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욕과 절망으로부터 나를 지키기 위해 싸운다” 아에샤 오우다
“모욕과 절망르로부터 나를 지키기 위해 싸운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이스라엘인들과 같은 땅에서 평화롭게 함께 살기 바라지만 이스라엘인들은 그들만의 나라를 만들려고 아파르트헤이트(인종분리) 장벽을 쌓았다.”
한국 도착 첫날인 지난 2일, 팔레스타인 저항군 출신 여성 작가 아에샤 오우다(61)의 눈엔 불안한 기색이 가득했다. 좌불안석하며 긴장을 풀지 못했다. 다음날에야 그는 비로소 “팔레스타인 동지들이 한국행을 막았다”며 “미국과 한국의 동맹관계 때문에 행여나 내가 돌아오지 못할까봐 걱정했다”고 털어놨다.
23살 무장 투쟁에 참가
체포된 뒤 10년 옥살이
추방된 남편과 생이별
“고통은 우리의 일상” 지난 3일, 파주 세계생명문화포럼에 토론자로 참석한 아에샤는 자신의 처절한 투쟁과 기구한 삶을 털어놓아 참석자들을 숙연하게 했다. 그는 1967년 이스라엘 군대가 전쟁을 일으키자 23살의 나이로 팔레스타인 해방전선에 가담했다. 무장군으로 활동하며 전투, 교육, 선전전을 가리지 않았다. 2년 뒤 무기를 조달하다 체포된 뒤엔 성고문과 구타를 당하기도 했다. 그가 석방된 건 79년. 감옥에 갇힌 지 딱 10년 2주일만이었다. 불행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석방된 직후 한 남자를 만나 결혼했지만 남편은 이스라엘의 분리정책에 따라 다른 지역으로 추방당해버렸다. 5년 동안이나 그를 기다렸지만 결국 소식이 끊어졌다. “조금이라도 희망이 보였다면 언제까지나 기다렸겠지만 소식조차 전할 수 없었다. 지금 전 남편은 재혼해서 딸과 살고 있다.” 이스라엘이 2002년부터 자국의 정착민들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높이 8m에 이르는 분리장벽을 쌓은 뒤 30만의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고립됐다. 팔레스타인 자치 지역은 장벽으로 쪼개졌다. 같은 마을 사이를 장벽으로 가로막아 왕래조차 힘들게 된 곳도 많다. 아이들은 새벽 5시에 일어나 학교에 다니고, 만삭의 산모는 장벽을 넘길 기다리다 아이를 낳았다. “병원에 가려다 가로막혀 죽은 이들도 부지기수”다. 농민도, 회사원도 일을 하려면 장벽을 피해 산길을 굽이굽이 돌아 길을 다녀야 한다. 그는 “하루에도 몇번씩 차에서 내려 옷을 벗고 검문을 당하며 군인들로부터 모욕을 당한다”고 했다. “우리는 매일 자신의 정신을 모욕과 절망으로부터 지키기 위해서 싸운다. 누군가는 지금도 세계 최강의 병기 앞에 돌맹이를 든 채 서 있다. 고통은 우리의 일상이다.” 아에샤 동지들의 염려와 달리, 이날 행사 참석자들은 팔레스타인 난민들을 도우려는 즉석 모금을 시작했다. 이로써 한국인이 만든 평화의 씨앗 하나가 곧 팔레스타인에 전해질 예정이다. 파주/글 이유진 기자 frog@hani.co.kr·사진 김봉규 기자 bong9@hani.co.kr
체포된 뒤 10년 옥살이
추방된 남편과 생이별
“고통은 우리의 일상” 지난 3일, 파주 세계생명문화포럼에 토론자로 참석한 아에샤는 자신의 처절한 투쟁과 기구한 삶을 털어놓아 참석자들을 숙연하게 했다. 그는 1967년 이스라엘 군대가 전쟁을 일으키자 23살의 나이로 팔레스타인 해방전선에 가담했다. 무장군으로 활동하며 전투, 교육, 선전전을 가리지 않았다. 2년 뒤 무기를 조달하다 체포된 뒤엔 성고문과 구타를 당하기도 했다. 그가 석방된 건 79년. 감옥에 갇힌 지 딱 10년 2주일만이었다. 불행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석방된 직후 한 남자를 만나 결혼했지만 남편은 이스라엘의 분리정책에 따라 다른 지역으로 추방당해버렸다. 5년 동안이나 그를 기다렸지만 결국 소식이 끊어졌다. “조금이라도 희망이 보였다면 언제까지나 기다렸겠지만 소식조차 전할 수 없었다. 지금 전 남편은 재혼해서 딸과 살고 있다.” 이스라엘이 2002년부터 자국의 정착민들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높이 8m에 이르는 분리장벽을 쌓은 뒤 30만의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고립됐다. 팔레스타인 자치 지역은 장벽으로 쪼개졌다. 같은 마을 사이를 장벽으로 가로막아 왕래조차 힘들게 된 곳도 많다. 아이들은 새벽 5시에 일어나 학교에 다니고, 만삭의 산모는 장벽을 넘길 기다리다 아이를 낳았다. “병원에 가려다 가로막혀 죽은 이들도 부지기수”다. 농민도, 회사원도 일을 하려면 장벽을 피해 산길을 굽이굽이 돌아 길을 다녀야 한다. 그는 “하루에도 몇번씩 차에서 내려 옷을 벗고 검문을 당하며 군인들로부터 모욕을 당한다”고 했다. “우리는 매일 자신의 정신을 모욕과 절망으로부터 지키기 위해서 싸운다. 누군가는 지금도 세계 최강의 병기 앞에 돌맹이를 든 채 서 있다. 고통은 우리의 일상이다.” 아에샤 동지들의 염려와 달리, 이날 행사 참석자들은 팔레스타인 난민들을 도우려는 즉석 모금을 시작했다. 이로써 한국인이 만든 평화의 씨앗 하나가 곧 팔레스타인에 전해질 예정이다. 파주/글 이유진 기자 frog@hani.co.kr·사진 김봉규 기자 bong9@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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