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문화 문화일반

‘프랑크푸르트학파’는 마르크스주의자들 모인 노아의 방주였다

등록 2013-03-27 20:32수정 2013-03-27 23:38

광장에 마련된 ‘아도르노 기념물’ ‘테오도어 아도르노 광장’에 있는 아도르노 기념물. 사각으로 된 투명한 유리 상자 안에 책상과 의자가 있고, 책상 위에 램프, 메트로놈, 아도르노의 대표작 <부정의 변증법> 한권, 악보, 원고 등이 놓여 있다.
광장에 마련된 ‘아도르노 기념물’ ‘테오도어 아도르노 광장’에 있는 아도르노 기념물. 사각으로 된 투명한 유리 상자 안에 책상과 의자가 있고, 책상 위에 램프, 메트로놈, 아도르노의 대표작 <부정의 변증법> 한권, 악보, 원고 등이 놓여 있다.
[김덕영의 사상의 고향을 찾아서]
⑬ ‘비판이론’ 중심지 프랑크푸르트
호르크하이머·아도르노·마르쿠제…
자본주의 심층구조와 모순의 본질
‘비판이론’ 개념으로 명쾌하게 규명
프랑크푸르트학파 산실 겸 중심지
사회연구소는 현대식 건물이면서도
세월의 풍상 겪으며 아름다움 새겨
지식인들에게 학파라는 단어는 묘한 매력을 풍긴다. 심오하고 치열한 또는 숭고하고 장엄한 뭔가가 있는 듯하다. 그래서 학파라는 말만 들어도 가슴이 뛰고 막연한 동경심을 품게 된다. 대학 초년생 시절이던가, 한 대학에서(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 대학 출신들이) 학파를 만든다는 말을 듣고 대단하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얼마 뒤 누군가에게 이런 말을 들었다. 학파는 만든다고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고, 스스로를 학파라고 부르는 것은 학파가 아니라고!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괜히 타 대학 출신이 질투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독일의 프랑크푸르트학파를 조금 공부하면서 그의 말이 옳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프랑크푸르트학파라는 명칭이 처음 쓰인 것은 1950년대 말이었다. 그러나 그 연원은 막스 호르크하이머(1895~1973)가 프랑크푸르트대학 사회철학 교수와 사회연구소 제2대 소장직을 맡게 된 시점인 193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때부터 사회연구소를 중심으로 학제간 마르크스주의 연구를 추구하며 이론적 논의와 경험적 연구를 결합시키려는 일군의 학자가 모여들었는데, 바로 이들을 가리켜 프랑크푸르트학파라고 한다.

프랑크푸르트학파의 대표적인 구성원으로는 호르크하이머를 위시해 테오도어 아도르노(1903~69), 헤르베르트 마르쿠제(1898~1979), 에리히 프롬(1900~80), 레오 뢰벤탈(1900~93), 프란츠 노이만(1900~54), 오토 키르히하이머(1905~65), 프리드리히 폴로크(1894~1970), 발터 베냐민(1892~1940)을 거론할 수 있다. 프랑크푸르트학파는 다양한 마르크스주의 지식인들이 승선한 ‘노아의 방주’였다.

프랑크푸르트학파의 또다른 정신적 지주는 지그문트 프로이트이다. 프랑크푸르트는 당시 베를린 및 하이델베르크와 더불어 정신분석학의 중심지였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은 마르크스의 유물론과 마찬가지로 억압된 인간의 해방에 그 궁극적인 관심이 있었다. 달리 말하자면, 진정으로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사회와 문화를 추구했다는 점에서 프로이트와 마르크스는 공통점을 갖는다. 1930년 사회연구소의 사회심리학 분과 책임자가 된 사회학자이자 정신분석학자인 에리히 프롬은 마르크스주의와 정신분석학을 결합시키려고 했다. 또한 정신분석학은 프랑크푸르트학파가 경험연구를 하는 데에 아주 유용한 연구방법으로 기능했다. 그리하여 프랑크푸르트학파는 ‘프로이트마르크스주의’라고 불리기도 한다.

