 치여서. (웃음)” - 오과장의 눈은 언제 하얗게 될까 궁금하다는 분도 계시던데요. (웃음) “그날은 바로 오과장이 이 회사를 그만 두는 날일 겁니다. (웃음)” -단행본은 33수(회)까지, 연재는 67수(회)까지 왔어요. 구상 기간도 꽤 길었을 듯합니다. “<이끼> 마감 후 바로 구상에 들어가 지금까지 3년이에요. 애초에 남이 제안한 작품이었기 때문에 기대에 맞춰야 한다는 부담감, 그리고 그들이 바라는 것이 정확히 뭔가 하는 고민을 포함해 3년은 그 심적 부담감을 덜어내야 했던 시간이었죠. 결국 ‘이건 누구의 작품도 아니고 나의 만화다’라고 인식을 바꾸고 주체적으로 변하기까지 걸린 기간인데. 저는 제가 원해서 해야 일이 잘되는 사람이라서요.” 수는 단순히 횟수의 의미?
바둑이 ‘핵심 정체성’을 상징 - 바둑계에 역사로 남은 실제 대국 한판을 회차마다 한 수 한 수 복기하고 있어요. 각 에피소드와 딱 떨어질 때가 많은데, 설마 구상할 때부터 염두 하신 것인지. “아니에요. 그렇게 하려면 저는 바둑 9단이 되어야 해요. 단지 횟수의 의미를 수의 의미로 바꾼 것밖에 없어요. 이렇게 훌륭한 대국을, 일반 독자들도 호기심을 가졌으면 하는 바람이 좀 있었고요. 만화의 핵심 정체성이 바둑에서 시작했음을 상징하고 싶었죠.” -인쇄분과 연재본이 미묘하게 다른데요. 예를 들어 단행본에는 웅장한 바둑기보 해설이 들어가 있고, 웹툰에는 미묘한 컷 변화가 있죠. 이것도 애초에 기획된 부분인가요? “예, <이끼> 그릴 때는 웹툰을 먼저 그리고 출판을 했는데 나중에 단행본으로 읽는 맛이 너무 사라지는 거죠. 그래서 <미생>은 출판만화 버전을 먼저 만든 다음 웹툰 버전으로 재편집하고 있어요. ‘수 해설’은 단행본에 대한 선물 같은 건데 웹툰 연재할 때는 내용이 무거워질까 봐 제외했거든요. 그런데 댓글 중 한 분이 수 해설을 계속 진행하고 계세요. (웃음)” -그분 인기 많으시던데요. 정체가 궁금하던데, 혹시 출판사 관계자이신가요? “잘 모르겠어요. 출판사 관계자도 아니에요. 그런데 해설을 보면 바둑을 절대 모르는 분도 아니고요. 바둑을 잘 두는 분 중에서도 바둑의 바깥 세계 이야기를 많이 아시는 분이라 추측합니다.” - 이야기가 총 몇 수까지 가나요? “일단은 1차로 145수까지 갑니다. 그런데 한국기원에서 이 작품을 너무 좋아해서, 제가 바둑 기보대로 바둑이 끝난다고 했더니, 2차는 300수짜리 기보를 제공하겠다고. 하하.” 독자 참여로 진화하는 작품
속상한 댓글 보면 “꼭 복수해드리겠습니다” - 그런 댓글 덕분에 만화가 좀 더 통통해진다는 느낌이 있어요. “그렇죠. 매 회 400~500개 정도 댓글이 달리는데 거의 다 봅니다. 미생 댓글은 단순 감상하고 나가는 분들이 없고 정보를 주는 분과 자기 고백하시는 분들이 많아서요. 읽다 보면 다음 횟수에 대해 보다 풍부하게 고민하는 지점이 생기죠. 상호보완적인 부분이 있어요.” -독자들도 서로 고백하며 배우고 하시던데요. 혹시 기억에 남는 댓글이 있으시다면. “자기 고백적인 댓글이 너무 많아서 저도 막 뭉클하고 그래요. 특히 남편과 맞벌이하는 ‘선 차장’ 이야기할 때, 맞벌이하는 주부 분들이 댓글을 정말 많이 달아주셨죠. 댓글 보다가 이동 중에 운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에요. 또 어떤 분이 말하시길, 회사 체육대회 날 아내가 도시락을 싸왔는데 상사 앞에서 박살나고 있는 자신을 보고서 울며 돌아갔다는 거에요. 아우! 얼마나 속이 상하던지!! 회사도 같이 잘 살자고 다니는 건데, 상사의 배려심 없는 부분이 불편하고 짜증나더라고요. 그런 댓글을 보면 (만화로) ‘꼭 복수해 드리겠습니다’ 생각합니다. (웃음)” -댓글을 통해 에너지를 많이 받으시는 것 같아요. “진짜 많이 받아요. 감사한 건 기본이고 위로를 받죠.” 소림 돋는 디테일은 묻고 또 묻고 ‘3년 공부’
“이야기는 제가 만들지만 디테일은 취재원이 만드는 것” - 소름 돋는 디테일. 구체적으로 어떻게 취재가 된 건지. “한국기원은 3년 동안 팀처럼 움직이며 취재했어요. 구상할 당시에는 프로입단에 실패한 사람들을 만나려다 안 만났는데, 인생의 큰 슬픔을 제 이익을 위해 꺼내도록 부탁하는 것이 실례라 여겨서요. 대신 입단 실패는 하였으나 다른 분야에 성공적으로 안착한 사람들을 만났죠. 나중에는 독자들이 댓글이나 메일로 먼저 연락을 하시더라고요. ‘내가 장그래 같은 사람이다, 취재 때문에 연락하시면 언제든 만나겠다.’ 정말 감사했습니다. 반면에 기업 취재는 매우 어려웠고요. 종합상사는 전부 다 거절당했는데 이래저래 알게 된 분들이 몇 분 계세요. 그분들과 취재가 아닌 ‘스터디’를 했죠. 저 같은 경우는 과장이 더 높은 건지 부장이 더 높은 건지 제대로 모를 정도였거든요. ‘직급’과 ‘직책’이 다르다는 것도 이번에 처음 알았는데, 그래서 스터디를 하면 제가 굉장히 무식한 단계까지 내려가 질문을 해요. 실례가 되도 거의 까놓고 질문을 하죠. 회사 경험이 없기 때문에.” - ‘말단 직원부터 사장까지 안 해보면 알 수 없는 내용들인데, 이 작가는 도대체 무엇을 했냐’ 라는 독자 반응. 독한 취재를 하셨군요. “만화지만 리얼함은 담보해야 하죠. ‘이런 에피소드를 생각하고 있는데 실제로 가능한가?’ 물었을 때, 상대방이 ‘무리는 아니다’ 하면 앞으로 가요. ‘이 캐릭터가 이렇게 할 건데 무리인가?’ 물었을 때, 상대방이 ‘무리일 수 있다. 사전에 이런 절차가 있거나 후에 매우 혼이 나야 한다.’ 하면 가이드를 받고 가고요. 그들은 일상이니까 업계용어를 쉽게 말하는데 때마다 저는 ‘스톱 스톱!’ 급하게 외치고 받아 적고 나서 어떤 범주 안에서 쓸 수 있는 단어인지 정리해요. 결국 이야기는 제가 만들지만 지탱하는 디테일은 그분들이 만드는 거죠. 진짜 고마운 분들이에요.” ‘청년’ 윤태호
