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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문화일반

‘그것’

등록 2013-03-29 19:54

정희진 여성학 강사
정희진 여성학 강사
[토요판] 정희진의 어떤 메모
<보스턴 결혼>
에스터 D. 로스블룸·캐슬린 A. 브레호니 엮음
알·알 옮김, 이매진, 2012

원래 뜻은 다양하겠지만, 현재 우리 사회에서 통용되는 이른바 힐링과 자기계발은 갈등하는 실천이다. 자기계발에 매진하다 보면 자연히 힐링이 필요하게 된다. 우리는 “개인의 초능력으로 신자유주의를 돌파하라”, 동시에 “욕심부리지 말고 멈춰라”는 ‘스승들’의 가르침에 우왕좌왕하고 있다. 나는 멘토와 멘티가 개인적으로 조용히 만났으면 한다. ‘힐링’과 ‘계발’의 콘텐츠도 점검해야 할 이슈지만, 일단 출판 시장에서 이들의 요란한 만남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본다.

섹스 생활 없는 여성 동성 결혼을 다룬 <보스턴 결혼>을 읽으며 행복해하다가, 새삼 베스트셀러에 대해 문제의식을 갖게 되었다. 여성주의나 동성애는 ‘그들’에 대한 이슈가 아니라 사회에 대한 담론이다. 하지만 지식사회, 시민운동, 국가정책 등 모든 분야에서 여성이나 레즈비언 이슈는 사소하거나 소수의 문제로 취급된다.

이런 구조에서 여성학 책의 잠정 독자는 전체의 50%, 레즈비언은 동성애 인구가 대략 10~15%이므로 그 반(?)인 5% 내외로 간주되기 쉽다. 깊이 있는 지식과 통찰력, 편집, 번역에서 뛰어난 완성도를 보여주는 책(이 책!)이 ‘여성’, ‘레즈비언’이라는 레터르가 붙어 ‘특수’ 분야의 서적으로만 여겨진다면, 공동체 전체의 손실이 아닐 수 없다.

‘보스턴 결혼’은 헨리 제임스의 소설 <보스턴 사람들>(1885)에서 유래했다. 19세기부터 20세기 초까지 미국 도시 지역에서 경제적으로 독립한 여성들 간의 동거 관계를 말한다. 보스턴 결혼은 여성에게 돌봄, 연대감, 로맨스(모든 경우는 아니지만 일부에서는, 섹스)를 가능케 해 주었다. 현대 여성들처럼 임금노동과 가사노동의 이중 노동에 시달리지 않으면서도 사랑하는 이와 함께 사는 이점을 누릴 수 있다. 보스턴 결혼은 많은 여성에게 합리적 선택이었다(51쪽).

포르노에서든 현실에서든 섹스는 ‘이성간에 이루어지는 남성의 사정(射精)’으로 간주된다. 사정은 섹스의 한 단위(unit)로서 지위를 가진다. 사정 후에는 다음 장면, 다른 관계로 넘어간다. 수천년 동안 인간의 성 활동(sexuality)은 남성의 삽입 섹스가, 인간관계는 이성애 결혼 제도가 최상위 규범으로 군림해왔다. 삽입 섹스의 정치경제학은 엥겔스부터 고찰되어온 계급과 전쟁이 작동하는 기본 원리이다.

하지만 삽입 섹스와 이성애, 그 이데올로기를 그대로 수용하면서 의문과 혼란 없이 살아가는 사람은 없다. 전문화된 연애 상담 시장이 가장 쉬운 증거다. 누구나 동성간이든 이성간이든 애정과 우정의 경계, 섹스의 범위(“어디까지 갔냐”), 친밀성과 성적 행동의 연관성을 고민한다.

폭력의 개념이자 실현 양식 중의 하나는 인간관계와 감정을 제도화하는 것이다. <보스턴 결혼>의 매력과 성취는 인류사 전반에 대한 상상력과 모색에 있다. 로맨틱하고 헌신적이지만 섹스가 필수적이지 않는(asexual) 동성 결혼은, 진부한 질문을 근본적인 질문으로 바꿔 놓는다. 사랑이란 무엇인가, 섹스, 금욕, 육아, 친밀성, 가족이란 무엇인가. 이 모든 것이 이제까지와 다른 방식으로 상호 작용할 때 드러날 인류의 ‘완전한 혁명’에 대한 상상.

인간의 행위는 언어의 제약을 받는다. 특정 규범이 엄청난 권력과 숨 막히는 강제력을 갖는 사회에서, 규범 밖에서 혹은 규범을 넘나들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을 어떻게 접근하고 정의할 수 있을까. 이것은 보편적인 인식론적 질문이다.

여성을 비하하는 사회에서 섹스는 ‘그것’, ‘그 짓’, ‘자빠뜨리기’다. 다 적을 수 없어서 ‘안타깝지만’, ‘그 짓’은 점잖은 편에 속한다. 명확하지만 떳떳하지 못한 지칭인 ‘그것’이 있고, 무한대로 열려 있는 가능성이기에 정의할 수 없어서 사용하는 ‘그것’이 있다.

<보스턴 결혼>에는 지시대명사가 많다. “그것 하기”, “우리가 뭐였든 하여간 그거였을 때, 우리에게 있었던 그게 무엇이었든 간에”, “그 여자는 결코 모를, 그 사람 전부를 알 길”, “소녀가 소녀를 만나고, 소녀가 소녀를 잃고(또는 잃을 뻔하고), 소녀가 소녀를 얻는다” 이 책에서 섹스는 ‘그것’(it)이다. 섹스는 미지의 것이기 때문이다.

정희진 여성학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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