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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문화일반

“내가 사라지면 누가 ‘강철 나비’ 발 지킬지 안타까워”

등록 2013-05-30 19:53수정 2013-05-30 20:59

서울 장안동 네다섯평 크기의 작업실에서 발레 토슈즈를 만들고 있는 이완영씨.
서울 장안동 네다섯평 크기의 작업실에서 발레 토슈즈를 만들고 있는 이완영씨.
[문화‘랑’]나도 문화인
② 국내유일 토슈즈 제작자 이완영씨
낡은 토슈즈 얻어 분해하며
35년 넘는 세월 나 홀로
손가락 굽어가며 만들어왔다
외국산 밀려와 시장을 삼켰다
국산 명맥 끊기는 건 시간문제다

발레리나 강수진의 ‘발 사진’이 인터넷을 달군 적이 있다. 토슈즈 속에 감춰졌던 그의 발은 뼈가 튀어나오고 발톱이 뭉개진 흉한 모습이었다. 그 발 때문에 그는 ‘강철 나비’라는 별명을 얻었다. 발레리나들에게 ‘토슈즈’는 이중적인 의미다. 그들의 춤을 아름답게 만드는 것도, 그들의 발을 흉하게 만드는 것도 바로 토슈즈기 때문이다.

한국 발레가 세계 수준으로 올라섰지만, 발레의 필수품인 토슈즈는 아직도 척박한 분야다. 토슈즈를 만드는 국내 전문가는 ‘미투리’의 이완영(67)씨가 유일하다. 그는 35년 넘게 100% 수작업으로 토슈즈를 만들어왔다. 서울 장안동 그의 작업실은 네다섯평 크기에 불과했지만, 연장 하나하나에 모두 30년 넘은 손때가 배어 있었다.

“처음엔 말 그대로 ‘멘 땅에 헤딩’이었지 뭐.” 그는 1970년대 처음 토슈즈를 만들던 때를 떠올렸다. 원래 이씨는 스케이트화 작업공이었다. 그런데 장사가 안 되자 사장이 바로 옆 토슈즈 공장을 모방해 토슈즈를 만들어보자고 했다. 그가 작업을 맡았다. 그렇게 35년 넘게 명맥을 이어온 미투리가 탄생했다.

제대로 된 기술자도, 단 한 권의 참고문헌도 없다 보니 그는 발레리나들에게 낡은 토슈즈를 얻어와 분해하며 공부를 했다. 가장 큰 난관은 단단한 앞 코(포앵트)를 만드는 기술. 재료를 바꿔가며 1년 가까이 매달렸다. 광목에 아교를 발라 붙여 앞 코를 만들고, 몸체는 공단으로 본을 떠 바늘땀까지 견본과 똑같게 완성했다. 만들고 보니 그럴듯했다.

첫 토슈즈를 들고 한국 남자 발레계의 대부이자 당시 서울예고 무용과장이던 고 임성남 선생을 찾아갔다. “임 선생이 조교한테 그걸 신겨봤는데, 조교가 일어서다 말고 ‘아이구~발이야’하며 주저앉지 뭐야. 하하하.”

실패를 거듭하며 그는 일본의 챠코트, 미국의 카페지오 등 유명 토슈즈 업체 견학을 소원했다. “딱 한 번만 보면 똑같이 만들 자신이 있었거든. 일본도 가고 미국에 갔는데, 허탕만 쳤지. 기술이 새어나갈까 봐 절대 견학을 안 시켜주더라고.”

그래도 독학을 이어가며 조금씩 기술이 쌓였다. 너무 딱딱한 앞코를 보완하기 위해 광목·마대·종이를 함께 넣고, 아교 대신 일본산 수입 풀을 썼다. 강도를 높이기 위해 공단도 나일론 혼방 천으로 바꿨다.