미대 실패, 콤플렉스, 열등감, 분노와 자격지심 - ‘이 작가의 과거가 궁금하다’는 반응 역시 많았어요. “어릴 때부터 미술을 좋아했는데 집안이 어려워져서 서울로 올라와 허영만 화백 화실로 들어갔어요. 93년 첫 데뷔를 했는데 스토리가 존재하지 않는 만화를 그렸다는 생각에 실망을 했고, 다시 문하생으로 돌아가 2년간 스토리 공부를 하고 다시 데뷔했고요. 그런데 데뷔 후에도 뭔가 ‘해피’하지는 않았고요. 연재하다가 폐간된 곳이 3군데 정도 되는 식이었죠.” - 상황들이 쉽지 않았네요. “무엇보다 개인적인 트라우마를 계속 벗어날 수가 없었어요. 어린 시절 피부가 약했던 신체적인 문제, 콤플렉스, 미대 실패에 대한 분노, 열등감, 자격지심…. 등을 못 벗어났던 거죠. 예를 들어 당시 같이 공부했던 친구들은 서울대, 홍대 들어갔는데 나는 왜 못 그랬을까 같은 생각 말이죠. 그런 생각을 하면서 속상한 20대를 보냈는데요. 당시 만화를 보면 개그만화를 해도 조소나 냉소가 섞인 개그만화가 많아요. <야후> 같은 경우는 노골적으로 대한민국이란 사회에 테러를 가하기 위해 그린 작품이고요.” 점성술, 성경, 명상 책에서 얻은 교훈
“부풀리거나 폄훼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보자” - 그 시기를 벗어나게 된 계기도 있었나요? “당시에 5년 동안 연재하던 <야후>를, 두 주인공을 죽이면서 끝냈어요. 만화를 한다는 자체에 대해서 상실감이 많이 오더라고요. 이어서 제 아이가 태어났는데 이제는 만화보다 아이와 노는 것에서 저 자신이 채워지는 느낌이 들었고요. 서서히 만화와 멀어지다가 문득 만화 외적인 공부에 빠지게 되었죠. 별자리 공부 같은 점성술이나 명상 관련 책, 또 성경도 꺼내 읽게 되고요. ‘왜 나는 이런 인생역정을 경험해야 했던 걸까’ 같은 자신에 대한 탐구를 깊게 했어요. 탐구하는 게 재미있다 보니까 또 만화는 안 하고. 다양한 책들을 읽으면서 한 생각이, ‘나를 부풀리거나 폄훼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보자’는 것이었고. 그 생각을 훈련했던 시간 아니었던가 싶고.” - 자신에 대한 연구란 또한 사람 성향에 대한 연구잖아요. 만화에서도 캐릭터 구상 등에 도움이 많이 될 것 같은데요. “직관적으로 개입이 돼요. <이끼> 때도 당시 읽었던 <성경> 등이 도움이 되었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인용해 쓰는 부분 외에도 인간 자체를 신격화시키는 부분과 이야기에 대한 것도 다른 책들을 통해 힌트를 받았고요. <미생>에서는 삶을 바라보는 태도나 일상을 바라보는 태도에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 꾸준히 작품 활동을 하셨지만 <이끼>가 워낙 대중적으로 성공하다 보니 신인작가로 보는 분들도 계실 정도에요. 평생에 쓸 재능을 ‘이끼’에 쏟아 부었다는 반응도 있었고요. 다음 작품에 대한 부담이 있었을 것 같은데. “저처럼 어린 시절부터 자존감이 낮게 자란 사람들은 남이 평가하는 내 모습에 대해 예민하거든요. 나보다 남들이 나 자신을 더 정확히 본다고 생각하며 염려가 되었죠. <이끼> 후반부에 나오는 ‘기도원’ 장면을 보면, 그렇게 길게 갈 내용은 애초에 아니었는데, 당시 저는 신들린 듯 막 쓰고 있었고, 마치 누군가의 도움이 있었던 양 말이죠. 그런 경험들을 생각해보면 내가 가진 재능에 비해 월등히 올라갔다고 생각하기도 했고요. 내 미래를 너무 낭만적으로 보는 것 아닌가 싶은 부담이 있었어요.” - 그럼에도, 매번 다른 시도를 하시고. 매 작품이 그림체부터 내용, 분위기가 달라요. 도전의 이유가 있다면. “어린 시절부터 인내심을 가지고 하나에 집중하는 성격이 아니었거든요. 이사도 많이 다니고 뭔가 정착한다는 느낌을 못 받고 자라다 보니까 그림도 그런 듯해요. ‘이 그림체가 너무 좋아서 이렇게 갈 거야’보다는 항상 생각하길 ‘이제 달라져야 하지 않나’ 싶은 거죠. 같은 패턴을 반복하면 저는 일 하는 보람이 없어요.”
“샐러리맨들 한명 한명에게 삶을 색칠해주고 싶은 욕심”
- 주인공 ‘장그래’가 바둑을 그만두고 나서 회사에 입사하기 전 ‘저 불빛 중 나에게 허락된 것이 있을까’ 읊조리는 부분이 있죠. 작가님도 비슷한 경험이 있으신지.
“밤에 남산에 올라 아래를 보다가 ‘이렇게 많은 빛이 있는데 여기 내 집 하나 없네’ 했던 적이 있어요. 저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이 그런 경험이 있더라고요.(웃음) 만화에서는 그 부분에 ‘불빛’을 넣은 거죠. 회사는 낮에도 불을 켜고 일하잖아요. 건물의 창 하나하나가 어떤 팀, 어떤 사람들을 나타내는 표시인데. 저 사람들을 위해 책상과 의자와 컴퓨터가 생기고. 건물이 올라가는데. 저 사람들의 삶에 의미 부여를 해야 하는 것 아닌가 생각했죠. 종로 등지 나가면 점심시간에 흰 와이셔츠를 입은 샐러리맨들이 주욱 나오잖아요. 거의 ‘아이콘’으로 뭉뚱그려져 대변되는 수많은 샐러리맨들. 그들 한 명 한 명에게 삶을 색칠해주고 싶은 욕심이 있었죠.”
