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신소윤의 소소한 TV
대학 때 친구들과 인도 여행을 한 적이 있다. 한달 동안 여행하며 수다한 요리를 맛봤지만 함께 여행한 친구와 나는 그곳을 ‘빈달루’의 나라라고 기억하고 있다. 여행의 끝 무렵 심신이 지쳐 있었던 어느 저녁에 바닷가 도시에서 맥주와 몹시 매운 커리를 먹었다. 건더기라고는 커다란 새우 몇 개밖에 없는 매운맛 폭탄이었다. 다음날 화장실을 들락거리며 고생깨나 했지만 그걸 나눠 먹으며 정신이 혼미해져 잊어버린 여행의 피로, 괴로웠던 그 순간을 웃으며 버텼던 기억 같은 것을 우리는 지금 소중하게 생각한다.
나는 오스트레일리아 시드니를 샌드위치의 도시로 기억하고 있다. 가난한 여행자여서 오페라하우스 근처의 레스토랑을 들락거리진 못했지만 나는 그 도시에서 가장 맛있는 샌드위치 가게를 자신있게 소개할 수 있다. 주변에 물었더니 누구는 프랑스 파리를 골목 귀퉁이 허름한 가게에서 먹었던 스테이크로 기억하고 있다고 했다. 뜻없이 들어간 가게라 메모를 해두지 못했는데 아마도 다음에 파리에 갈 기회가 생긴다면 그 가게를 찾는 여행이 될 것이라고 했다. 누구는 독일 드레스덴을 박력 넘치는 고기요리의 도시로 기억하고 있었다. 누구는 일본 오사카에서의 기억은 오로지 눈 뜨고 밥 먹고, 걷고 밥 먹고, 자기 전에 밥 먹었던 것밖에 없지만 미처 더 많은 음식을 먹지 못한 것이 아쉽다고 말했다.
우리는 여행을 통해 많은 것을 보고 느끼고 오겠지만 사실 그보다 더 많은 것을 ‘먹고’ 오기도 하는 것 같다. 낯선 곳에서 심신을 위로해준 음식으로 그 공간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특히 여행 계획을 세울 때 먹거리를 중심으로 동선을 짜는 사람이라면 ‘먹부림 유람기’ <오감만족 세상은 맛있다>를 보며 즐겁게 정서를 교감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이거, 월~금요일 저녁 8시20~50분에 방영되는 터라 평범한 직장인이라면 물리적으로 보기가 쉽지 않다. 퇴근하고 집으로 직행해 발 닦고 손 씻고 티브이를 켜고 그 앞에 앉아 밥을 먹는다면 그럭저럭 시간을 맞출 수 있을 테다. 하지만 집안에서 리모컨 통치권자가 엄마라면, 특히 엄마가 9시 뉴스 전에 하는 일일연속극 마니아라면 이마저도 쉬운 게 아니다. 대신 매일 ‘본방 사수’를 하지 못하더라도 <오감만족…>은 주중 시간이 되는 때 언제든 보더라도 흐름에 상관없이 여행에 끼어들 수 있도록 시청자를 배려한다. 여행지에서 도시마다 새로운 동행자를 만나며 여행을 이어가듯, 우리 대신 여행길을 걷는 출연진들은 언제든 시청자를 기꺼이 맞아준다.
배우 최필립은 인도네시아 동쪽 끝, 뉴기니섬의 서쪽에 위치한 파푸아에서 모기에게 피를 뜯겨가며 야자나무를 베어 열매에서 수액과 녹말을 얻었다. 노동한 다음에 먹는 달콤한 식사는 풀더미를 식탁 삼아 바나나잎을 그릇 삼아 차려졌다. 저녁에는 주민들이 손님을 접대한다고 귀한 음식인 돼지고기를 내놓았다. 고구마, 바나나잎, 돼지고기를 구덩이에 넣고 뜨겁게 달군 돌을 얹어 몇 시간 동안 익혀낸 ‘바카르 바투’의 맛이 궁금하다. 개그맨 박미연은 헝가리 평원 호르토바지를 달리며 유목민의 삶에 끼어들었다. 유목민들의 전통 팬케이크 호르토바지 팔라친타를 맛보고 곧 화면을 바꿔 도시로 넘어가 부다페스트의 중앙시장에서 재료를 구입해 헝가리 전통 스튜 구야시를 만들어본다. 올리브티브이 <키친파이터>에 출연하며 요리 실력을 발휘했던 배우 서태화는 에스토니아의 한 가정집을 들러 삼겹살을 재료로 요리 대결을 펼친다. 집주인은 채소와 고기를 넣고 볶은 에스토니아 전통음식 빠야록을 만들고 서태화는 제육볶음을 만들었다. 대결이라지만 승리를 따지지 않고 이들은 음식을 나눠 먹으며 낯선 조리법과 다른 문화를 자연스레 익히고 버무렸다.
이번주 방송된 라오스 편에서는 개그맨 이재훈이 출연해 마을 잔치에 초대받아 다진 고기와 채소, 쌀가루를 넣고 볶은 잔치음식 ‘랍’을 맛보는 장면이 나왔다. 재미있는 것은 처음에는 이방인인 것 같던 출연진이 현지인들과 음식을 나눠 먹고, 요리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지켜보고, 음식을 매개로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에 자연스레 서로에게 흡수되어 간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밥정’은 세상 어디서나 통하는 모양이다.
신소윤 <한겨레21> 기자 yo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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