프랑크푸르트 베스트엔트슈트라세 79번지 호르크하이머가 살던 집에 부착돼 있는 기념편액. 호르크하이머는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산파이자 대부로 불린다.
프랑크푸르트 베스트엔트슈트라세 79번지 호르크하이머가 살던 집에 부착돼 있는 기념편액. 호르크하이머는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산파이자 대부로 불린다.
프랑크푸르트는 독일의 도시 중에서 가장 독일적이지 않게 보인다. 그 중앙역 주변에는 마천루가 꽤 많은데, 이는 인구 69만 남짓의 이 도시보다 큰 도시인 베를린(353만명), 함부르크(181만명), 뮌헨(138만명), 쾰른(102만명)에서도 볼 수 없는 풍경이다. 100m가 넘는 건물이 29개가 되며, 200m가 넘는 건물도 5개나 된다. 가장 높은 건물은 56층에 259m에 이른다. 저 거대한 빌딩 숲에서 한 사상가가 아니라 한 지식인 집단의 흔적을 추적한다는 것이 왠지 부담스럽게 느껴졌다. 그러나 다른 한편 거기에 가려진 프랑크푸르트의 ‘속살’은 과연 어떨까 하는 호기심도 발동했다. 그동안 독일 교통의 중심지인 프랑크푸르트를 수없이 지나치면서 외면만 보았을 뿐 한 번도 그 내면을 들여다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자명한 일이지만, 프랑크푸르트학파의 발자취를 더듬는 기행은 그 산실이자 중심지인 사회연구소의 방문과 더불어 시작했다. 이 연구소는 1924년 프랑크푸르트의 사업가 헤르만 바일(1868~1927)과 그의 아들 펠릭스 바일(1898~1975)의 기부로 창립되었다. 이어서 1932년에는 <사회연구 저널>이 창간되어 이 연구소의 공식 기관지 구실을 하게 되었다.

프랑크푸르트 케텐호프베크 123번지 아도르노가 살던 집에 있는 기념편액. 아도르노는 호르크하이머와 함께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양대 지주로 불린다. ‘주어캄프’ 출판사에서 희사했다는 문구가 적혀 있다.
프랑크푸르트 케텐호프베크 123번지 아도르노가 살던 집에 있는 기념편액. 아도르노는 호르크하이머와 함께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양대 지주로 불린다. ‘주어캄프’ 출판사에서 희사했다는 문구가 적혀 있다.
사회연구소 건물은 프랑크푸르트대학 맞은편에 있으며, 이 도시 중앙역에서 우반(U-Bahn, 도시 내를 천천히 운행하는 열차로 옛날 우리의 전차에 해당함)으로 두 정거장 가면 된다. 그런데 이 건물은 1924년 사회연구소 창립 때 세워진 것이 아니다. 그것은 제2차 세계대전 중에 파괴되었고 현재 4층짜리 건물은 1950년 미국의 원조로 새로 지은 것이다. 그리 크지 않은 이 건물은 겉에서 보니 단순하고 소박하지만 기품이 있어 보였다. 현대식 건물이면서도 어느 정도 고풍스러움도 풍기고 있었다. 아마 60년이 넘는 세월의 풍상을 겪으면서 아로새겨진 아름다움이 아닌가 한다.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입구 왼쪽에 이 연구소 창립자인 펠릭스 바일의 기념편액이 부착되어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4층 발코니에서 보니 하늘을 찌르는 고층건물들이 한눈에 들어왔다. 1층 세미나실에 있는 일부 책을 제외하면 옛날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었다. 아쉽게도 지하에 있는 도서관은 공사 때문에 출입이 금지되어 있었다.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산실이자 중심지인 사회연구소 건물. 프랑크푸르트대학 맞은편에 있으며 1950년 미국의 원조로 지어졌다.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산실이자 중심지인 사회연구소 건물. 프랑크푸르트대학 맞은편에 있으며 1950년 미국의 원조로 지어졌다.
사회연구소는 프랑크푸르트대학과 긴밀하게 연계되어 있었으며 그 소장은 이 대학에서 교수직 하나를 맡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나 법적으로나 재정적으로 독립적이고 자율적인 연구기관이었다. 프랑크푸르트대학은 사회연구소가 창립되고 발전하는 데에 비옥한 토양이 되었다. 산업화와 그에 따르는 수많은 사회문제에 대한 반응으로 제1차 세계대전 직전인 1914년에 문을 연, 독일의 기준에서 보면 신생 대학이었다. 그리하여 처음부터 실험정신과 개척정신이 강했으며 전통적인 과학 이외에도 사회학처럼 새로운 과학에 개방적이었다.