- 어떤 에피소드에서는 회식 후 회사원 몇 명이 ‘기업은 소수의 인재로 움직이고 나머지는 묻힌 사람들’ 이라며 호기롭게 술주정을 하는데. 작가님 생각과 반대된 부분이었군요. (웃음)
“예, 그 사람들은 술이 떡이 된 상태로 어두운 골목에 쓰러져 늘어져 버립니다. 징벌을 한 거죠. (웃음)”
“사회 인식은 창작자로서 당연한 태도
우리를 강제하는 질서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없죠” - <미생> 에서 대기업 ‘원 인터내셔널’에 어렵게 입사한 신입사원들을 부서 선배들이 데리고 지나간 곳이 ‘쌍용차 해고 노동자 텐트’였죠. “의도가 있었죠. 그런 회사는 사실 없겠지만 부서의 전통을 만들어 주고 싶었어요. 쌍용차 분향소는 실제로 서울 중심에 있는데 하루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보겠어요. 그래서 그곳을 본다는 행위가 대단히 특별한 건 아니에요. 우리의 일상에 이미 들어와 있는 문제죠. 굳이 신문이나 방송으로 접하는 문제가 아니라고 만화에서 보여주고 싶었고요.” - 늘 ‘판’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고 생각도 했어요. 이번에는 바둑 ‘판’, <내부자들>과 <이끼>도 각각 한국 사회의 어느 ‘판’을 보여주죠. 그 전 작품들도 사회구조나 시스템 등 개인이 바꿀 수 있는 ‘판’과 바꿀 수 없는 ‘판’ 등을 다룬다는 생각이었는데. 어떤가요. “그게 유독 제 눈에 많이 보여요. 80년대에 청소년기를 보낸 사람 치고 사회 질서뿐만 아니라 눈에는 안보이지만 엄연히 우리를 강제하는 질서들에 대해 자유로운 사람이 없죠. 특히 우리나라는 분단 상황이잖아요. 우리를 규제하고 있는 수많은 법 중에 분단으로 생긴 것들이 아주 많거든요. 그런 것들을 인식하지 못하는 건 창작자로서의 태도가 아니라고 생각해요. 대한민국에서 부조리함이란 분단을 교묘히 활용한 집단들과 그렇지 않은 집단들의 싸움이라고도 생각하고요. 그때 창작자는 어디서 무엇을 수혈받으며 살아야 하는가에 대해 고민을 하죠.” - 결국 ‘바둑판 위에 바둑알처럼 존재하는 개인들의 이야기’로 요약되는데. ‘바둑은 전체가 부분을 결정한다. 이 땅이란 전체가 나라는 존재를 결정한다.’ 이런 구절도 있었잖아요. ‘부분’을 담당하는 ‘개인’에 대한 애정이 크신 것 같습니다. “누구나 개인은 자기 내면에 발전소를 하나씩 가지고 있고 모든 개인이 자가발전을 할 수 있어요. 그런데 어느 순간 발전하는 법을 잃어 버리고, 태엽 장난감이 되요. 누군가 태엽을 돌려주는 만큼만 움직이는 것처럼 훈련받는 것 같은데, 제 생각엔 그 원인이 ‘공교육’이에요. 사실 삶을 사는 것 자체가 자가발전이거든요. 그런데 시선이 항상 남에게 가 있어 제 능력을 망각해요. 각 개인들이 자기 앞에 거울을 두고 자신을 바라봤으면 하는 바람이 있어요. 이건 샐러리맨도 그렇고.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 독자 입장에서 <미생>을 보면 판 안에서 비틀거리는 인생을 거울 보듯 돌아볼 수 있는 부분이 많고요. 산업화의 논리, 부동산의 논리, 모든 논리를 벗어나 마침내 시원한 결말을 볼 수 있을까요? “그렇다고 판타지를 만들고 싶지 않아요. 이 친구들이 갑자기 기업의 사장이 되진 못해도, 현실에 굴하지 않는 캐릭터로 만들고 싶다고 생각합니다. 단지 항상 걱정하고 균형을 잡아야 한다는 생각은 이거죠. 대기업이 대상이다 보니 미화하지 말자, 하지만 있는 것을 왜곡하지 말자. 그리고 어떤 특정 사주를 개개인의 직원들에게 투사해서 그리지 말자. 이런 지점들은 굉장히 조심하면서 하고 있습니다.” 살아내는 이야기가 아니라 살아가는 이야기 -<미생>은 성공과 실패에 대한 이야기일까요? “아뇨. ‘성공’이 아니라 ‘성장’에 대한 이야기에요. 살아내는 이야기가 아니라 살아가는 이야기. 한 단계 한 단계 살아가다가 만나는 인생의 허들을 넘어가는 이야기. 우리는 모두 각자의 허들을 넘다가 어느 지점에 죽게 되요. 그러면 이어서 누군가 넘어가고. 그게 역사인 것 같아요. 만화에서는 ‘문’을 연다고 표현되어 있지만 결국 살아가는 것들을 묘사할 뿐이죠. 선명한 답과 태도를 주기 위한 생각은 없습니다.” -성공한 자와 패배한 자. 이들을 보는 시선이 다르다고 느낍니다. “저는 방송에 나와서 ‘당신의 꿈을 포기하지 말고 꿈대로 사세요!’ 하는 분들을 너무 싫어해요. 아니 그러면 자기 꿈대로 못사는 나머지 분들은 어쩌라는 건가. 제2의 삶, 제3의 삶 등 각자의 삶의 모양새가 있을 것인데. 제1의 삶을 못 살면 모두 실패인 건가? 아니거든요. 옛날에 MBC에서 방영하던 ‘성공시대’란 프로그램이 있었잖아요. 역시 논란이 있었어요. 그 프로그램의 딜레마가 기억나는데. ‘돈 많이 버는 것만 성공이냐’ 비판이 있어 철학적으로 접근하면 시청률이 안 나왔죠. 성공을 말하려면 실패의 정의도 있어야 하죠. 과연 내가 대학에 못 갔다고 실패일까. 사랑에 상처받고 사람에 배신당하고 승진하지 못한 게 실패일까. 만약 그것이 실패라면 나의 실패인가 시스템의 실패인가. 만약 나의 실패라고 하면 나는 사라져야 마땅한 존재인가요? 전 아니라고 봐요. 실패가 보여준 어떤 힌트를 디딤돌 삼아 다음으로 넘어갈 수 있게 ‘토스’되는 지점이 있을 것 같은데. 핵심은 그것을 발견할 수 있는 ‘안목’ 아닐까 생각해요.