서울 장안동 네다섯평 크기의 작업실에서 발레 토슈즈를 만들고 있는 이완영씨.
서울 장안동 네다섯평 크기의 작업실에서 발레 토슈즈를 만들고 있는 이완영씨.
얼마 안 가 그가 만든 토슈즈가 발레리나들 사이에 입소문을 탔고, 80년대 초엔 국립발레단에 납품도 하게 됐다. 국립발레단이 단원들에게 한 달에 두 켤레씩 연습용 토슈즈를 제공하면서 한 달 60켤레의 수요가 생겼다. “수작업이라 밤을 꼬박 새도 하루 20켤레 이상은 못 만들어. 발레단 공연 땐 기일을 못 맞출까 늘 전전긍긍 했지.”

이씨의 인생도 달라졌다. 발레 자체에는 무지했던 그도 국립발레단 공연 땐 무조건 무대를 찾았다. “혹시 토슈즈가 잘못돼 넘어지면 어쩌나 무대 뒤에서 지켜보는데 땀이 얼마나 나는지…, 예술감독보다 내가 더 떨었다니까.”

국내 1호 프리마 발레리나 김명순씨를 비롯해 김학자·강숙현·장선희씨 등 한국 1세대 발레리나들은 모두 그의 토슈즈를 신었다. “한국인은 서양인보다 발의 볼이 더 넓어. 발목 힘도 부족하고. 그 땐 발레리나마다 의견을 듣고 맞춰주다시피 했어.” 어떻게 하면 예쁜 다리에 알통이 안 생길까, 발톱이 안 빠질까 고민은 더 커졌다. 밤샘 작업에 프레스기에 오른손 검지를 다쳐 손가락이 굽기까지 했다. 그는 “영광의 상처”라며 웃었다.

이후 국내 최초 민간발레단인 ‘유니버설발레단’이 생기고 학교 특별활동 발레반이 생기면서 수요가 늘었다. 80년대 중반엔 월 800켤레까지 팔렸다.

그러나 전성기는 오래가지 못했다. 90년대 중반 수입 자유화와 함께 밀려든 외국 토슈즈 때문이었다. “그 땐 토슈즈를 아껴 신어 발레리나들이 한 달에 두 켤레를 썼어. 지금은 한 달에 열 켤레나 쓴다는데, 다 외제야.”

요즘 발레리나들이 즐겨 신는 토슈즈는 영국의 프리드, 일본의 챠코트, 러시아의 그라시코 등. 국산 토슈즈는 3만5000원인데 외국 브랜드는 켤레당 6만~12만원이나 하지만 시장은 외국산이 장악했다. 국립발레단의 경우 올해 토슈즈 예산으로 1억7905만원을 책정했는데, 연습용까지 모두 수입품을 구입한다. 토슈즈 값 모금을 벌일 정도로 재정적 곤란을 겪는 사설 발레단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이제 국산을 신는 건 초보자뿐. 성수기인 새 학기에도 월 100켤레가 채 팔리지 않는다.

“외국산은 잘 닳지만 발이 편하거든. 국산은 주먹구구식인데다 투자도 없으니 기술 향상이 더뎠던 거야.” 이씨는 서글프지만 현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그도 이젠 토슈즈 대신 발레슈즈와 재즈댄스화를 만든다. 더 안타까운 건 그의 뒤를 이어 토슈즈를 만들 기술자도 없다는 것이다. “내가 죽으면 국산 토슈즈는 사라지겠지. 그동안의 작업을 정리했으면 역사적 자료라도 될텐데.”

요즘도 그는 발레 공연장을 찾아가고, 토슈즈 제작 동영상이라도 올라올까 싶어 유튜브를 뒤진다. 한국인 발에 딱 맞는 토슈즈를 만들겠다는 꿈은 여전하다. 토슈즈를 사러 오는 어린 학생들을 보면 그나마 힘이 난다. “죽기 전에 내가 만든 토슈즈를 신고 춤을 추는 프로 발레리나를 다시 보는 게 소원이야. 그럴 수 있을까?”

유선희 기자 duc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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