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사물 사전] 정화수 ⓒ이현경
벌써 4년 전 일이다. 이번에도 떨어지면 시는 그만 쓰겠다고 어머니와 약속했었다. 대학씩이나 나온 놈이 막일하면서 시를 쓴다는 게 어머니도 답답하셨을 것이고 남들 입에 오르내리는 게 무척 싫으셨을 것이다. 그러나 어김없이 그해 신춘문예에서 모두 떨어지고 어머니 앞에 앉았다. 아무 말 없이 앉아 있는 동안 차는 다 식어 냉기까지 돌았다. 한참 후에 어머니께서 입을 여셨다.
“아들, 많이 아쉽지? 나도 많이 아쉽다. 1년만 더 해봐라. 방 하나 내줄 테니. 거기서 써라. 해서 안 되면 그때는 다른 거 해라.”
나는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밖에는 눈이 펑펑 내리고 있었다.
창문에 먹빛이 가시면 새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나는 밤새 노려보던 한글 창을 닫고 자리에 누웠다. 눈을 감고 새소리에 맞춰 움직이는 어머니 발소리를 좇았다. 어머니의 발소리는 늘 뒤란으로 향했다. 어머니의 발소리가 멎은 곳에서 기도 소리가 들려왔다.
“비나이다. 비나이다. 우리 큰애 승진하게 해주시고. 비나이다. 비나이다. 우리 둘째 시인 되게 해주시고. 비나이다. 비나이다. 우리 셋째 선생 되게 해주시고. 비나이다. 비나이다. 우리 막내 안 다치게 해주시고. 비나이다. 비나이다…….” 나는 눈을 감고 자는 척을 했다. 어머니의 발소리를 따라다니다가 선명하게 잠들어 있는 둘째가 됐다.
뒤란으로 난 문을 열면 가파른 공산성 산자락이 보이고 바위 위에 흰 사기그릇이 놓여 있는 게 보였다. 사기그릇에는 어머니의 투명한 말씀이 고여 있었다. 그 말씀에 파란 하늘이 담겨 있었다. 나는 뒤란 문을 열어두고 소주를 자주 마셨다. 되지도 않는 문장과 나의 무능을 탓하면서. 내가 소주를 마시는 동안 정화수 주변은 참 분주했다. 공산성에 사는 작은 새들이 목을 축이고 깃을 씻고 가고, 말벌들도 물을 길어 가고, 나비도 서넛 한참을 앉았다 갔다. 나는 어머니 말씀 앞에서 순해지는 짐승들을 생각하며 부끄러워지기도 하고, 어머니 말씀이 깃이 되고 꿀이 되고 열매가 되는 상상을 했다. 어머니 말씀으로 푸르러지는 공산성을 생각했다. 그렇게 취하는 날이 많았다.
하루는 정화수 위로 작은 뱀이 한 마리 떨어졌다. 반은 정화수에 잠긴 뱀의 입에는 생쥐 한 마리가 물려 있었다. 나는 소주잔을 비우려다 내려놓고 한동안 지켜보았다. 정화수에서 생쥐를 기어이 삼키려고 뱀은 안간힘을 쓰고 있었고, 생쥐는 뱀의 입에 물린 채 헐떡이고 있었다. 그러다 툭, 갑자기 생쥐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생쥐를 놓친 뱀은 그릇을 빠져나와 바위틈으로 사라지고, 생쥐는 흰 배를 드러내고 누워 헐떡이다 집 쪽으로 기어오기 시작했다. 다시 소주잔을 비우는데 갑자기 눈물이 났다. 한참을 울었다.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어머니였다.
“아들, 또 술 먹어?”
나는 이불 속으로 들어가 오랫동안 잠을 잤다.
며칠 뒤 나는 시인이 되었다는 전화를 받았다. 어머니는 “시인 되면 뭐가 달라지는 게 있어?” 말씀하셨지만 그날 비 오는 공주 시내를 식사도 거른 채 하염없이 걸으셨다는 얘기를 훗날 듣게 되었다. 지금도 집에 가면 어머니 기도 소리가 들려온다. “비나이다. 비나이다. 우리 막내 선생 되게 해주시고. 비나이다. 비나이다. 우리 막내 선생 되게 해주시고. 비나이다. 비나이다…….”
뒤란에는 어머니의 투명한 말씀이 고여 있다. 그 말씀으로 넉넉해진 공산성이 있다.
박찬세(시인)
박찬세
충남 공주에서 태어났다. 2009년 〈실천문학〉 가을호에 신인상으로 등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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