미생에서 완생으로
“내가 진짜 행복한 것이 무엇인가를 발견하는 것” - 아직 살아있지 못한 ‘미생’의 존재에서 제 몫의 삶을 사는 ‘완생’으로 가려면. 무엇이 중요하다고 보시는지. “사람은 보통 남의 행동을 자신의 행동처럼 이식해 살잖아요. 진짜 중요한 것은 내가 진짜 행복한 지점이 뭔지 아는 거라고 봐요. 내 욕망이 진짜 욕망인지 이식된 욕망인지 정확히 알고 인정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요. ‘내가 이 지구에서 뭘 했을 때 가장 행복했지?’ 생각하고 빨리 회복하는 것 말이죠. 예를 들어 ‘당신의 꿈을 이루세요!’ 란 말을 듣고서 어느 사람은 ‘제가 고등학교 때 밴드부였는데, 생각해보니 제 꿈은 그룹사운드를 하는 거였어요!’ 하죠. 하지만 그건 정확한 발견이 아니에요. 그룹사운드를 꾸려도 그 중 어떤 멤버는 매니저 역할을 하며 팀을 관리하는데 행복을 느끼고, 어떤 이는 대회에 나가 다른 팀과 어울리는 커뮤니케이션을 좋아하고, 누구는 연주 자체에 빠지죠. 누구는 가사 쓰고 곡 쓰는 것을, 누구는 고독하게 대가의 음악을 카피하며 연습하는 지난한 과정을, 누구는 행사를 기획하는 기쁨에서 행복하다고 느껴요. 다양하죠. 이 많은 지점 중에서 어떤 것이 가장 행복했는가, 정확히 발견하는 것이 중요해요.” -자기 욕망의 ‘정직한 발견’ 말이죠. “수십 만장의 셀로판지를 총합한 것이 ‘나’라고 한다면, 그중 핀셋 하나로 살짝 걷어올리는 지점, 분명 나를 행복하게 하는 지점이 있다고 봅니다. 각자가 매우 예민한 핀셋을 가지고 정말 좋아했던 지점, 그 ‘레이어’를 하나 끄집어내는 거에요. 그 낱장을 보며 ‘아 내가 이런 물건이었구나’ 하고 겸허하게 인정하는 것이 ‘완생’의 출발점 아닐까 생각하기도 합니다.” -자신의 욕망을 막 집어낸 후에도 불현듯 두렵기도 하겠죠. “예. 발견한 진짜 욕망을 따라 살려면 그동안 갈고 닦아온, 익히 알아왔던 욕망을 재설정해야 하니까요. 사실 장그래는 실존하는 인물이 아니지만, 그 아이의 질문은 결국 만화를 보는 독자가 받아 보게 되요. 결국 보고 있는 독자 분들이 생각하고, 끝내는 행복한 답을 얻으면 좋겠다는 말.” “나만의 고유성으로 신인 작가와 어깨 싸움하는 작가가 꿈” - 긴 시간 마지막 질문. 작가님의 ‘욕망’이자 ‘꿈’이 궁금합니다. “보다 보편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만화를 하고 싶어요. 그 와중에도 대체되지 않을 제 고유성을 획득한 작가. 정말 많은 사람들에게 보여 지지만 그것이 만만해서 보여 지는 것이 아니라 제 고유성 때문에 보여 지는 것. 제 지면이 나이 먹어도 대체되지 않아 신인 작가들과 어깨 싸움하는. 그런 작가가 되는 게 제 꿈입니다.” 글/ 진행= 전현주 북하니 에디터 bookhani@hani.co.kr 연출= 한겨레TV 박종찬 기자, 조소영 피디 pjc@hani.co.kr
“누구나 자신만의 바둑이 있다” 인생은 거대한 바둑판이다. 그 위에 던지는 오늘의 한 수. 만화가 윤태호의 ‘아직 살아 있지 못한 자들의 이야기’ <미생>은 기업이라는 거대한 판 위에 바둑돌처럼 존재하는 샐러리맨들의 삶을 그린다. 원 인터내셔널 종합상사 인턴사원 장그래의 어린 시절 꿈은 프로 바둑 기사였지만 입단에 실패하고 취업의 문에 버려졌다. 바둑밖에 몰랐던 삶에서 철저히 바둑을 지운 삶으로. 숨 돌릴 틈 없이 펼쳐지는 종합 상사의 직장생활이 신입사원 장그래와 ‘일 중독’ 오 과장, 든든한 멘토 김대리를 중심으로 펼쳐진다. 아직 살아 있지 못한 ‘미생’에서 언젠가 도달할 ‘완생’을 향해 오늘도 한 수 한 수 걸어가는 대한민국 직장인들에게. 만화가 윤태호는 “누구나 자신만의 바둑이 있다”고 훈수한다. 전현주 북하니 에디터 bookhani@hani.co.kr [박 기자·조 피디의 제작 후기]
누구도 대체할 수 없는 ‘윤태호의 고유성’을 보다 판 위에서 비틀거리는 인생, <미생>. 바둑의 한 수 한 수처럼 펼쳐지는 인턴 장그래의 대기업 직장생활 적응기. 바둑에 대해서 아는 것이라고는 흰 돌과 검은 돌이 네모판에서 집짓기 싸움으로 승부를 가린다는 정도의 지식밖에 없지만, 판 위에서 비틀거리는 군상들의 모습이 남 일 같지 않아 금방 빠져들게 된다. 바둑과 직장생활에 대한 소름 끼치는 디테일. 작가의 뛰어나 취재력이 밑바탕이 되었겠지만, 웹툰으로 연재하면서 댓글 속에 담긴 독자들의 가슴 절절한 경험담은 작품에 생기를 불어넣었다. 독자의 참여로 진화하는 작품을 만들고 있다는 점에서 미생은 흥미로운 연구대상이다. 훗날 누군가 ‘디지털 소통이 윤태호의 미생에 미친 상호작용 연구’(?) 따위의 제목으로 논문을 쓰게 될지도…. 윤태호 작가가 이 작품에서 사회문제를 드러내는 방식도 눈여겨봐야 할 것 같다. “사회인식은 작가로서 당연히 가져야 할 문제의식”이라고 말하는 윤 작가는 누구보다 판, 사회, 시스템 등의 문제를 깊이 있게 관찰하고 그것의 모순을 집요하게 추궁한다. 그러나 그것은 당위나 논리, 주장이 아니라 현실 속에서 자연스럽게 끄집어낸 이야기일 뿐이다.(그의 말처럼 수많은 사회현상이라는 레이어에서 가장 민감한 레이어 하나를 끄집어내는 것처럼) 그리고, 상식과 합리성에 기초해 문제제기의 방향을 잡는다. 그러면서 작가는 자기만의 스토리텔링 전략에 직업적 소명을 덧붙여 가치화한다. “종로 거리에 가면 무수하게 마주치는 사람들, 아이콘으로 뭉뚱그려지는 샐러리맨들, 그 사람들 한명 한명이 삶에 색을 칠해주고 싶은 욕심이 있다.” 판을 관찰하고 묘사하는 그이지만, 자신에게 주어진 판에서는 직업인으로서 길을 뚜벅뚜벅 걸어가려 한다. 작가로서 희망에 대해 그는 “나이가 먹어서도 누구도 대체할 수 없는 나만의 고유성으로 젊은 작가들과 나란히 어깨 싸움을 하고 싶은 작가가 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가 쓴 ‘고유성’이라는 단어는 40분 인터뷰를 관통하는 워딩 가운데 단연 최고였다. 후기의 후기. 촬영 당일 윤태호 작가는 <미생> 웹툰 마감을 하느라 날을 샜고, 진행을 맡은 전현주씨는 책을 읽고 큐시트를 작성하느라 날을 샜다. 그리고 나와 조소영 피디는 두 사람의 이야기를 40분짜리 영상으로 만드느라 날을 샜다. 날을 샜어도 두 사람의 이야기가 생기가 넘쳐 좋았다. 가장 꽉 찬 <현주의 책>이 만들어진 것 같다. 윤 작가는 촬영 내내 편안한 형님 같은 느낌이었다. 그런 편안한 분위기에서 속 깊은 이야기가 빵빵 터졌다. (그런 점에서 2부를 꼭 보셔야 한다) 윤 작가는 조 피디의 평대로 ‘만화계의 김제동’이 아닐까 싶다. 생각도 깊고, 소신이 있으며, 정곡을 찌르는 촌철살인의 멘트를 수시로 날렸다. 김제동이 수다스럽다면 윤 작가는 좀 진지한 편이라는 차이가 있다. 좋은 사람의 좋은 생각을 전하는 일은 늘 즐거운 일이다. 연출 박종찬 기자 조소영 피디 pjc@hani.co.kr
〈미생〉의 윤태호 작가가 서울 광진구 능동 세종대학교 교정에서 〈현주의 책〉 진행자 전현주 북하니 에디터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한겨레TV 영상화면 갈무리.