사회연구소는 ‘젱켄베르크안라게’라는 길 26번지에 있는데, 이 길과 90도로 만나는 길 ‘베스트엔트슈트라세’ 79번지에 호르크하이머가 살던 집이 있고 이 집에는 그의 기념편액이 부착되어 있다. 호르크하이머는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철학적, 인식론적 토대를 구축하고 1930년부터 1950년까지 탁월한 조직력과 관리력으로 사회연구소를 이끈, 프랑크푸르트학파의 명실상부한 산파이자 대부였다. 이 학파는 달리 ‘호르크하이머 서클’이라 불러도 무방할 것이다.

프랑크푸르트학파는 비판이론 학파라고도 불리는데, 이는 1937년 호르크하이머가 <사회연구 저널> 제6권에 발표한 논문 ‘전통이론과 비판이론’에서 연원한다. 호르크하이머를 따르면 전통이론, 즉 ‘부르주아 과학’은 사실과 가치가 엄격히 구분된 가치중립적인 그리고 주관성이 철저히 배제된 객관적인 인식을 추구하며 기존의 사회질서를 옹호하고 정당화한다. 이에 반해 비판이론은 사실과 가치 그리고 객관성과 주관성은 변증법적 관계를 이룬다는 가정에서 출발하며, 사회의 심층적 구조와 법칙성을 구명하고 사회적 모순을 비판함으로써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사회를 지향한다.

프랑크푸르트대학. 1차 세계대전 직전에 문을 열었으며, 실험정신과 개척정신이 강하고 새로운 학문에 개방적이었다. 사회연구소는 프랑크푸르트대학과 긴밀히 연계돼 있지만 독립적으로 운영된다.
프랑크푸르트대학. 1차 세계대전 직전에 문을 열었으며, 실험정신과 개척정신이 강하고 새로운 학문에 개방적이었다. 사회연구소는 프랑크푸르트대학과 긴밀히 연계돼 있지만 독립적으로 운영된다.
그리고 역시 사회연구소가 자리잡은 길과 90도 각도로 만나며, 따라서 호르크하이머가 살던 집과 평행을 이루며 바로 옆에 있는 길 ‘케텐호프베크’ 123번지에 아도르노가 살던 집이 있고 그 집에도 기념편액이 있다. 프랑크푸르트의 기념편액에는 다른 도시와 달리 주인공의 얼굴이 입체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아도르노의 기념편액 맨 밑부분에는 독일 유수의 출판사 ‘주어캄프’가 희사했다는 문구가 적혀 있는데, 아도르노와 이 출판사의 관계를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주어캄프의 설립자 페터 주어캄프(1891~1959)가 없었다면 선도적인 문화비판가 아도르노가 없었을 것이며, 아도르노가 없었다면 주어캄프는 문화비판 영역에서 선도적인 출판사가 될 수 없었을 것이다. 아도르노와 주어캄프의 관계는 지식인과 출판사가 상호 협력하여 인간의 정신과 문화에 크게 기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예증한다.

사회연구소를 기준으로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가 살던 집과 반대방향으로 아주 가까운 곳에 ‘테오도어 아도르노 광장’이라는 그리 크지 않은 공터가 있다. 드문드문 나무로 둘러싸인 광장 가운데 아도르노 기념물이 있는데, 그 모습이 아주 흥미롭다. 굳이 양식을 따지자면, ‘포스트모던’하다고 하는 것이 적합할 듯싶다. 사각으로 된 투명한 유리 상자 안에 책상과 걸상이 있고 책상 위에는 램프와 메트로놈과 주어캄프 출판사에서 나온 <부정의 변증법> 견본 한권, 그리고 악보와 원고가 있다. 마치 아도르노가 지금 내 눈앞에서 무언가 열심히 쓰고 있다가 반갑게 인사를 한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이다.

프랑크푸르트 시청으로 사용되고 있는 ‘뢰머’. 뢰머는 로마인들이라는 뜻이다. 14세기에 지어졌으며 600년 이상 시청으로 사용되고 있다.
프랑크푸르트 시청으로 사용되고 있는 ‘뢰머’. 뢰머는 로마인들이라는 뜻이다. 14세기에 지어졌으며 600년 이상 시청으로 사용되고 있다.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는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양대 지주이다. 그러나 둘의 성격은 많이 다르다. 크게 보아 호르크하이머가 관리자라면 아도르노는 이론가이다. 아도르노는 철학, 사회학, 문학, 미학, 음악 등 다양한 분야에서 방대한 저작을 남겼다. 총 20권으로 된 <총서> 가운데 8권(12~19권)이 음악에 할애되어 있다. 아도르노에게 음악은 인식과 사유의 출발점이자 종착점인데, 그 이유는 전위적인 음악이 문화산업에 의해 왜곡된 사회질서를 넘어설 가능성을 열어주기 때문이다. 아도르노는 1966년에 나온 <부정의 변증법>을 자신의 주저로 여겼으며 이 제목을 비판이론과 동일시했다. 그는 이 저서에서 동일시하는 사고를 비판하고 비동일적인 것의 철학을 제시했다. 아도르노 기념물은 이러한 그의 지적 세계를 시각적으로 구현하고 있는 것이다.

