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개봉작 <행복한 사전>
[토요판] 김세윤의 재미핥기
마지메(마쓰다 류헤이)는 사전 만드는 게 일이다. 원래 영업부에서 일하던 직원인데 사전편집부가 더 적성에 맞는다는 걸 뒤늦게 알게 되었다. 잘 팔겠다는 ‘패기’가 없는 대신 잘 버티겠다는 ‘끈기’가 대단한 사람이었던 게다. 지난주 개봉작 <행복한 사전>(사진)은 그 대단한 끈기로 꼬박 15년을 매달려 기어이 <대도해>(大渡海)라는 국어사전을 펴내는 이야기다.
대도해, 즉 ‘큰 바다를 건너다’라고 특이하게 이름 붙인 사전을 처음 기획하면서, 사전 감수를 맡은 백발의 마쓰모토 선생은 이렇게 말한다. “단어의 바다는 끝없이 넓지요. 사전은 그 넓은 바다에 떠 있는 한 척의 배. 인간은 사전이라는 배로 바다를 건너고 자신의 마음을 적확히 표현해 줄 말을 찾습니다. 누군가와 연결되길 바라며 광대한 바다를 건너려는 사람들에게 바치는 사전. 그것이 바로 ‘대도해’입니다.”
참 근사한 말이다. 하지만 막상 마지메에게 주어진 일은 그리 근사해 보이지 않는다. 3천만개의 단어를 틈틈이 고르고 정리하는 일. 그에 맞는 뜻풀이를 일일이 지어 붙이는 일. 하루종일 깨알 같은 글씨를 읽고 눈이 빠져라 교정지를 살피는 일. 무엇보다 이 지겨운 일상을 15년 동안 매일 반복하는 일. 모든 게 정말 ‘끈기있는 사람’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다. 마지메가 아니면 해낼 수 없는 일이다.
역시 지난주에 개봉한 영화 <해피엔딩 프로젝트>의 주인공 크레이그(제임스 크롬웰)는 집을 짓는 게 일이다. 원래 딸기농사 짓는 농부였는데 지금은 집을 짓는 게 농사짓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되었다. 치매 걸린 아내와 여생을 함께 보낼 생애 마지막 집을 손수 지으려는 참이다. “아담하고 관리하기 편한 작은 집을 지을 거야. 길 건너 우리 땅에 1층짜리로. 내가 직접 지으면 돼.” 남편의 따뜻한 말에 아내는 희미한 미소를 지어 보인다. 남편 나이가 89살이라는 사실은 잊은 듯했다. 치매니까 그럴 수 있다.
자, 평생 자기 살 집은 스스로 짓고 살아온 세대다. 기술도 있고 경험도 풍부하다. 하지만 세상이 변했다. 허가니 규제니 성가신 게 많았다. “나이 70 넘은 사람은 사다리에 올라가면 안 된다”며 만류하는 지인과 가족도 성가셨다. “다 같이 일하면 2, 3주 안에 끝날 거예요.” 딸이 타협안을 제시했지만 오롯이 혼자 힘으로 집 짓겠다는 아버지를 말리지 못했다. “난 이 일이 좋다. 그리고 굳이 2, 3주 안에 끝낼 필요도 없어. 무엇보다 네 엄마 생각이 그래.”
크레이그는 계속 집을 짓는다. 주위 사람들은 계속 그를 말린다. 비가 오고 바람이 불고 계절이 바뀐다. 그래도 아직 세상엔 쉽게 바뀌지 않는 것도 있다고 영화는 말한다. 쉽게 바꿀 수 없는 마음과 쉽게 포기해선 안 되는 가치란 게 있단 걸 보여준다. 그 남자의 집은 이 넓은 세상에 떠 있는 한 척의 배. 때로 어떤 이들은 사랑하는 이와 함께 누울 ‘지상의 방 한 칸’에 의지해 삶을 건너나니. 기억을 잃어버린 아내와 다시 연결되길 바라며 크레이그가 정성껏 지은 집 한 채는, ‘누군가와 연결되길 바라며 광대한 단어의 바다를 건너려는 사람들’을 위해 마지메가 최선을 다해 엮은, 그 두툼하고 아름다운 사전을 닮아 있었다.
<행복한 사전>의 원래 제목은 <배를 엮다>이다. <해피엔딩 프로젝트>의 원래 제목은 <스틸 마인>(Still Mine), ‘여전히 내 것’이다. ‘배를 엮고’ 난 뒤에도, 그 배를 바다에 띄워 보낸 뒤에도, ‘여전히 내 것’으로 남는 건 무엇일까. 어쩌면… ‘시간’일지 모르겠다고 나는 생각했다.
사전이 아니라 사전을 엮는 데 바친 시간, 집이 아니라 집을 짓는 데 쏟은 시간이 남는 거라고 믿고 싶어졌다. 기껏 잡아올린 청새치는 뼈만 남고 말았지만 온전히 혼자 힘으로 버틴 사흘 밤낮의 시간을 대신 움켜쥐고 기쁘게 잠든 <노인과 바다>의 노인처럼, 남의 뜻대로 떠밀리는 한평생에서 마지막까지 ‘여전히 내 것’으로 간직할 수 있는 건 결국 내가 최선을 다해 살아낸 ‘시간’밖에 없지 않을까.
모든 것을 빠르게 사고파는 시대에 어떤 것을 제대로 엮고 짓는 사람들의 이야기. <행복한 사전>과 <해피엔딩 프로젝트>가 개봉하던 그 주에 경주 마우나리조트가 주저앉았다. 최선을 다하지 않은 누군가의 시간 때문에, 미처 최선을 다해 살아볼 기회조차 누리지 못하고 스러진 10명의 시간이 파묻혔다. 내가 본 영화들이 참 좋아서 미소짓고, 내가 사는 이 세상이 참 미워서 눈물지은 한 주였다.
김세윤 방송작가
김세윤 방송작가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