처음 제목은 고수, 그러나 익숙한 루저로 - 어젯밤은 잘 보내셨습니까. (웃음) 페이스북에 새벽 여섯시까지 글을 올리셔서 놀랐어요. “마감 있는 날은 전날부터 잠을 안 자요. 이틀에 한 번 잠을 자죠. 오늘이 마감이라서 아침 여덟시쯤 작업을 끝내고 나왔습니다.(웃음)” - 단행본 <미생> 1, 2권이 출간되었죠. 반응이 좋은데 예상을 하셨나요. “<미생>은 걱정을 많이 하고 시작한 작품이에요. 그래서 준비도 걱정만큼 하면 독자들의 지지를 받지 않을까 생각은 했지만, 이 정도의 반응은 예상 못 했어요. 기분은 좋은데 앞으로 만들어야 할 회차가 많이 남아 있어서, 기대치만큼 해내야 한다는 고민을 또 합니다.” -다음 포털 사이트에서 동시 연재중인데. 독자평점 1위를 지키고 있죠. ‘바둑’과 ‘직장인’ 을 결합한 작품을 구상하게 된 계기가 있다면요. “사실 10년 정도 전부터 바둑과 창업 소재에 관심이 많아서 준비를 했는데 지지부진 하다가 포기했거든요. 그러다가 위즈덤하우스 출판사로부터 ‘바둑’과 ‘샐러리맨‘에 대한 소재를 제안받았는데 운명 같더라고요. 덥석 시작 했습니다.” - ‘미생’의 뜻이 ‘아직 살아있지 못한 자’죠. 여운이 있는데, 어떻게 나온 제목이죠? “처음 출판사에서 제안한 제목은 ‘고수’ 였어요. 바둑의 ‘고수’가 사회에 나와 세상 사람들에게 바둑의 지혜로 일갈한다는 내용. 그런데 저는 ‘고수의 세계’를 탐내지 않거든요. 한 분야의 고수라고 모든 분야의 고수는 아니잖아요. 사람은 저마다의 포지션이 있다고 생각하는 편이죠. 고민한 뒤 제가 매력을 느끼는 분야인 ‘루저’ 로 돌아갔어요. 바둑 승단에 실패한 사람에서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특별히 악인이 없어도
샐러리맨 일상에서 ‘매력적인 갈등’ 나오겠더라 -주인공 ‘장그래’와 ‘원 인터네셔널 종합상사’의 ‘영업 3팀’. 이들의 일상에 몰입한 독자들이 참 많았는데요. 주요 캐릭터는 어떻게 그려졌습니까. “그동안 드라마, 영화, 소설, 만화 등에서 ‘회사’라는 소재를 많이 다뤘어요. 대부분 인상적으로 접근하고 묘사했고요. ‘무협지’처럼 대단한 승부가 있는 곳, 그 승부에 대다수 사람들이 속한 양 말이죠. 하지만 실상 그렇지 않거든요. 최종 서류에 ‘사인’하는 사람들은 따로 있고, 그 사인이 있기까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준비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의 샐러리맨이에요. 때문에 특별한 악인 없이도 위기가 만들어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어요. 이 평범한 이들의 소소한 일상에서 이야기를 시작해보자, 일상에서 만들어진 갈등에서 아주 매력적인 이야기와 샐러리맨들이 나올 거다, 싶었죠. 그래서 꾸린 팀이 ‘영업 3팀’이에요. 그렇게 워커홀릭 오과장, 착실한 김대리, 그리고 주인공 장그래가 태어났어요.” - 특별히 애착 가는 인물이 있나요? “아무래도 기질적으로 가장 닮은 ‘오과장’을 좋아해요. 과로의 아이콘이죠. 늘 일에 치여서. (웃음)” - 오과장의 눈은 언제 하얗게 될까 궁금하다는 분도 계시던데요. (웃음) “그날은 바로 오과장이 이 회사를 그만 두는 날일 겁니다. (웃음)” -단행본은 33수(회)까지, 연재는 67수(회)까지 왔어요. 구상 기간도 꽤 길었을 듯합니다. “<이끼> 마감 후 바로 구상에 들어가 지금까지 3년이에요. 애초에 남이 제안한 작품이었기 때문에 기대에 맞춰야 한다는 부담감, 그리고 그들이 바라는 것이 정확히 뭔가 하는 고민을 포함해 3년은 그 심적 부담감을 덜어내야 했던 시간이었죠. 결국 ‘이건 누구의 작품도 아니고 나의 만화다’라고 인식을 바꾸고 주체적으로 변하기까지 걸린 기간인데. 저는 제가 원해서 해야 일이 잘되는 사람이라서요.” 수는 단순히 횟수의 의미?
