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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문화일반

자기중심적 ‘상속자’에 분개하거나 말거나

등록 2013-12-06 19:41수정 2013-12-09 19:46

드라마 <상속자들>(에스비에스)
드라마 <상속자들>(에스비에스)
[토요판] 신소윤의 소소한 TV
불법 수입된 해적판 일본만화를 대여점에서 빌려 보던 때가 있었다. 은밀히 들어온 만화는 교실에도 은근히 스며들었다. 아침에 촌각을 다투며 등교하면서도 방앗간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참새들이 만화책을 조달했다. 그때 교과서 사이에 만화책을 끼워서 <오렌지보이> <화관의 마돈나> <바사라> <장난스런 키스> <피치피치핏치> 같은, 때로 뜻도 모르겠고 손가락이 좀 오그라드는 제목의 순정만화들을 섭렵했다. 돌이켜보면 배경과 캐릭터만 조금씩 달랐지 설정은 얼추 비슷했는데, 이런 식이었다. 권력 혹은 재력을 가진 남자, 학생이라면 우등생에 운동도 잘하고 잘생기고 전교생의 선망이 되는 그런 애가 남자 주인공. 여자 주인공은 예쁘지만 별달리 내세울 것 없거나, 아름답진 않지만 소박한 매력이 있거나, 가난하지만 자존심이 강했다. 선생님에게 들킬까봐 가슴을 조여가며 읽었던 이야기는 대체로 여자와 남자가 우연을 거듭하는 얼토당토않는 사건에 엮이며 사랑에 빠지고 갈등을 겪고 결국엔 이를 극복하는 스토리였다.

그러나 스펙터클한 사랑의 불꽃이 튀는 만화책과 현실에는 커다란 간극이 있었다. 여유가 있어봐야 만화책 속 연애는커녕 체육복을 뒤집어쓰고 쪽잠을 자기에 바빴던 우리는, 그래서 만화를 돌려 보는 순간만큼은 허세에 불과한 그 이야기들에 빠져들었다. 우리가 감정이입했던 만화 속 여성 캐릭터는 언제나 수동적이었다. 남자 주인공은 때때로 여성을 사물화하는 행동과 대사를 남발했다. 그러나 아무도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다. 그저 그게 박력이고, 남성성이고, 일상과 사랑에서 모두 권력을 가진 자가 할 수 있는 행동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다 어느덧 그런 만화를 다 ‘떼는’ 순간이 있었는데, 비슷하게 반복되는 이야기가 지루하기도 했고 그런 비현실성과 폭력성이 어딘가 불편하다 느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 90년대풍 일본 순정만화의 얼개와 캐릭터와 불편했던 지점 모두를 2013년 다시 보게 될 줄이야.

드라마 <상속자들>(에스비에스)은 여러 면에서 시청자들의 논란을 부추겼다. 극 초반 교내 왕따 문제는 극악한 현실만 적나라하게 드러낼 뿐 아무런 희망도 대안도 제시하지 않았다. 따돌림을 당하는 친구를 도우려는 차은상(박신혜)에게 김탄(이민호)은 “약자가 약자 편에 서면 약자들이 될 뿐”이라고 외면을 부추긴다. 공공연히 악행을 공모하는 나머지 학생들은 어떤가. 이들은 부모가 가진 권력의 위치에 따라 줄세워지고, 서로를 친구가 아닌 인맥이라 생각할 뿐이다. 드라마는 사랑에서는 판타지를 그리지만 이를 제외한 모든 이야기에 관해서는 현실보다 더 잔혹한 설정을 제시한다.

언제나 누군가의 우위에 있었던 이들의 자기중심적 대화법도 흥미롭다. 김탄은 차은상에게 “혹시 나 너 좋아하냐”부터 시작해 “혹시 나 너 보고 싶었냐” “나 오늘 너 안 보낼 거야” “지금부터 나 좋아해, 가능하면 진심으로. 나는 네가 좋아졌어”와 같은 식으로 사랑이라는 허울 아래 은상에게 강요하고 명령하고 대답을 요구한다. 삼각관계 한편의 최영도(김우빈)는 또 어떤가. 영도를 두려워하는 은상에게 이런 ‘부탁’을 한다. “네 전화는 네가 받는 것, 말 걸면 대답해주는 것, 눈 마주치면 인사해주는 것.” 하지만 여러 번의 시도에도 은상이 거절하자 이런 협박도. “내가 너 말고 괴롭히겠다는 모두에 김탄도 포함이고, 나도 포함이야.” 이처럼 고압적인 분위기에 짓눌려 있는데도 김탄을 사랑한다 생각하는 은상의 마음은 과연 진짜이긴 할까.

4일자 17회는 여러 면에서 정점을 찍었는데, 제국그룹 회장의 회유와 협박을 이길 수 없었던 은상은 김탄을 떠나기로 약속하고 강원도 속초로 숨어든다. 하지만 김탄도, 영도도 자신이 가진 것을 동원해 하루 만에 사라진 은상의 뒤를 캐고 그 앞에 나타난다. 사랑의 대가로 여주인공은 사라질 권리도 없나. 결국 은상을 놓아주기로 마음먹은 김탄은 포기를 선언하며 울면서 영도에게 이런 말을 전한다. “너 가져.” 소유욕 또한 어두운 측면에서 사랑의 범주에 넣을 수도 있다지만 이런 왜곡된 표현과 감정을 시청자가 그대로 받아들이길 바라는 것은 아니리라 믿는다. 하지만 티브이 앞에 앉은 누군가가 분개하거나 말거나, 이 자기중심적인 상속자들은 아랑곳없이 시청률 23.9%(12월5일 방영분, 닐슨코리아 제공)를 찍으며 순항중이다.

신소윤 <한겨레21> 기자 yo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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