아도르노 기념물을 돌아본 다음 프랑크푸르트 시내 구경을 나섰다. 겉으로 보기에 초현대식인 프랑크푸르트의 내면에는 여느 도시 못지않게 많은 옛날 건물들이 보존되어 있었다. 특히 시청 광장은 아주 고풍스런 건물들로 둘러싸여 있다. 더구나 이 건물들은 박제화된 유물로 보존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현대와 유기적으로 연결된 살아 있는 삶의 공간이다. 그중 시청은 세 개의 건물로 되어 있는데, 그 전면은 고딕 양식으로서 독특하게 삼각형 형태를 띠고 있다. 14세기에 지어진 이 건물들은 1405년부터 오늘날까지 600년 이상을 시청으로 사용되고 있다. (프랑크푸르트 시청은 ‘뢰머’로, 시청 광장은 ‘뢰머 광장’으로 불리는데, ‘뢰머’는 로마인들이라는 뜻이다.) 거기에서 조금만 가면 마인 강이 나오는데, 그 다리 위에서 바라본 프랑크푸르트는 현대와 전통이 잘 조화를 이루며 공존하고 있는 도시였다.

호르크하이머, 아도르노, 마르쿠제를 중심으로 하는 프랑크푸르트학파는 자본주의 사회의 심층적 구조와 그 모순의 본질, 즉 도구이성, 일차원적 사회, 물화, 상품화, 권위에의 예속, 총체적 관리사회, 억압사회, 문화적·미학적 야만성 등을 이론적·경험적으로 탁월하게 구명해냈다. 그러나 이에 대한 대안, 즉 인간과 개인의 해방을 가능케 하는 진정으로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사회에 대한 논의는 추상적이고 유토피아적인 성격을 띠었다. 그 이유는 이들이 경제적 합리성 또는 도구적 합리성이라는 단 하나의 합리성에 입각하여 비판이론을 전개했기 때문이다.

프랑크푸르트학파의 2세대를 대표하는 위르겐 하버마스(1929~)는 사회적 합리성의 개념을 도입함으로써 비판이론의 외연을 넓혔다. 의사소통적 이성에 기반하는 사회적 합리성과 도구적 이성에 기반하는 경제적 합리성은 질적으로 상이하며 서로를 제한한다. 바로 여기에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을 극복할 수 있는 가능성이 놓인다. 이렇게 해서 경제로부터 상호작용으로 비판이론의 패러다임이 전환되었다. 비판이론의 제3세대를 대표하는 악셀 호네트(1949~)는 인정투쟁이라는 개념에 입각하여 비판이론의 상호작용적 패러다임을 이어가고 있다.

사회학자·독일 카셀대 교수

<한겨레 인기기사>

딱 300만원에 가능한 럭셔리 해외여행지 어디?
‘국정원 정치개입’ 폭로한 의원·기자 이메일 해킹 당했다
“정대세 잡으러 서울에 왔다”
[김선주 칼럼] 감자를 고를 때와 사람을 쓸 때
공주대 교수 2명, 수년간 여학생 수십 명 성추행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문화 많이 보는 기사

‘의인 김재규’ 옆에 섰던 인권변호사의 회고록 1.

‘의인 김재규’ 옆에 섰던 인권변호사의 회고록

‘너의 유토피아’ 정보라 작가의 ‘투쟁’을 질투하다 2.

‘너의 유토피아’ 정보라 작가의 ‘투쟁’을 질투하다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억대 선인세 영·미에 수출…“이례적” 3.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억대 선인세 영·미에 수출…“이례적”

노래로 확장한 ‘원영적 사고’…아이브의 거침없는 1위 질주 4.

노래로 확장한 ‘원영적 사고’…아이브의 거침없는 1위 질주

9년 만에 연극 무대 선 김강우 “2시간 하프마라톤 뛰는 느낌” 5.

9년 만에 연극 무대 선 김강우 “2시간 하프마라톤 뛰는 느낌”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