바둑이 ‘핵심 정체성’을 상징 - 바둑계에 역사로 남은 실제 대국 한판을 회차마다 한 수 한 수 복기하고 있어요. 각 에피소드와 딱 떨어질 때가 많은데, 설마 구상할 때부터 염두 하신 것인지. “아니에요. 그렇게 하려면 저는 바둑 9단이 되어야 해요. 단지 횟수의 의미를 수의 의미로 바꾼 것밖에 없어요. 이렇게 훌륭한 대국을, 일반 독자들도 호기심을 가졌으면 하는 바람이 좀 있었고요. 만화의 핵심 정체성이 바둑에서 시작했음을 상징하고 싶었죠.” -인쇄분과 연재본이 미묘하게 다른데요. 예를 들어 단행본에는 웅장한 바둑기보 해설이 들어가 있고, 웹툰에는 미묘한 컷 변화가 있죠. 이것도 애초에 기획된 부분인가요? “예, <이끼> 그릴 때는 웹툰을 먼저 그리고 출판을 했는데 나중에 단행본으로 읽는 맛이 너무 사라지는 거죠. 그래서 <미생>은 출판만화 버전을 먼저 만든 다음 웹툰 버전으로 재편집하고 있어요. ‘수 해설’은 단행본에 대한 선물 같은 건데 웹툰 연재할 때는 내용이 무거워질까 봐 제외했거든요. 그런데 댓글 중 한 분이 수 해설을 계속 진행하고 계세요. (웃음)” -그분 인기 많으시던데요. 정체가 궁금하던데, 혹시 출판사 관계자이신가요? “잘 모르겠어요. 출판사 관계자도 아니에요. 그런데 해설을 보면 바둑을 절대 모르는 분도 아니고요. 바둑을 잘 두는 분 중에서도 바둑의 바깥 세계 이야기를 많이 아시는 분이라 추측합니다.” - 이야기가 총 몇 수까지 가나요? “일단은 1차로 145수까지 갑니다. 그런데 한국기원에서 이 작품을 너무 좋아해서, 제가 바둑 기보대로 바둑이 끝난다고 했더니, 2차는 300수짜리 기보를 제공하겠다고. 하하.” 독자 참여로 진화하는 작품
속상한 댓글 보면 “꼭 복수해드리겠습니다” - 그런 댓글 덕분에 만화가 좀 더 통통해진다는 느낌이 있어요. “그렇죠. 매 회 400~500개 정도 댓글이 달리는데 거의 다 봅니다. 미생 댓글은 단순 감상하고 나가는 분들이 없고 정보를 주는 분과 자기 고백하시는 분들이 많아서요. 읽다 보면 다음 횟수에 대해 보다 풍부하게 고민하는 지점이 생기죠. 상호보완적인 부분이 있어요.” -독자들도 서로 고백하며 배우고 하시던데요. 혹시 기억에 남는 댓글이 있으시다면. “자기 고백적인 댓글이 너무 많아서 저도 막 뭉클하고 그래요. 특히 남편과 맞벌이하는 ‘선 차장’ 이야기할 때, 맞벌이하는 주부 분들이 댓글을 정말 많이 달아주셨죠. 댓글 보다가 이동 중에 운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에요. 또 어떤 분이 말하시길, 회사 체육대회 날 아내가 도시락을 싸왔는데 상사 앞에서 박살나고 있는 자신을 보고서 울며 돌아갔다는 거에요. 아우! 얼마나 속이 상하던지!! 회사도 같이 잘 살자고 다니는 건데, 상사의 배려심 없는 부분이 불편하고 짜증나더라고요. 그런 댓글을 보면 (만화로) ‘꼭 복수해 드리겠습니다’ 생각합니다. (웃음)” -댓글을 통해 에너지를 많이 받으시는 것 같아요. “진짜 많이 받아요. 감사한 건 기본이고 위로를 받죠.” 소림 돋는 디테일은 묻고 또 묻고 ‘3년 공부’
“이야기는 제가 만들지만 디테일은 취재원이 만드는 것” - 소름 돋는 디테일. 구체적으로 어떻게 취재가 된 건지. “한국기원은 3년 동안 팀처럼 움직이며 취재했어요. 구상할 당시에는 프로입단에 실패한 사람들을 만나려다 안 만났는데, 인생의 큰 슬픔을 제 이익을 위해 꺼내도록 부탁하는 것이 실례라 여겨서요. 대신 입단 실패는 하였으나 다른 분야에 성공적으로 안착한 사람들을 만났죠. 나중에는 독자들이 댓글이나 메일로 먼저 연락을 하시더라고요. ‘내가 장그래 같은 사람이다, 취재 때문에 연락하시면 언제든 만나겠다.’ 정말 감사했습니다. 반면에 기업 취재는 매우 어려웠고요. 종합상사는 전부 다 거절당했는데 이래저래 알게 된 분들이 몇 분 계세요. 그분들과 취재가 아닌 ‘스터디’를 했죠. 저 같은 경우는 과장이 더 높은 건지 부장이 더 높은 건지 제대로 모를 정도였거든요. ‘직급’과 ‘직책’이 다르다는 것도 이번에 처음 알았는데, 그래서 스터디를 하면 제가 굉장히 무식한 단계까지 내려가 질문을 해요. 실례가 되도 거의 까놓고 질문을 하죠. 회사 경험이 없기 때문에.” - ‘말단 직원부터 사장까지 안 해보면 알 수 없는 내용들인데, 이 작가는 도대체 무엇을 했냐’ 라는 독자 반응. 독한 취재를 하셨군요. “만화지만 리얼함은 담보해야 하죠. ‘이런 에피소드를 생각하고 있는데 실제로 가능한가?’ 물었을 때, 상대방이 ‘무리는 아니다’ 하면 앞으로 가요. ‘이 캐릭터가 이렇게 할 건데 무리인가?’ 물었을 때, 상대방이 ‘무리일 수 있다. 사전에 이런 절차가 있거나 후에 매우 혼이 나야 한다.’ 하면 가이드를 받고 가고요. 그들은 일상이니까 업계용어를 쉽게 말하는데 때마다 저는 ‘스톱 스톱!’ 급하게 외치고 받아 적고 나서 어떤 범주 안에서 쓸 수 있는 단어인지 정리해요. 결국 이야기는 제가 만들지만 지탱하는 디테일은 그분들이 만드는 거죠. 진짜 고마운 분들이에요.” ‘청년’ 윤태호
미대 실패, 콤플렉스, 열등감, 분노와 자격지심 - ‘이 작가의 과거가 궁금하다’는 반응 역시 많았어요. “어릴 때부터 미술을 좋아했는데 집안이 어려워져서 서울로 올라와 허영만 화백 화실로 들어갔어요. 93년 첫 데뷔를 했는데 스토리가 존재하지 않는 만화를 그렸다는 생각에 실망을 했고, 다시 문하생으로 돌아가 2년간 스토리 공부를 하고 다시 데뷔했고요. 그런데 데뷔 후에도 뭔가 ‘해피’하지는 않았고요. 연재하다가 폐간된 곳이 3군데 정도 되는 식이었죠.” - 상황들이 쉽지 않았네요. “무엇보다 개인적인 트라우마를 계속 벗어날 수가 없었어요. 어린 시절 피부가 약했던 신체적인 문제, 콤플렉스, 미대 실패에 대한 분노, 열등감, 자격지심…. 등을 못 벗어났던 거죠. 예를 들어 당시 같이 공부했던 친구들은 서울대, 홍대 들어갔는데 나는 왜 못 그랬을까 같은 생각 말이죠. 그런 생각을 하면서 속상한 20대를 보냈는데요. 당시 만화를 보면 개그만화를 해도 조소나 냉소가 섞인 개그만화가 많아요. <야후> 같은 경우는 노골적으로 대한민국이란 사회에 테러를 가하기 위해 그린 작품이고요.” 점성술, 성경, 명상 책에서 얻은 교훈
“부풀리거나 폄훼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보자” - 그 시기를 벗어나게 된 계기도 있었나요? “당시에 5년 동안 연재하던 <야후>를, 두 주인공을 죽이면서 끝냈어요. 만화를 한다는 자체에 대해서 상실감이 많이 오더라고요. 이어서 제 아이가 태어났는데 이제는 만화보다 아이와 노는 것에서 저 자신이 채워지는 느낌이 들었고요. 서서히 만화와 멀어지다가 문득 만화 외적인 공부에 빠지게 되었죠. 별자리 공부 같은 점성술이나 명상 관련 책, 또 성경도 꺼내 읽게 되고요. ‘왜 나는 이런 인생역정을 경험해야 했던 걸까’ 같은 자신에 대한 탐구를 깊게 했어요. 탐구하는 게 재미있다 보니까 또 만화는 안 하고. 다양한 책들을 읽으면서 한 생각이, ‘나를 부풀리거나 폄훼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보자’는 것이었고. 그 생각을 훈련했던 시간 아니었던가 싶고.” - 자신에 대한 연구란 또한 사람 성향에 대한 연구잖아요. 만화에서도 캐릭터 구상 등에 도움이 많이 될 것 같은데요. “직관적으로 개입이 돼요. <이끼> 때도 당시 읽었던 <성경> 등이 도움이 되었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인용해 쓰는 부분 외에도 인간 자체를 신격화시키는 부분과 이야기에 대한 것도 다른 책들을 통해 힌트를 받았고요. <미생>에서는 삶을 바라보는 태도나 일상을 바라보는 태도에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 꾸준히 작품 활동을 하셨지만 <이끼>가 워낙 대중적으로 성공하다 보니 신인작가로 보는 분들도 계실 정도에요. 평생에 쓸 재능을 ‘이끼’에 쏟아 부었다는 반응도 있었고요. 다음 작품에 대한 부담이 있었을 것 같은데. “저처럼 어린 시절부터 자존감이 낮게 자란 사람들은 남이 평가하는 내 모습에 대해 예민하거든요. 나보다 남들이 나 자신을 더 정확히 본다고 생각하며 염려가 되었죠. <이끼> 후반부에 나오는 ‘기도원’ 장면을 보면, 그렇게 길게 갈 내용은 애초에 아니었는데, 당시 저는 신들린 듯 막 쓰고 있었고, 마치 누군가의 도움이 있었던 양 말이죠. 그런 경험들을 생각해보면 내가 가진 재능에 비해 월등히 올라갔다고 생각하기도 했고요. 내 미래를 너무 낭만적으로 보는 것 아닌가 싶은 부담이 있었어요.” - 그럼에도, 매번 다른 시도를 하시고. 매 작품이 그림체부터 내용, 분위기가 달라요. 도전의 이유가 있다면. “어린 시절부터 인내심을 가지고 하나에 집중하는 성격이 아니었거든요. 이사도 많이 다니고 뭔가 정착한다는 느낌을 못 받고 자라다 보니까 그림도 그런 듯해요. ‘이 그림체가 너무 좋아서 이렇게 갈 거야’보다는 항상 생각하길 ‘이제 달라져야 하지 않나’ 싶은 거죠. 같은 패턴을 반복하면 저는 일 하는 보람이 없어요.”
〈미생〉의 윤태호 작가가 서울 광진구 능동 세종대학교 교정에서 〈현주의 책〉 진행자 전현주 북하니 에디터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한겨레TV 영상화면 갈무리.
우리를 강제하는 질서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없죠” - <미생> 에서 대기업 ‘원 인터내셔널’에 어렵게 입사한 신입사원들을 부서 선배들이 데리고 지나간 곳이 ‘쌍용차 해고 노동자 텐트’였죠. “의도가 있었죠. 그런 회사는 사실 없겠지만 부서의 전통을 만들어 주고 싶었어요. 쌍용차 분향소는 실제로 서울 중심에 있는데 하루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보겠어요. 그래서 그곳을 본다는 행위가 대단히 특별한 건 아니에요. 우리의 일상에 이미 들어와 있는 문제죠. 굳이 신문이나 방송으로 접하는 문제가 아니라고 만화에서 보여주고 싶었고요.” - 늘 ‘판’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고 생각도 했어요. 이번에는 바둑 ‘판’, <내부자들>과 <이끼>도 각각 한국 사회의 어느 ‘판’을 보여주죠. 그 전 작품들도 사회구조나 시스템 등 개인이 바꿀 수 있는 ‘판’과 바꿀 수 없는 ‘판’ 등을 다룬다는 생각이었는데. 어떤가요. “그게 유독 제 눈에 많이 보여요. 80년대에 청소년기를 보낸 사람 치고 사회 질서뿐만 아니라 눈에는 안보이지만 엄연히 우리를 강제하는 질서들에 대해 자유로운 사람이 없죠. 특히 우리나라는 분단 상황이잖아요. 우리를 규제하고 있는 수많은 법 중에 분단으로 생긴 것들이 아주 많거든요. 그런 것들을 인식하지 못하는 건 창작자로서의 태도가 아니라고 생각해요. 대한민국에서 부조리함이란 분단을 교묘히 활용한 집단들과 그렇지 않은 집단들의 싸움이라고도 생각하고요. 그때 창작자는 어디서 무엇을 수혈받으며 살아야 하는가에 대해 고민을 하죠.” - 결국 ‘바둑판 위에 바둑알처럼 존재하는 개인들의 이야기’로 요약되는데. ‘바둑은 전체가 부분을 결정한다. 이 땅이란 전체가 나라는 존재를 결정한다.’ 이런 구절도 있었잖아요. ‘부분’을 담당하는 ‘개인’에 대한 애정이 크신 것 같습니다. “누구나 개인은 자기 내면에 발전소를 하나씩 가지고 있고 모든 개인이 자가발전을 할 수 있어요. 그런데 어느 순간 발전하는 법을 잃어 버리고, 태엽 장난감이 되요. 누군가 태엽을 돌려주는 만큼만 움직이는 것처럼 훈련받는 것 같은데, 제 생각엔 그 원인이 ‘공교육’이에요. 사실 삶을 사는 것 자체가 자가발전이거든요. 그런데 시선이 항상 남에게 가 있어 제 능력을 망각해요. 각 개인들이 자기 앞에 거울을 두고 자신을 바라봤으면 하는 바람이 있어요. 이건 샐러리맨도 그렇고.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 독자 입장에서 <미생>을 보면 판 안에서 비틀거리는 인생을 거울 보듯 돌아볼 수 있는 부분이 많고요. 산업화의 논리, 부동산의 논리, 모든 논리를 벗어나 마침내 시원한 결말을 볼 수 있을까요? “그렇다고 판타지를 만들고 싶지 않아요. 이 친구들이 갑자기 기업의 사장이 되진 못해도, 현실에 굴하지 않는 캐릭터로 만들고 싶다고 생각합니다. 단지 항상 걱정하고 균형을 잡아야 한다는 생각은 이거죠. 대기업이 대상이다 보니 미화하지 말자, 하지만 있는 것을 왜곡하지 말자. 그리고 어떤 특정 사주를 개개인의 직원들에게 투사해서 그리지 말자. 이런 지점들은 굉장히 조심하면서 하고 있습니다.” 살아내는 이야기가 아니라 살아가는 이야기 -<미생>은 성공과 실패에 대한 이야기일까요? “아뇨. ‘성공’이 아니라 ‘성장’에 대한 이야기에요. 살아내는 이야기가 아니라 살아가는 이야기. 한 단계 한 단계 살아가다가 만나는 인생의 허들을 넘어가는 이야기. 우리는 모두 각자의 허들을 넘다가 어느 지점에 죽게 되요. 그러면 이어서 누군가 넘어가고. 그게 역사인 것 같아요. 만화에서는 ‘문’을 연다고 표현되어 있지만 결국 살아가는 것들을 묘사할 뿐이죠. 선명한 답과 태도를 주기 위한 생각은 없습니다.” -성공한 자와 패배한 자. 이들을 보는 시선이 다르다고 느낍니다. “저는 방송에 나와서 ‘당신의 꿈을 포기하지 말고 꿈대로 사세요!’ 하는 분들을 너무 싫어해요. 아니 그러면 자기 꿈대로 못사는 나머지 분들은 어쩌라는 건가. 제2의 삶, 제3의 삶 등 각자의 삶의 모양새가 있을 것인데. 제1의 삶을 못 살면 모두 실패인 건가? 아니거든요. 옛날에 MBC에서 방영하던 ‘성공시대’란 프로그램이 있었잖아요. 역시 논란이 있었어요. 그 프로그램의 딜레마가 기억나는데. ‘돈 많이 버는 것만 성공이냐’ 비판이 있어 철학적으로 접근하면 시청률이 안 나왔죠. 성공을 말하려면 실패의 정의도 있어야 하죠. 과연 내가 대학에 못 갔다고 실패일까. 사랑에 상처받고 사람에 배신당하고 승진하지 못한 게 실패일까. 만약 그것이 실패라면 나의 실패인가 시스템의 실패인가. 만약 나의 실패라고 하면 나는 사라져야 마땅한 존재인가요? 전 아니라고 봐요. 실패가 보여준 어떤 힌트를 디딤돌 삼아 다음으로 넘어갈 수 있게 ‘토스’되는 지점이 있을 것 같은데. 핵심은 그것을 발견할 수 있는 ‘안목’ 아닐까 생각해요.
작가 윤태호. 한겨레 자료사진
“내가 진짜 행복한 것이 무엇인가를 발견하는 것” - 아직 살아있지 못한 ‘미생’의 존재에서 제 몫의 삶을 사는 ‘완생’으로 가려면. 무엇이 중요하다고 보시는지. “사람은 보통 남의 행동을 자신의 행동처럼 이식해 살잖아요. 진짜 중요한 것은 내가 진짜 행복한 지점이 뭔지 아는 거라고 봐요. 내 욕망이 진짜 욕망인지 이식된 욕망인지 정확히 알고 인정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요. ‘내가 이 지구에서 뭘 했을 때 가장 행복했지?’ 생각하고 빨리 회복하는 것 말이죠. 예를 들어 ‘당신의 꿈을 이루세요!’ 란 말을 듣고서 어느 사람은 ‘제가 고등학교 때 밴드부였는데, 생각해보니 제 꿈은 그룹사운드를 하는 거였어요!’ 하죠. 하지만 그건 정확한 발견이 아니에요. 그룹사운드를 꾸려도 그 중 어떤 멤버는 매니저 역할을 하며 팀을 관리하는데 행복을 느끼고, 어떤 이는 대회에 나가 다른 팀과 어울리는 커뮤니케이션을 좋아하고, 누구는 연주 자체에 빠지죠. 누구는 가사 쓰고 곡 쓰는 것을, 누구는 고독하게 대가의 음악을 카피하며 연습하는 지난한 과정을, 누구는 행사를 기획하는 기쁨에서 행복하다고 느껴요. 다양하죠. 이 많은 지점 중에서 어떤 것이 가장 행복했는가, 정확히 발견하는 것이 중요해요.” -자기 욕망의 ‘정직한 발견’ 말이죠. “수십 만장의 셀로판지를 총합한 것이 ‘나’라고 한다면, 그중 핀셋 하나로 살짝 걷어올리는 지점, 분명 나를 행복하게 하는 지점이 있다고 봅니다. 각자가 매우 예민한 핀셋을 가지고 정말 좋아했던 지점, 그 ‘레이어’를 하나 끄집어내는 거에요. 그 낱장을 보며 ‘아 내가 이런 물건이었구나’ 하고 겸허하게 인정하는 것이 ‘완생’의 출발점 아닐까 생각하기도 합니다.” -자신의 욕망을 막 집어낸 후에도 불현듯 두렵기도 하겠죠. “예. 발견한 진짜 욕망을 따라 살려면 그동안 갈고 닦아온, 익히 알아왔던 욕망을 재설정해야 하니까요. 사실 장그래는 실존하는 인물이 아니지만, 그 아이의 질문은 결국 만화를 보는 독자가 받아 보게 되요. 결국 보고 있는 독자 분들이 생각하고, 끝내는 행복한 답을 얻으면 좋겠다는 말.” “나만의 고유성으로 신인 작가와 어깨 싸움하는 작가가 꿈” - 긴 시간 마지막 질문. 작가님의 ‘욕망’이자 ‘꿈’이 궁금합니다. “보다 보편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만화를 하고 싶어요. 그 와중에도 대체되지 않을 제 고유성을 획득한 작가. 정말 많은 사람들에게 보여 지지만 그것이 만만해서 보여 지는 것이 아니라 제 고유성 때문에 보여 지는 것. 제 지면이 나이 먹어도 대체되지 않아 신인 작가들과 어깨 싸움하는. 그런 작가가 되는 게 제 꿈입니다.” 글/ 진행= 전현주 북하니 에디터 bookhani@hani.co.kr 연출= 한겨레TV 박종찬 기자, 조소영 피디 pjc@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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